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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巨山)...나의 대통령 - 정상환 국제대 교수·대외협력실장

거산(巨山)...나의 대통령 - 정상환 국제대 교수·대외협력실장  


 

 

중부일보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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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전용기 기내에서 수행원을 격려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5년 꼬박이 청와대 근무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거산 김영삼 대통령께서 나의 대통령이었음이 자랑스럽다.

서른 즈음, 나의 우상이며 영웅이고 큰 산이었던 그를 처음 뵈었을 때가 또렷하다. 그와 악수하면서 나의 손은 떨렸다. 그의 목소리엔 무게가 있었지만 맑고 밝았다. 입 꼬리가 올라간 미소가 나의 중압감을 그나마 줄여주었다.

거산 김영삼! 그는 우리 역사의 굴곡마다 애국적 신념과 의지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다. 독재 권력에 대한 그의 저항과 투쟁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민주적 자유를 가능케 했다.

공화당의 3선 개헌 반대 투쟁, 1979년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국회의원직 제명, 군부독재 전두환 정권 시절의 가택 연금, 1983년 민주인사 석방을 요구한 23일간의 단식투쟁, 1987년 직선제 개헌 투쟁 등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고난과 희생으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왔다.

그를 타고난 승부사라 한다. 그러나 그 만큼 신념과 원칙에 투철한 지도자도 없다.

특히 독재와 부정부패라는 적폐의 한국병을 고치기 위한 그의 고집은 집권 후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부동산실명제, 역사바로세우기 등으로 시동을 걸었다.

더불어 1994년 ‘세계화 선언’으로 ‘우리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이며, 세계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 속에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려는 장기적 구상을 실현코자 했다.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 환경처가 환경부로 정부조직이 개편 되는 등 정보화 사회의 기반을 닦았고, 복지와 환경의 중요성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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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말레이시아 국빈방문 당시 쿠왈라룸푸르 메르데카경기장에서 조깅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이러한 신념과 의지, 혜안과 추동력은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다.

공보비서실 업무특성상 거의 매일 두 세 차례 뵈어야 했는데 30대 초반의 젊은 실무자에게 그는 “수고하제!”라며 늘 따듯했다. 그는 효자였다. 매일 아침 부친인 김홍조 옹에게 문후전화를 드렸다. 별반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아침 인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고향 방문 때 엎드려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은 천진하기 까지 했다.

그는 시간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 높은 분들은 으레 좀 늦는다는 고정관념(?)으로 제 시간에 안 온 인사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에게 시간약속을 지키는 것은 큰 약속을 지키는 기본이었다.

그는 검약이 몸에 배었다. 찹쌀떡과 된장국, 칼국수 등 그의 식단은 조촐했으며, 청와대 본관의 불필요하게 켜진 전등은 그의 손에 의해 꺼져 본관 근무자들을 민망하게 하였다.

그는 친구가 많았다. 짬이 나면 기자, 정치인, 경제인, 이발소·식당 등 옛 단골집 주인들에게 전화하여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들었다.

그는 유머가 있었다. 재임시 그의 어투와 세간의 흥미를 더한, 풍자와 유머의 TV와 책들을 보면서 “내 인기 있제?”라며 쿨하게 웃었다.

내가 본 세상은 거인의 어깨 너머로 본 세상이다. 비록 나는 거산의 작은 돌에 불과하지만 그 산 속에 품어있다는 자부심에 행복했다. 퇴임하신 후에도 신년 세배 드리고 떡국을 함께 하였는데, 아! 2016년 새해는 그리움에 우찌할꼬!

나의 대통령 각하!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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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환

 

국제대 교수·대외협력실장

전) 청와대 공보비서실 행정관

전) 경기도지사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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