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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박종대 pjd30@joongboo.com 2015년 08월 19일 수요일

 

 

[살아있는 역사, 함께하는 문화 수원화성 2016]
정약용 설계·채재공 감독...5.7km 화성, 2년만에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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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18세기 최첨단 건축기술이 집약된 건축물이다. 정조는 화성에 자신의 이상과 염원을 투영하려고 했다. 그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최첨단 건축기술을 이용해 화성을 축조했다. 유네스코는 2007년 화성의 아름다움을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수원화성 축조의 의미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 계획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축조됐다. 당시 정조는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주체적으로 전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정조는 농업과 상업, 교통과 상품유통 중심의 도시 건설을 꿈꿨다.

특히 화성은 백성과 함께 하고 백성을 위한 도시를 창조하겠다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다. 1794년 1월 7일 돌 채취를 시작으로 축성이 시작되고 1794년 1월 26일 총책임자로 우의정 채제공, 실무책임자에 화성유수 조심태가 임명됐다. 화성 설계라는 막중한 임무는 홍문관에서 근무하던 실학자인 정약용에게 맡겼다.

공사에는 거중기와 유형거 등의 신식 장비가 등장했으며 전국에서 최고의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소집됐다.

화성은 정조 30년인 1796년 9월 공사가 완료됐다. 총 2년여에 걸친 공사기간에 동원된 인원은 연 70여만명, 공사비는 80만냥이 투입됐다. 정조는 화성 축성을 기념하기 위해 한 달 뒤인 1796년 10월 16일 축하잔치인 낙성연을 열었다.

◆빛나는 기록유산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성곽 축조의 시작과 끝, 제도 및 의식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화성 건설이 완료된 지 5년 만인 1801년에 편찬됐으며 전체 10권 9책으로 구성됐다.

의궤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수와 봉급 등이 적혀있으며 공사에 들어간 물품의 종류와 가격, 구입 경로가 종류별로 기록돼 있다.

특히 공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건물 각 부분과 공사에 사용된 도구들도 그림과 함께 설명돼 있으며 성을 쌓기 위해 헐어낸 기존 민가들의 철거 비용과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에 대한 포상이나 공사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등에 대한 치료비용까지 나타나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7년 7월 화성성역의궤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화성성역의궤가 등재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등 총 6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나라에 올랐다.

◆화성의 주요시설

수원화성은 전체 길이 약 5.7㎞로 대부분 화강암을 쌓아 축조됐다. 중요한 방어시설은 벽돌로 쌓아올렸다. 벽돌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구조물을 쌓는 데 기여했다. 돌과 목재와 함께 벽돌이 건축 재료로 본격 활용되면서 이전의 재료에서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이 탄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화성은 4개의 성문과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은구, 2개의 장대, 2개의 노대,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1개의 봉돈 등으로 구성됐다.

화성의 남문에 속하는 팔달문은 화성 성곽이 자리한 팔달산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현재 보물 402호로 지정돼 있으며 화성의 서문 역할을 담당하는 화서문은 당시 채제공 선생이 성문에 설치할 현판의 글씨를 작성했으며 보물 403호로도 지정됐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는 정조 19년인 1795년 정조대왕이 직접 군사훈련을 실시한 곳이다. 정조는 서장대가 완성된 뒤 ‘화성장대’라고 써서 현판을 걸었다.

박종대·천의현기자/pjd30@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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