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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 위해 모든 걸 던진…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재조명

국권회복 위해 모든 걸 던진…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재조명광복 70주년, 경기도 학술토론회
숭고한 업적·헌신 기려… 道 정체성·자부심 북돋는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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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5 저작권자 © 경기일보
▲ 경기연구원과 경기일보가 공동주최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한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 학술토론회가 열린 13일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임해규 경기연구원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 경기연구원과 경기일보가 공동주최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한 광복 70주년 기념 경기도 학술토론회가 열린 13일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임해규 경기연구원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구한 말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노론의 일당독재는 조선의 정상적인 사회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조선을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조선을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적 질서의 재건이라는 과거를 지향함으로써 개혁의 방향을 혼란시켰다.

이후 고종은 국가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엄중한 상황에서 전제군주를 꿈꾸고 상황에 따른 편의주의적 정치행태를 일삼다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다.

이 지점에서 일단의 사대부들이 만주로 집단 망명해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꿈꾸는 역사의 반전이 이뤄진다. 이들이 폐허 속에서 꿈꾼 것은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제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석영은 전 재산을 희사했고 그 자신의 몸까지 전선에 바쳤다.

이날 진행된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들은 정조 이후에서부터 일제항쟁기까지 일어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의 패망의 원인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를 되찾고자 했던 경기도의 독립인물의 재조명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 정조 개혁정책의 좌절과 망국의 길-김수지 ‘대비, 왕위의 여자’ 저자
김수지 작가는 개혁가인 정조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조선의 신분제 탈폐, 양반층의 특권 철폐 등 사회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 작가는 정조의 개혁을 크게 세가지로 구분했다. 규장각 설치, 금난전권 철폐, 장용영 설치와 수원 화성 건립 등이다.

규장각 설치의 의미는 실력중심으로 관리들을 등용할 것을 표방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원칙은 사실상 노론 벽파들의 정국 주도권을 저지하고 왕권강화책인 탕평을 추진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1776)에 창설 준비를 거쳐 정조 8년경에 서적 출판과 장서구입, 도서관리와 초계문신 양성에서 정책연구까지 담당하는 기관으로 자리잡는다.

초계문신이란 과거를 통과한 문신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되어 승정원에 추천되었던 당하관 이하 문신으로 37세 이하 사람 중에서 선발했다. 초계문신으로 뽑히면 국왕 도서관에서 재교육을 받고 국왕 측근에서 문화정책 등을 보좌하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규장각 설립의 정치적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정조는 정조1년(1777) 3월21일 이조와 병조에 각각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작성해서 올리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정조는 신분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바로잡을 예정이었다.

정조의 이런 계획은 규장각 검서관직에 서얼 출신을 등용하면서 나타난다. 이때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서얼이기 때문에 출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출사한다.

▲ 임해규 경기연구원장과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최종식 경기일보 편집국장 등 토론 참석자들이 토론회를 마친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임해규 경기연구원장과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최종식 경기일보 편집국장 등 토론 참석자들이 토론회를 마친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조는 정조15년(1791) 1월에 조정 내 유일한 남인이었던 당시 좌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받아드려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다. 신해년(辛亥年)의 정책이라서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고도 하는 이 정책은 한마디로 기존 독점 상인들의 독점 권리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간 잡다한 명목으로 유지되던 시전 상인들의 특권이 폐지됐고 누구나 자유롭게 도성에 들어와 상업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조의 다음 계획은 국왕의 호위만을 전담하는 장용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장용영 설치 목적은 규장각 설립 목적과 같았다. 당시 정조는 국왕을 호위하면서 동시에 정권 독점 세력 노론 벽파 척신들과 얽히지 않은 신흥 무반(武班)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용영의 군관 중에 서얼과 평민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정조 18년(1794) 1월15일 정조는 수원에 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지금의 수원 화성이다. 정조는 강제 부역이 아니라 도급제 임금 노동제를 도입해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된 이 일을 불과 28개월만에 마친다.

생계형 일자리가 없었던 조선에서 왕이 직접 나서 백성들에게 노동 임금을 지급하자 백성들은 환호하며 몰려들어 노동 효율성이 높아진 것이 공기를 단축시켰다.

정조의 이런 개혁 정책에 당시 노론 영수 심환지를 필두로 한 노론 벽파의 격렬한 저항 역시 강도가 점점 더해갔다. 개혁정책에 대한 불만이 정조 앞에서 정면으로 터져 나왔다.

순조실록, 순조 즉위년(1800) 8월10일 3번째 기사를 보면 정조 사망이 연훈방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조 사망의 원인은 급성 수은증기 중독일 가능성이 크다.

정조의 의문스러운 사후에 등장한 정권들은 왕을 무력화시키고 자기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정치에 몰입했으며 백성들을 위한 개혁정책들은 명색만 유지하거나 폐지되었고 삼정의 문란과 같은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정조 재위 연간에는 민란이 없었다. 학자이자 무인 군주였던 정조를 당시 백성들은 조선이 개혁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따랐다. 그러나 정조가 의혹의 죽음을 당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조선은 정조 사후 10년 뒤 순조11년(1811)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을 기점으로 민란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후 크고 작은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철종13년(1862)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이 전국으로 퍼진다.

이렇게 조선 왕조는 정조 사후 권력을 장악한 척신족벌가문 권력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일관된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미 내부적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 고종, 망국 군주가 되기까지-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고종에 대해 유례없이 새로운 물결들이 밀려들던 시대에서 그 흐름을 잘 간파해 국가의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그런 능력이 부족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 소장은 고종이 청나라가 무력해진 것을 보면서도 그때그때 유리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편의주의적 정치행태를 반복해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갔다고 비판했다.

대왕대비 조씨의 지원을 힘입어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앉힌 대원군은 준비된 군주처럼 집권 후 과감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대원군 개혁정치의 큰 목표는 노론 벌열가문의 약화와 왕권 강화였다.

대원군은 노론을 계속 약화시켰다. 고종 2년(1865)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만동묘를 철폐하는 등 47개소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또 호포제를 실시해 그간 군포 징수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 징수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대원군의 이런 내부 개혁은 조선이 정상적인 국가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었다.
문제는 대원군이 세계사적인 흐름을 성리학적 사고로 대처하려 한 점이었다.

대원군 체제에서 조선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두 차례의 외세의 접근에 거세게 대항했다.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지만 형식은 승전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자주적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고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버리는 것으로 즉위 10년 만에 정치 전면에 비로소 등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고종의 친정이 아니라 민씨 척족 정권의 집권에 불과했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돈 주고 벼슬을 산 자들은 착취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국가기강은 무너져 내렸다.

대외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고종13년(1876) 1월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해 회담을 요구하자 고종은 판중추부사 신헌을 접견대관으로 삼아 일본과 조약 체결에 나서게 하면서 전권을 주었다.

2월3일 신헌과 구로다가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다. 9관은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다”는 것으로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부인한 것이었고, 10관도 개항장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항이었다. 조선이 일본과 문호를 열면서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조선과 일본은 기존에 이미 국교가 있었다. 대원군과 모든 정책을 달리하는 것을 최우선의 정책목표로 삼은 고종에 의해 조선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선택했다. 그러면 정권의 중추도 개화파로 형성해야 했지만 정권은 민씨 척족이 중심이 된 친청 수구파에게 주었다. 그러자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은 정변을 각오했다. 개화당은 정변을 위한 무력을 양성했는데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밀지가 필요했다.

고종은 이를 허락했고 갑신정변으로 이어지게 됐다. 정권을 잡은 개화파는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창하고 재능에 의한 인재 발탁을 주창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개혁정강을 발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고종은 자신을 호위해 청군에 넘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사관생도들을 모두 사형시키고 청군을 끌어들인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를 제거한 고종은 일본군과 손잡고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했다. 동학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진압하려 했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청에서 군사를 파병하자 일본도 갑신정변 후에 맺은 천진조약에 의거해서 즉각 파병했다.

위로부터 개혁인 갑신정변이 진압된 지 10년 만에 아래로부터 개혁인 동학농민혁명도 진압되었다. 청군에게 진압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일본군에 의한 진압으로 바뀌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고종의 행태는 계속 반복되었고, 개혁을 희구하는 민중 세력도 사라져갔다.

이후 고종은 밀려드는 외세의 주도권 다툼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데 이어 아관파천으로 온건개화파도 제거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 헌정 체제가 전제왕권에 조금이라도 저해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모두 무너뜨렸다. 대세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뒤집는 것이 고종 정치의 한 특징이었다.

■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과 망국협상-구미정 숭실대 외래교수
구미정 교수는 구한 말에 활동한 이인직에 대해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요리조리 정권의 틈새를 노린 인물’로 평가했다. ‘혈의루’의 작가로 인식하고 있는 이인직은 작가가 아닌 정치가이자, 마치 ‘이완용의 혀’로 활동한 사람이라고 분석했다.

‘혈의루’는 제목부터가 친일적이다. 한문체로 한다면 ‘혈루’(血淚)라 하든지, 국문체로 한다면 ‘피눈물’이라 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명사와 명사 사이에 꼭 ‘의’(の)를 집어넣는 일본 문체를 그대로 모방했다. 서술 방식 역시 이른바 국한문체의 변종인 한문 현토체를 쓰고 있다.

이미 독립신문이 한글의 ‘국문’ 지위를 회복시켰던 시기에서 통감정치가 개시에 따라 일본식 교육과정이 이식되자 다시 국한문체가 국문체를 누르고 우월한 지위로 격상하게 됐다. 혈의루는 이 시기에 ‘만세보’에 한문 현토체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까지 당한 일곱살배기 어린 소녀 옥련이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고 군의관의 도움으로 그 집 양녀로 들어가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는 우호적인 일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일전쟁이 아닌 일청전쟁으로 표기하면서 일본을 중화주의를 대신할 동아시아 권력 편제의 중심으로 선택했다. 일본군대가 평양성민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도 전시국제공법에 따른 행위라고 정당화한다.

이인직이 1907년 하반기에 혈의루를 연재한 지면은 ‘만세보’였다. 그 이전에는 ‘국민신보’ 주필로 있었다. 1906년 1월6일 창간된 ‘일진회’(一進會) 기관회 ‘국민신보’를 불과 5개월 만에 사임하고,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로 옮겨 창간과 주필을 도맡은 셈이다.

이인직은 경영악화로 폐간한 ‘만세보’를 인수하여 ‘대한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시설과 사옥을 넘겨받는 데 드는 거금 2만원이라는 자본의 출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완용 내각이다.

이로써 ‘대한신문’은 명실공이 이완용 내각의 친일 기관지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로, 또 이완용 내각의 홍보 책임자로 정계에 데뷔하는 꿈을 이룬다.

동경정치학교에 관비유학생으로 있던 이인직의 귀국이 러일전쟁과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의 행보가 얼마나 정치적이며 기회주의적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1903년 7월16일 졸업 이후 귀국을 미루던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2월22일 일본 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사령부에 배속, 종군한다. 이 공로로 이듬해 80원의 은사금까지 챙겼으니, 합방 정국에서 그의 ‘활약’도 결코 우발적인 일은 아니겠다.

이인직에게 일본은 ‘성공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였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한 것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8월4일 밤 11시 이인직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문제의 ‘매국협상’을 벌인다.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조반정 이래 계속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합방 당론이 이완용의 하수인인 이인직의 입을 통해 표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합방 이후 이인직이 1907년 7월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을 맡은 대가로, 9월에 선릉참봉에 임명되고, 11월에 중추원 부찬의(주임관 4등)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불과 몇년 사이에 엄청 ‘성공’한 셈이다.

그가 동학보다도 공자교를 택하고 경학원 사성으로 생을 마무리한 것을 보면 그의 욕망이란 결국 ‘반쪽짜리’ 양반이 아닌 진짜 양반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수렴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더불어 이런 그에게 ‘새로운 시대의 선각자’라는 평가가 과연 어울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잇는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퇴행을 욕망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봉건 질서의 상층부에 포섭되기 위해 어떤 변신도 마다하지 않은 기회주의자였다.

■ 친일 수작자 76인, 그리고 집단망명-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
희산 김승학 선생의 증손인 김병기 박사는 일제항쟁기 이후 애국세력과 그 후손들이 환대를 받아야 했는데 현실은 친일세력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이땅의 지도층으로 군림했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며 나라가 다시 국망의 위기에 빠지면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냐고 반문했다.

1910년 망국이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의 조류와 이에 저항하는 애국의 조류로 나뉘게 됐다.

그해 10월 일제는 왕족과 조선 사대부 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렸다. 모두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일왕이 내린 것이다.

▲ 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 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은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을 만나 ‘1억엔에 나라를 팔겠다’라고 흥정을 걸었던 망종(亡種)이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인데 을미사변에 가담하여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제에 붙어 경찰 최고위직인 경무관을 지내고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그 아들이 구용서로, 해방 후에 한국은행 총재가 된 인물이다.

결국 송병준의 외손자가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고 이승만정권에서 상공부장관이 되었던 것이다.

민병석은 병합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는데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다. 그는 조선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사주를 받아 왕실의 병합반대론자를 무마 조정하고 1급 친일파가 되어 훈 1등 자작과 매국공채 10만엔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해방된 대한민국 땅에서 제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이 군자금을 얻으러 가자 밀고하려했던 장승원은 광복회원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아들 장길상은 쌀 70가마 값 1천원을 헌금하고 일제로부터 은배(銀杯)를 받았다. 그 동생 장직상은 중추원 참의로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충직한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생 장택상은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이 되었다.

당시 애국의 조류에 몸을 실은 사람들도 더 이상 나라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나서면 언젠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으로 대대로 내려오던 집과 전답을 비밀리에 처분하고 가족을 인솔하여 낯선 땅, 동토의 땅 만주로 길을 떠난 이들이 있다.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등 강화학파의 무리와 이석영, 이회영 등 6형제가 그러했다.

멀리 안동에 사는 혁신유림 김대락, 이상룡과 김동삼이 이들의 망명 집단에 합류했다.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집안에서만도 150여명이 넘는 대소가구가 망명의 길에 올랐다. 1910년 말부터 시작된 집단망명으로 안동을 떠난 사람은 줄잡아 100여 가구에 1천여명이 넘는 많은 숫자였다.

이들이 압록강을 건넌 이유는 만주에 독립운동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은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의 주요 목표였다. 만주나 연해주에 교포들의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를 기반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망명한 망명객들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모질고 혹독한 것이었다. 강화학파 망명객들의 고단한 삶과 처절한 죽음은 이회영 집안의 6형제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간 막대한 자금은 서간도의 삼원포, 합니하, 고산자 등에서 신흥무관학교 토지를 사고 학생들을 무료로 먹이고 입히고 학교를 운영하는데 모두 소비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세력이 사회의 지도층이 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독립투사나 그의 후손들은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신음해야 했다.

■ 이석영 선생의 독립투쟁과 고뇌-허성관 전 장관, 전 광주과기대 총장
허성관 전 장관은 이석영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기까지 46년이라는 시간이 경과됐다는 점을 잊지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석영 선생의 생가였던 남양주시나 화도읍에서도 이석영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서 만석의 재산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쾌척하고 여든의 노인이 굶주림에 고생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분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 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의 둘째 형님이다. 이석영 선생은 모두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인데 이중 이회영이 앞장서서 형제들을 설득하여 모두 가산을 처분, 6형제 50여명의 전 가족이 솔가하여 1910년 12월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로 망명했다.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유원은 만석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석영에게 상속하였다. 이석영은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독립투쟁에 썼다.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서 책임을 다하는 소위 노블리스 오불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석영의 행동은 역사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석영은 당시 서울 사람이었지만 양부 이유원의 근거지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이다. 그의 전장도 지금의 양주시와 남양주시 등 일원에 있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기려야 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지역에서 이석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석영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모두 한 문장 정도에 그치고 있다. 체계적인 연구 자료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석영 선생은 1910년 56세에 전 재산을 처분해서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 개교에서 교주(지금의 이사장)로 추대되었다.

이석영이 독립투쟁에 쾌척한 재산이 어는 정도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6형제 일가의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이 40여만원이었고 당시 쌀 1섬 가격이 3원 정도였던 사실에 비추어 현재가치가 대략 600억원이었다. 이 금액의 대부분이 이석영의 재산을 처분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처분한 재산의 현재가치가 2조원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고, 가문에서는 6조 내지 7조원쯤 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이석영의 재산을 처분하는 현장에 있었던 이은숙 여사는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 아우들과 뜻을 합하셔서 만여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放賣)해 가지고 경술년(1910년) 12월30일에 대소가가 압록강을 넘었다”고 회고했다.

이석영의 재산은 만여석 재산이 가장 근접한 규모일 것이고, 짧은 기간에 비밀리에 정리했기 때문에 대부분 제 값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석영 일가가 처분한 토지는 대부분이 이석영 본인 소유였다. 그 규모는 농지가 최저 31만평에서 최고 90만평으로 추정되고, 임야가 161만평이었다. 만석 재산이니 농지는 90만평이 근접한 규모일 것이다. 농지 1평 값을 10만원으로 계산해도 900억원이다. 현재 시가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일 것이다.

독립투쟁에서 이석영 선생의 공적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교민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쾌척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에 걸쳐 3천500여명의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핵심이었다. 이석영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독립군 간성들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조국 광복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나왔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대첩 및 의열단 투쟁 등 그 중심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이석영은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재산을 가장 가치 있게 쓰신 분이다. 우리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다. 목숨을 바치고,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신 분들 못지않게 이석영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재산을 독립투쟁에 바친 대가로 스스로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형제와 자녀와 조카들까지 독립투쟁에 바쳤다. 비록 인생에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역사에서는 영원히 성공한 삶이다.

이어진 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은 ‘정조의 죽음은 타살인가’ ‘정조는 왜 친위쿠데타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고종은 개혁군주라는 평가에 대해’ ‘이인직은 왜 이완용을 선택했을까’ ‘이석영 선생의 독립투쟁과 고뇌’ 등의 주제로 자유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김용국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장은 “경기도의 출신 독립운동가를 밝히는 것은 경기도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복돋울 수 있을 것”이라며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를 찾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더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진욱기자
사진=추상철기자

정진욱 기자 panic82@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