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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철환 전 변호사협회장·변호사 "4년 뒤 고법 들어서는 수원…법률시장 격전지될 것"

위철환 전 변호사협회장·변호사 "4년 뒤 고법 들어서는 수원…법률시장 격전지될 것"
[이슈&사람] 엄득호가 만난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장·변호사
데스크승인 2015.04.14 | 최종수정 : 2015년 04월 14일 (화) 00:00:01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이 다시 ‘보통변호사’로 돌아왔다.

그는 변협회장에 당선되려면 꼭 갖춰야 한다는 3가지(서울대 법대 졸업·전관(前官) 출신·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를 모두 갖추지 못한, 이른바 3비(非) 변호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위 변호사는 변협 사상 첫 직선제 회장이 됐다.

변호사업계에서 철옹성과 같은 관습을 깨고 지난 2년간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지내 온 보통변호사 위철환을 만나 그동안의 숨은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2년간 임기를 마무리하고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 소속 보통변호사로 돌아온 소감이 있다면.

“수원은 내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열정을 갖고 땀 흘리며 모든 것으로 받쳐온 제2의 고향이다. 마치 외가 같고, 오래 전 이사를 떠난 옛날집 같은 곳이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함께 고민해 주고 해야할 일이 생기면 거들어주던 고마운 분들이 주변에 많다보니 더 정겹다. 2년만에 돌아온 수원도 달라졌다. 4년 뒤에 고법이 들어서게 되면 법률시장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격전지가 될 것이다. 날로 발전하는 고향에 돌아온 보통변호사라서 더욱 행복하다.”



-무엇보다 수원고법 설치 문제가 변협회장 임기 내에 처리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경기도내 고법 설치에 대해서는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장 때부터 범도민추진위원회 발족을 통해 본격화됐다. 수많은 단체들과 고민도 하고 함께 활동하며 노력했고, 후임 회장인 장성근 경기중앙회장과 상임이사진들을 비롯한 회원들의 동참이 일궈낸 결과물이었다. 무엇보다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받아온 불이익에 대해 공감한 도민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게도 변협회장 선거 때와 맞물리면서 경기도내 고법 설치에 대한 다른 지방변호사회의 지지 서명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고법 설치 여론조사 때부터 현재까지도 관심을 갖고 지면을 통해 도민들께 알린 중부일보의 관심에도 감사를 표한다.”



-초대 직선제 변협 회장이라는 수식어도 빼놓을 수 없다.

“경기중앙회장으로 고법 유치를 이끌었을 때 또 하나의 위치인 변협 부협회장인 저에게 변협회장 선거 방식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 도전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변호사들에게 희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개정이 되고 나니까 그동안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큰 힘이 됐다. 그로 인해 지방 출신 변호사들이 어깨를 펴고 살게 됐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



-변협회장 당시 ‘3비(非) 변호사’라고 알려졌는데, 자신이 3비 변호사라고 생각하나.

“처음 그 표현을 접했을 때 말도 잘 만들어낸다며 감탄도 했었다.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서울 출신도 아니고 판·검사를 지낸 바도 없고, 비명문 변호사…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변호사로 비춰질 수 있다.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변호사 대부분이 갖추고 있는, 말 그대로 보통 변호사라고 표현해 줬으면 좋겠다.”



-당선되면서 기대도 컸고 지방에서 당선된 첫 사례라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는데.

“당선되고 나서 상당히 시간적으로 스케줄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내부적인 업무 말고도 대회적인 행사가 많았다. 국내와 국제 행사를 하면서 2년이 금방 지나갔다. 예전에는 간선제라서 부담없이 지냈는데 첫 직선제라서 느끼는 중압감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큰 부담이었다. 전국 지방변호사회와 로스쿨 25곳을 방문해 간담회를 열었다. 지역에 가서 1시간씩 학생들과 지방변호사회 행사, 유관기관장과의 방문 등등 정신이 없었다.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웃음)”



-변협회장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는다면.

“국내에서는 변협회장 직선제로 인해 회원들의 요구가 쇄도했다. 주 1차례 각 직역별 임원 30여명이 모여 상임이사회를 개최한다. 이러다보니 그 안에서도 이념이 다른 극보수와 극진보, 지역별로는 서울과 지방(비서울), 법원 기능별로는 특허·상고법원 설치, 이해관계로는 로펌과 개인사무실 등등 각자 다른 전선이 형성돼 협회장으로서는 그 모든 중심에 서 있는다는 자체가 힘들었다. 로스쿨과 사시 출신간, 사내 변호사와 기존 변호사간, 여성 변호사의 입장도 귀기울여야 하는 등 변협회장을 가운데 놓고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나름대로 잘 융합시키고 개력과 화합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한국 변호사의 수장으로 어떤 국제활동을 했나.

“국제적으로 곧 국내에서 세계변호사대회가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변호사협회(IBA)에 등록된 변호사만 160여개 국가, 6천명에 이르는 규모다. 변호사 가족들까지 참석한다면 1만명이 넘는다. 중국과 가까워 최대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거기서 다뤄질 북한법과 다문화 관련 법령은 우리 특유의 법령이다. 한국 개최를 위해 연설도 많이 했다. 북한 인권백서 같은 것은 IBA에서 공동으로 번역작업을 거쳐 내놓기로 협의까지 마쳤다. 각국의 변호사 대표를 만나 외교도 했다. IBA를 유치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행이사를 2년마다 선출한다. 그동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선출돼 온 집행이사에 IBA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선출되기도 했다.”



-이번 4.29 재보궐선거에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한다는 설도 있었다.

“나에 대해 좋게 평가했던 젊은 변호사들이 나름대로 내가 출마할 것이라고 판단해 밀어붙쳤던 모양이다. 후보 등록일을 하루 남기고 몇명이 선거운동을 도와주겠다며 서류에 선거비용까지 마련해서 찾아왔다. 출마하라는 SNS글도 많았고, 연명부까지 만들어 가져왔다. 심지어 먼저 등록한 후보 4명도 내가 후보로 등록할지 주목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지인을 통해 전해들었다. 성의를 봐서 즉답은 못했다. 도저히 못하겠더라. 변협회장 임기 말에 출마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나 스스로가 어떠한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모두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1년 전 세월호 참사 이후 변협에서 했던 활동이 적잖은데.

“세월호 참사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 와중에 미국변호사협회에 9·11사태 당시 내용에 대한 법적 조력 내용을 자문을 구해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책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었다. 일본 변호사협회에서도 동북지진 때 법률자문 등 의무적으로 활동했던 내용의 자료를 입수하고 여·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교수 등을 초빙해 국회도서관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렇게 만든 초안을 기초로해서 법안을 만들었다.”



-순조롭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활동을 시작했나.

“헌신 자체였다. 세월호 사고 초기 당시 보도 내용과 현실이 다르다보니 언론은 물론 정부에 대한 신빙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상한 단체까지 피해자 가족들 사이에 숨어들면서 갈팡질팡했고 특별법 제정 때까지 법률적으로 돕겠다고 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법률자문단을 꾸리고 500여명의 변호사들이 자원봉사에 나서자 그제서야 믿더라. 변호사들이 안산 현장에서 매일 심리·법률 상담을 해주고 진도 팽목항에서 인양되는 시신 확인과 언론보도와 정부발표에 대응해주는 등 변호사 몇 명은 본업도 팽개친 채 희생했다.”



-특별법 제정 이후 활동은?

“법 제정 후에는 거리를 뒀다. 조사위원회는 구성되고도 현재까지 지지부진하다. 팽목항과 안산, 광주재판 과정 등을 백서로 꾸며 3천부 정도 배포할 예정이다. 보도는 아직 안됐지만 ‘역사의 기록으로는 남겨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동안 봉사를 해왔던 변호사들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당시 경기도지사에게도 변호사들이 법률봉사하고 있는데 와서 기념사진만 찍지 말고 차비나 주차비 등 경기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재정지원을 해달라고 건의했었다. 세월호 사고 동안 안산에서 피해자 가족들과 고락을 함께 살다시피한 변호사들도 꽤 많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더 이상 법률조력 활동을 못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고생한 변호사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돕는데 회비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한번의 도전이 성공한 사례가 만들어진 만큼 경기중앙회를 비롯한 다른 지방회 보통변호사들도 변협회장에 도전할 수 있도록 고문 역할이 적절하다. 경기중앙회에서도 후배 변호사들이 역량 발휘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역할도 필요할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보통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독자 여러분을 비롯한 도민 여러분들께서도 법률문제가 생기면 도내 변호사들을 거리낌없이 찾아주길 바란다.”

―위철환 회장은?

▶1958년 전남 장흥 출생 ▶1977년 중동고 졸업 ▶1979년 서울교대 졸업 ▶1984년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1986년 사법시험 합격(28회) ▶1989년 동수원종합법무법인 변호사 ▶2009년 수원지방변호사회 회장 ▶2009년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2010년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 회장 ▶2011년 언론중재위원회 감사 ▶2012년 수원FC 이사장(현) ▶2013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대담= 엄득호 사회부장

정리= 이주철기자

사진= 이정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