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박근혜 '외줄타기' 외교 리더십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9.09 00:05 / 수정 2014.09.09 00:05중일 정상회담설 '솔솔' … 중국에만 기대고 갈 건가
경직된 대통령, 몸 사리는 참모들이 외교위기 부를 수도…안보·역사 현안과 분리된 환경·경제 관련 한일 정상회담의 필요성도 제기
요즘 일본 외교가에서는 한국과 관련해 이런 말이 농반진반으로 회자된다. “이제 한국 주재 일본대사관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일본대사관의 정치부는 어차피 한국 정부가 만나 주지도 않을 거고. 영사부는 이미 대사관에서 떨어져 나가 있고, 경제부는 제트로(JETRO·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지사에서 업무를 보면 된다. 일본대사관이 굳이 한국에 있을 필요가 없다. 정치부는 차라리 도쿄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나?”
경색된 한일 관계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현 정부 출범 후 실제로 윤병세 외교장관은 주한 일본대사를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물론 아베 일본 총리와 단둘이서 눈을 맞추고 말을 나눈 일이 없다. 한일 최고위층 대화 통로가 꽉 막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실무선에서 소통과 협력이 이뤄지더라도 실질적인 진전을 보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일본 신문 <산케이>가 국내 언론 보도와 증권사 소식 등을 토대로 박근혜 대통령 사생활 의혹을 제기하면서 한일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주일 한국대사를 지낸 권철현 세종재단 이사장은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외면한다고 해서 외교장관까지 덩달아 일본과 말문을 트지 않고 경직된 자세를 보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장관은 대통령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국익에 따라 능굴능신(能屈能伸: 능히 굽힐 줄 알고 펼 줄 아는 능력)해야 한다.”
이처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는 우려를 자아내고도 남는다. 최근 <중앙일보>는 국내외 전문가 30명에게 ‘박근혜 정부가 외교적으로 가장 미숙하게 처리한 사안’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3분의 2를 웃도는 21명이 ‘한일 관계 관리’를 꼽았다.
그래서 한국 외교의 위기가 일본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관측도 뒤따랐다. 전문가들은 지난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 중재로 한중일 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에 냉랭한 반응을 보인 점이 한국 외교의 아쉬운 대목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박 대통령은 올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1천 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면서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7월 박 대통령이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특별오찬을 한 직후 “두 정상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추진에 우려를 표했다”고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발표한 것도 너무 앞서나갔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중 정상이 한미일 3각 협력의 한 축인 일본을 협공하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중국이 선택했으니 이젠 한국이 답할 차례”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지지하는 동맹국 미국과 다른 소리를 낸 것도 적절치 못한 조치였다는 의견도 있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주 수석의 발표는)안보전략과 국익의 관점에서 심사숙고한 결과라기보다는 의도되지 않은 실수가 아닌가 싶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과 중국은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는 사이다 .경쟁도 하지만 상호 의존도가 높다. 아시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과 이를 봉쇄하려는 미국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동중국해 등 국제무대에서 사사건건 부딪친다.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채택한 미국과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뤄낸다)’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중국 간의 경쟁이 점차 심화된 결과다. 그럼에도 올 상반기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 합동군사훈련 ‘림팩(RIMPAC)’에 중국이 참여했다. 중국은 자국 장교들이 미국 항공모함에 승선해 항모 운용기술을 익히게 해달라고 미국측에 요청했다. 경제 분야의 양국 협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미중의 이중적 관계 속에서 한국은 줄타기를 잘할수록 몸값은 치솟게 마련이다. 한중 지도부 교체 후 이뤄진 정상회담이 다섯 차례다. 가장 최근인 올 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은 북핵을 겨냥해 처음으로 ‘확고한 반대’ 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성숙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구축을 제안했다.
미국에서도 박 대통령의 대(對)중국 외교를 좋게 평가하는 분위기다. 앨런 롬버그 미 스팀슨센터 동아시아프로그램 국장은 “박 대통령이 한미동맹과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잘 이끌고자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관전평을 냈다. 그는 공공연하게 일본을 반대하는 시 주석의 시도에 박 대통령이 넘어가지 않았기에 (한중 관계 개선으로 한미간에) 특별한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명백한 우려를 갖고 있지만 시 주석의 일본 비판에 동조하지 않았다”면서 “미국의 관점에서도 큰 장애물은 없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한중 관계 개선이 한미 동맹을 훼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중국 역시 한중 관계 발전을 적극 반긴다. 왕이웨이 중국 런민대 교수는 한국이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동시에 강화하는 일이 서로 모순은 아니라는 진단을 내렸다. 런민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이기도 한 왕 교수는 “한국이 경제와 안보 두 가지 측면에서 파트너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나아가 “중국은 미국, 러시아도 참여하는 가운데 한국과 핵안전을 보장하는 우호협력 조약을 맺을 필요가 있다”며 한 차원 진전된 협력 방안까지 제시했다.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보면 냉엄한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5월 시 주석의 방한 일정과 북핵문제 등을 논의하고자 방한했을 때다. 왕 부장은 “새로운 지역 및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에 따라 우리는 한국을 더욱 긴밀한 협력동반자로 선택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한 외교관은 사견임을 전제로 “‘한국을 선택하겠다’는 왕이 부장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면서 “우리가 당신네를 선택한 만큼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하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젠가는 결정해야 한다는 최후통첩 같은 기분을 갖게 하는 발언”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중국 없는 경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미국 없는 안보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면서 “우리 정부도 양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한국을 갈등 속으로 밀어 넣을 소재는 또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한국이 참여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에게 “건설·기술·자금·경험 등 인프라 관련 분야에서 우위가 있는 한국이 AIIB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기를 희망한다”고 요청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는 미국 주도의 ADB(아시아개발은행)의 대항마격이다. 중국과의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AIIB 가입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군사안보 동맹국인 미국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권철현 세종재단 이사장은 “지금 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해주길 바라는 입장”이라고 풀이했다.
이는 거꾸로 한국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갈등과 대립 국면에 있는 미국·중국은 한국을 향해 각기 러브콜을 보낸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말이다. 이들 강대국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강요하기보다는 한국에 대책과 방향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라는 게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의 시각이다. 미중 관계가 지금 같은 경쟁 구도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 구도로 전환한다면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 외교적 입지는 또다시 오그라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애써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실익이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외교 전문가들, 11월 중일 정상회담 전망
이는 중일 관계, 북일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국과 일본이 적대적일수록 한국을 끌어안아 상대방을 왜소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증가한다. 북한과 일본 사이가 벌어지면 한국의 발언권은 커진다. 중국과 북한을 상대로 하는 일본의 외교적 포석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먼저 중국과 일본의 연내 정상회담설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오는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싶다는 입장을 누차 밝혔다. 일본의 전·현직 관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국으로 달려간다. 특히 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가 7월 말 중국을 방문, 시진핑 주석과 극비리에 회담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논의가 급진전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이와 관련해 한국 외교부는 오는 11월 APEC 회의에서의 중일 양국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는 않는 듯하다. 시 주석이 ‘한중 역사 동맹’을 강조하는 상황이고,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일본 때리기도 계속되는 마당이다. 양국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라 할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영유권 문제에서도 일본은 양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들었다. 시 주석이 후쿠다 전 일본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관계 개선을 언급한 것도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쯤으로 해석했다. 설령 양국 정상이 만나더라도 정식회담이라기보다는 그저 간단히 만나는 조우 정도에 그치리라는 게 외교부 당국자의 전망이다.
하지만 <월간중앙>이 접촉한 주요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생각이 좀 달랐다. 오는 11월 APEC에서 중일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외전략기획관을 지낸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가시권에 있는 가능성이라면 가을 베이징 다자회의를 계기로 중일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앨런 롬버그 국장은 “올해 안에 열릴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두 나라 관계가 다소 경직돼 있지만 서로 긴장을 줄이고 경제·정치, 심지어 군사면에서 함께 발전을 도모하는 게 이롭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런민대 왕이웨이 교수는 “일본이 위안부 이슈를 포함해 역사 문제에 책임 있는 자제를 취한다”는 전제를 달아 “11월 APEC에서 중일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일본 외교 공세에 대응카드 있나?
중일 정상회담이 어떤 경로와 외양으로 전개될 지는 속단키 어렵다. 게다가 역사·영토 문제 등 핵심적 이익이 달린 현안이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롬버그 국장은 “중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정상회담 자체가 중국이 일본을 소외시킬 의사가 없다는 시그널을 발산하게 되므로 중일 관계가 새 국면으로 접어드는 데 도움이 된다(롬버그 국장)는 시각이고 보면 한국에 중일 회담은 아주 민감한 변수가 된다.
더군다나 일본은 최근 북일 관계 개선에도 공을 들인다. 지난 5월 북한은 일본인 납북자를 재조사하고, 일본은 북한에 대한 독자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스톡홀름 합의가 성사됐다. 전격적인 아베의 평양 방문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국교정상화에 따른 200억 달러 지원설 등도 흘러나왔다. 일본은 지난 7월 시 주석의 한국 방문으로 심한 고립감을 맛 본 북한에 가까이 가는 호기를 맞고 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개선될 수는 있겠지만 수교를 운운할 단계는 절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북핵,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일 수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납북자를 돌려보내거나 유골을 반환함으로써 상당 수준의 경제적 지원은 인도적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오히려 한국 정부에 이렇게 묻는다. 만약 중일,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고립을 탈피할 대응카드는 뭐냐고? ‘Punch above your weight.’ ‘능력 이상의 활동을 하다’는 뜻으로 권투에서 경량급 선수가 중량급 선수에게나 가당할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를 외교가에서 비유하는 말이다. 자기 체급을 넘어서는 힘을 쓰다가는 제 풀에 지치기도 한다. 결국은 이기는 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내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의 대(對)일본 외교가 그런 식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한국이 일본의 제안을 냉정하게 뿌리친다고 해서 일본이 한국에 쩔쩔 매거나 매달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얄밉게 군다. 북한과의 대화를 의식적으로 노출하고, 중국과도 정상회담을 서두르는 모양새를 취한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대화하는 시기를 놓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정상회담은 성사여부도 중요하지만 언제 하느냐, 그 타이밍에 따라 국익이 달라진다. 외교 전문가들은 “양자 정상회담은 누가 얼마나 유리한 여건에서 하느냐의 게임”이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아쉽고 내가 아쉬울 게 없는 시점이 제일 이롭다. 예컨대 일본이 북한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관계에 돌입하거나, 중일 정상회담이 기정사실화하는 시점에서의 이뤄지는 한일 정상회담이라면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북한·중국과 어깨동무하는 마당에 일본이 한국에 친구하자고 나설 욕구는 반감된다.
반대로 중일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북일 수교교섭도 지지부진해 일본이 동북아에서 외톨이가 될 때 손을 내미는 게 한국으로선 이익이다. 어차피 할 정상회담이라면 한국이 베풀고 생색내는 식으로 추진하는 게 우위를 접하는 지름길이라고 일본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외교 테크닉에서 한국 정부가 한참 뒤진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국제사회에 한국이 무례하다는 인식을 교묘히 심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반응도 나온다. 독도를 전격 방문하고, 일왕의 사과를 요구(이명박 전 대통령)하는 데다 회담장에서 자국 총리를 애써 외면하는 한국 대통령(박 대통령)이 문제의 진원지라는 인식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국내의 한 원로급 인사는 “아베 총리는 자국민에게 자신이 피해자로 보이는 상황을 연출하려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일본의 역사는 대의명분 앞에 몸을 불사른 이들을 살아남은 이들이 위로하고 기리는 걸 의무이자 미덕으로 여긴다. A급 전범을 찬양하는 이들이 늘어는 것도 이런 정서적 배경에서다. 일본인의 세계관을 설명할 때 나오는 예가 ‘마케이누(負け犬)’다. ‘싸움에 진 개’로 패자라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마케이누에 대한 관심이 어느 나라보다 깊고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받든다. 국제무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들이미는 아베 총리의 행보는 이런 일본의 집단의식과 결부돼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측 소식통은 지난 20년간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일본인의 시선이 많이 싸늘해졌다고 전했다. 물론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뒷걸음질했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서가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은 1990년대까지 역사에 진 부채의식 때문에 고노·무라야마 담화 등 나름의 노력과 성의를 한국에 보였다고 여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은 이런 노력은 평가해주지 않고 일본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며 몰아붙이기에 급급하다고 여기는 일본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분석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한국의 소식이 속속 일본어로 전해진다. 리얼타임으로 한국 뉴스를 접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해줘야하는가’라는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전제조건
양국 국민 사이의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한국일보>와 <요미우리>가 올 5월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83%, 일본인의 73%가 ‘상대를 믿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한국을 신뢰한다고 답한 일본인 비율은 1년 사이 32%에서 18%로 14%포인트나 줄어들었다.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간사장인 강창일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현재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인 것 같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에는 양국 간 긴장과 갈등이 주로 외교 당국자 사이에 조성됐다면 이제는 일반 국민에게까지 번지고 있다고 그는 우려를 나타냈다. 강 의원은 외교·안보·역사 같은 현안과 분리해 환경·경제·보건과 같은 분야에 국한되는 원포인트 정상회담이라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일본의 거침없는 우경화 행보에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요즘 유화책을 꺼냈다가는 여론의 역풍을 자초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적 현안에서는 국민과 감정적으로 일체감을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지는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강창일 의원은 “박 대통령이 국민적 감정을 의식해 경직된 대응으로 일관하는 것 같다”고 비판적 의견을 내놓았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사안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접근하는 외교 접근 방식을 꼽았다. 그는 “양국 현안 중에는 서로 협의해 풀 수 있는 것이 있고, 구조적으로 단기간 내에 풀기 힘든 것이 있다”고 전제한 뒤, “양국 정부와 지도자들은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먼저 변화하라고 촉구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앨런 롬버그 국장은 한일 양국이 서로에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먼저 일본의 경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역사적 기억의 배(Historical memory boat)’를 흔드는 일은 없어야한다며 정색을 했다. 예컨데 총리 임기 중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런 행보는 일본의 국익에도 역행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방법론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들의 우려를 씻어주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역내 국가들에 집단권 자위권 행사 범위에 어떤 행동이 포함되고, 포함되지 않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당위성을 주변 국가는 물론 자국민에게조차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좀 더 개방적이고 더 구체적인 논리를 전파하는 게 좋다.”
하지만 왕이웨이 런민대 교수는 앨런 롬버그 국장과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관계 설정을 핵심 변수로 지목했다. 왕 교수는 “미국은 아시아 헤게모니 일부를 일본에 위임해나가는 중”이라고 진단하면서 “일본은 이를 정상국가화의 전략적 기회로 삼고 있다”고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을 읽었다. 일본이 목표로 삼는 정상국가는 궁극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분리돼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나라라고 왕 교수는 단언했다. 이는 한국에도 중대한 문제라는 게 왕 교수의 결론이다.
지속가능한 해법 제시 못하는 청와대
일본측 소식통도 일본 정부의 궁극적 지향점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폈다. 이 소식통은 “아베 총리의 언행은 다분히 미국을 의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A급 전범은 국내법으로는 죄인이 아니다’ 등과 같은 아베 총리의 발언이 그런 경우다. “아베 총리는 패전국으로서의 굴욕감, 자학적 역사관을 청산하고 싶어한다 .미국의 추종자가 아니라 동맹국으로서 대등한 파트너십을 갖고자 하는 심리다.” 외교 전문가들이 한국 정부에 쏟아낸 비판적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한국의 태도도 문제라고 앨런 롬버그 국장은 말했다. 그는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수용하는 것까지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용인한다면 일본으로 하여금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완벽하게 투명해지도록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는 게 앨런 국장의 논리다.
한국이 처한 외교적 현실에 대해 정부가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김태효 교수는 한국정부가 G2(미국, 중국) 외교를 ‘두 마리 토끼를 쫓는다’거나 ‘딜레마적 상황’으로 보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외교안보 분야 한미동맹으로 북한위협을 억제하고 통일추진의 주축으로 삼으면서, 중국과 경제적 상호의존을 심화하고 전략적 공감대를 확대하는 전략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한국 외교 당국자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나머지 대통령 따라 하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은 뼈아프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외교와 대북정책에서 외교부와 통일부는 없고 청와대만 보이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지나치게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며 현안 위주의 수동적 대응을 한다”고 질타했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기에 원칙적인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그래도 외교부는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데 그런 소임을 꺼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외교 채널이라 할 장관이나 실무자들이 덩달아 흥분하는 볼썽사나운 장면도 연출된다.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대일 관계의 돌출 현안이던 <산케이>의 박 대통령 사생활 보도와 관련한 조치에서 청와대부터 외교부까지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면서 “일본 기자의 출국금지 조치나 아세안안보포럼(ARF)에서 윤병세 장관이 일본 외상에게 유감을 표한 행위 등은 충분히 검토되고 지속가능한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나카소네의 여유, 사려가 사라진 일본
역대 정부에서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한 한 인사는 참모들이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 인사는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 관련 당국자들이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직언을 하지 않는다”면서 “종국엔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처신”이라고 분개했다. “국민정서와 국익이 충돌할 경우 비난을 무릅쓰고 여론을 설득해야 하는데도 요즘 청와대와 정부 관료들은 그 책무 앞에서 움츠리고 본다.”
윤희웅 민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은 이와 관련해 “전문가는 국익적·장기적 관점에서 외교에 접근한다면 일반인은 경험과 감정적 측면에서 외교를 바라본다”고 풀이했다.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은 한일 간에 꼬여 있는 역사·영토 현안에 기초해 형성되기에 일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뿐더러 관계 개선에도 전문가보다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그럴 수록 정부 당국이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펴야 하는데 그걸 방기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 정부 또한 과연 한국 정부의 외교 기조를 얼마나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외 전략은 집권 전 박 대통령이 <포린어페어즈> 기고문에서 강조한 ‘신뢰외교(Trustpolitik)’란 단어에 응축돼 있다. 윤병세 외교장관도 당시 참모로 ‘신뢰외교’ 구상을 가다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 교감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자 했다면 이 점에 더 치중했어야 했다.
아베 총리는 올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박 대통령의 연설장에 사전협의도 없이 불쑥 나타나 연설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과 화해하려는 의도라고 일본측은 설명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국의 많은 전문가는 아베 총리가 내민 손이 과연 박 대통령을 향했는가에 대해서조차 회의적이다. 지난해부터 계속돼온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왜곡된 역사인식 발언 및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이은 총리의 연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아베 총리의 몇몇 행동은 ‘아니면 말고 식의 깜짝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한국이 받는 느낌이다. “아베 총리의 돌출 행보는 미국 오마바 대통령, 나아가 국제사회, 또 일본 내부의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제스쳐로 해석된다”고 취재과정에서 만난 여러 전문가들이 말했다.
진정한 우정과 신뢰의 예는 아베 총리의 대(大) 선배격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올해로 96세에 접어든 나카소네 전 일본총리는 2010년 펴낸 <보수의 유언(保守 遺言)>이란 책에서 일본 보수주의가 가야 할 길에 관한 소회를 기록했다. 이 책의 제3장 ‘다극화 시대의 동아시아를 생각하다’에서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이 자주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전제로 “서로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로서 존중하려는 자세가 없어서는 무엇 하나도 진전되지 않는다. 외교 수뇌부들이 만나는 과정에서도 우정의 싹이 트인다”는 점을 들었다.
아베 총리의 다보스포럼 행보는 나카소네의 가르침과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는 총리시절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후야오방 전 중국 총서기와의 인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지한 일화도 함께 소개했다.
“내가 총리였던 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중국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 중국 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기도로 축출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해 나는 다음해부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다. (…) 후야오방은 일중 우호관계에서 중요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지만 주변 여건을 고려해 완급을 조절할 줄 알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후야오방 가문은 중국과 일본의 비공식 가교 역할(43쪽 참조)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보여준 여유 있고, 사려 깊은 풍모를 일본 정부의 수뇌부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지 오래다.
내년은 한일 수교 50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외교부 당국자에 따르면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느냐에 따라 한일 관계의 진로가 결정된다. 전자에 방점이 찍히면 한일 관계에 긍정적 흐름이 조성된다. 후자에 치우치면 대립과 반목의 기류가 더 강하게 흐를 것이다. 양국은 이미 한 번 경험을 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2010년 한국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새로운 100년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정립하는 게 이명박 정부의 스탠스였다.
하지만 과거 100년, 또 현재의 역사, 영토 논쟁이 격화되면서 양국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도 “우리 정부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며 당시를 아쉬워했다. 이처럼 중대한 계기를 맞아 한일 양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정부 차원의 다양한 시도와 모색이 있겠지만 유럽처럼 보다 큰 틀에서의 공동체 행사를 치러 보는 것은 어떨까?
“내년 8월 15일을 VIP Day로”
유럽은 내년 5월 8일을 ‘유럽 전승 기념일(VE Day.Victory in Europe Day)’이라 해서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벌인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날 영국, 미국, 캐나다, 러시아 등 유럽과 북미 각국에서 국가적 이벤트를 통해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되새긴다. 유럽 국가들은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한다. 각기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한데 모여 뜻을 기리기도 한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올 7월 박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에서 내년도 ‘항일전쟁·광복 70주년’을 공동기념하자고 제안했다. 왕이웨이 런민대 교수는 “중국과 한국이 상호 존중과 평등, 조화의 원칙 하에 힘을 모아 새 질서를 만들 때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에 군림하는 태도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대(對)일본 공동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주일 한국대사를 지낸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는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을 꾀한다. 매년 8월 15일을 가칭 ‘태평양 전승 기념일(VIP Day. The Day of Victory in the Pacific)’로 제정, 관련 국가들이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군국주의 파시즘이 종말을 고한 날이다. 이를 기려 당시 전쟁에 관여한 남북한,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 참가하는 VIP Day 행사를 공동 개최하자는 구상이다.
라 교수는 “8월 15일은 남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 국민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라며 “VIP Day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동북아 국가와 국민들간의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본적으로 각국의 국민이 중심이 되는 행사지만 정부도 참여하는, 진정한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게 라 교수의 설명이다.
또 내년에는 이른바 ‘아베 담화’가 발표되리라는 전망이다. 지금까지 아베 총리의 행보에 비춰볼 때 침략전쟁 등에 대한 해석도 새로이 모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라 교수의 제안대로 모두가 함께 하는 종전 기념의 해가 될지, 아니면 무슨 ‘담화’ 등 각기 마이웨이를 외치는 해가 될지는 앞으로 1년 안에 결판이 나게 된다. 그러자면 일단 만나는 게 모든 일의 출발이다.
취재지원=윤재원 인턴기자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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