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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HISTORY Who 그는 누구인가]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인‘

[LIFE HISTORY Who 그는 누구인가]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인
새정치·개혁의 아이콘’ 경기도 미래 짊어지다
김재민 기자  |  jm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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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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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필 당선인이 독도사랑회가 주최한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다문화가정 및 새터민 가정 어린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6•4 지방선거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를 누르고 경기지사에 당선된 새누리당 남경필 후보(49)는 수원병에서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중진(重鎭) 정치인이다.

지난 2006년 경기지사에 도전하려다가 김문수 현 지사에게 후보자리를 양보, 사실상 재수 끝에 1천250만 도민의 삶을 책임지는 도백의 꿈을 이뤘다. 당초 원내대표를 준비하다 당 지도부의 ‘중진차출론’에 힘입어 도지사 출마로 급선회, 준비기간이 짧았지만 신선한 공약 제시와 5선의 정치력을 발휘해 야당의 거센 공세를 막아냈다.

   
유년시절 남경필 당선자(가운데)는 삼형제의 맏이로서 두 동생을 일일이 챙기는 자상한 형이었다.

■ ‘따복마을’에 유년시절 추억도 반영
남 당선자는 수원에서 평화로운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가 내세운 대표 공약 중 ‘따복마을’(따뜻하고 복된 공동체)은 그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일부 반영됐다고 한다. 그는 저서 ‘시작된 미래’에서 “수원에서 시골 소년으로 자라던 시절, 그야말로 미역 감고 가재 잡던 그 시절에 제 꿈은 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다”며 평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음을 시사했다. 경복고를 거쳐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들어간 그는 나중에 가수가 된 안치환을 친구로 만났다. 그는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던 저와는 달리 치환이는 훨씬 생각이 깊었다”면서 “그는 속속들이 민중의 아픔을 느끼는데 비해 유복하게만 자란 저는 그렇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대학 졸업후 1990년 신문사에 입사해 3년간 기자생활을 한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 뉴헤이븐의 예일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 맨해튼에 있는 뉴욕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유학을 떠난 계기에 대해 “경영전략이나 시스템을 바꿔서 전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거시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어서 였다”고 설명했다. 예일대 시절 한인학생회장을 했는데 한인학생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경험은 두고두고 자산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학창시절 남 당선인(왼쪽)은 다른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즐기는 개구쟁이였다.

■ 새정치·개혁 아이콘으로 부각 
남 당선자는 부인인 이지 여사(49)와 군 복무 중인 2남을 두고 있다. 선친은 고 남평우 국회의원(14·15대)이다. 남 당선자는 지난 1998년 미국 유학 중에 선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7·21 수원 팔달 보궐선거가 치뤄지자 33세 나이에 출마,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당초 어려울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그는 인터뷰에서 “정치에 실망한 많은 지역 주민들이 투표에 불참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새로운 변화와 깨끗한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뜻을 받들어 희망찬 21세기를 열어가는 데 앞장서는 새 정치인이 되겠다”고 당찬 소감을 밝혀 이목을 끌었다. 

그는 2000년 16대에 재선에 성공했으나 정병국 의원(4선·여주 양평 가평)과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 등 당시 초선들과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결성, 공동대표를 맡았다. 개혁의 아이콘인 ‘남·원·정’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 모임에는 또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부겸·김영춘 전 의원 등도 참여, 한나라당의 쇄신과 개혁의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미래연대 공동대표이던 때 이회창 총재 비서실 부실장으로 임명돼 짧은 주류생활을 했다.

   
수원에서 자란 남 당선인은 어린 시절 하루에 한 번씩 마을 냇가에서 멱을 감았다고 회상했다.
그를 대변인으로 발탁한 것은 2002년 대선을 1년 정도 앞둔 시점에 젊고 진보적인 방향을 지향하겠다는 당의 대외적인 의사표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비서실 부실장으로 있으면서 이 총재가 일산의 한 기원에 맥주를 사들고 가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등 권위주의에서 탈피, 서민과 호흡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2002년 이회창 후보가 다시 대선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통감해 대변인직을 사퇴했으며 주류 무대에서 퇴장해 이후 비주류 소장개혁파의 선봉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저서 ‘시작된 미래’에서 “제가 믿었던 것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 제가 시대정신이라 믿었던 것이 국민이 원하는 시대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회고했다. 2002년 대선패배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로 탈바꿈했는데 당시 소장개혁파(쇄신파)들은 박 대표와 의기 투합, 천막당사를 주도했다. 

■ 공부모임 주도와 국회 외통위원장
2004년 17대, 3선에 성공한 뒤에도 그는 중진이라고 뒤로 물러나지 않고 공부모임인 국회 새정치수요모임를 만들었다. 19대에는 ‘경제민주화실천모임’과 ‘국가모델연구모임’을 잇따라 결성,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이슈를 주도하거나 대한민국 미래의 모델 구상에 전력하는 등 끊임없이 공부하는 의원의 모습을 보였다.

국회 외통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민주적 절차와 소통으로 한·미FTA를 통과시켜 주목을 받았다. 통과 과정에서 1천500분이 넘는 토론을 지켜내며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 폭력사태를 막아내는 중심에 섰다. 또한 황우여 전 대표(5선·인천 연수) 등과 힘을 합해 국회 선진화법 제정 등을 통과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 당내 선거 연이은 패배… ‘국민속으로’
남 당선자는 2008년 이명박 정권 초창기, 이상득 전 부의장의 총선출마 반대를 주장하고 나서 주류에 미운털이 박힌 적 있다. 그는 그해 3월, 혼자 포항으로 가서 이 전 부의장의 불출마를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혼자 기자회견을 했고 이후 여러 의원들의 동조로 이른바 ‘55인의 반란’이라는 기자회견이 이뤄졌다. 공교롭게도 이후 정권으로부터 가족이 불법 사찰을 받는 고통을 당했다.

그는 당내 선거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하는 설움을 받기도 했다. 2007년 7월 전당대회 소장개혁파 의원 연대인 ‘미래모임’의 당 대표 경선 단일 후보에 당시 재선의 권영세 의원에게 패배했으며, 2010년 7월 전당대회에서 쇄신파 정두언 의원과의 단일화에서 패배한 바 있다. 최근에는 5선이 된 19대 국회에서 원내대표 출마했으나 1차 투표 1등 후 결선에서 6표 차이로 아쉽게 석패했었다.

   
남 당선인은 대학졸업식에서 어머니께 학사모를 씌워 드린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남 당선자는 새누리당 후보 경선을 앞둔 지난 4월 세월호 비극이 발생하자 경선을 중단하고 상대인 정병국 의원과 함께 바로 진도로 내려가 12일 동안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국민속으로’의 모습을 보인 바 았다.

그는 “이제 새로운 경기지사 당선자로서 정치인으로 가졌던 소신과 가치를, 경제민주화와 국가모델연구를 통해 얻었던 정책적 아이디어들을 ‘도민속으로’ 가져가 도민과 함께 실천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김재민기자 jmkim@kyeonggi.com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졸업
-美 예일대학교 경영학 석사 졸업

경력 
△ 5선 국회의원 (15·16·17·18·19대)
△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 대표 
△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실천모임 대표
△ 한국인터넷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 (KIDEA) 협회장
△ 한·중 국제e스포츠대회(IEF)조직위원회 위원장
△ 대한장애인아이스하키 협회 회장
△ 민선4기 경기도지사직 인수위원장
△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
△ 한나라당 최고위원
△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재선)
△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
△ 한나라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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