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정치 사회의 칸 ==../⋁❿2022 지방선거(가나다 順-경기, 수원 등

묻지마 어젠다? 이상한 지방선거

 

묻지마 어젠다? 이상한 지방선거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 선거법 개정안 협상 난항, 새누리당 중진 차출론 등 ‘인물 이벤트’ 기승, 새정치연합 출현 등 겹쳐 정책이슈 실종 우려

6·4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지만 어젠다가 보이지 않는다. 복지 문제 등 주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생활 이슈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정원 대선개입이나 정권 심판론 같은 정치적 이슈가 유권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같지도 않다.

어젠다 실종은 공론화의 장이라는 지방선거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벌써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지방선거가 역대 최악의 정책선거가 될 것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어젠다가 형성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우선 지방선거 일정이 예년보다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 폐지 문제를 놓고 격렬히 대립하면서 아직까지 게임의 룰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오른쪽)가 2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후보공천 등 선거일정 자동으로 지연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철회했고, 민주당 등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라고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이 같은 여야 간의 선거법 협상은 예년보다 1개월 늦은 것이다. 과거에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개정안 협상이 늦어도 1월까지는 마무리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당공천 문제로 선거법 개정 시한인 2월 말까지 끌고 온 것이다. 선거법 개정안의 협상 지연으로 여야 모두 공직후보자 공천 기준 작성, 공천심사위 가동, 최종 공천장 수여 등 지방선거 일정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게임의 룰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다른 정책적 이슈가 주목받기 쉽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 ‘인물 이벤트’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어젠다가 사라진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새누리당의 ‘중진 차출론’이 대표적이다. 새누리당은 지방선거 후보자로 당의 중진들을 계속 거명하며 국민의 시선을 붙잡아두고 있다. 인물론으로 갈 경우 야권에 비해 인재풀이 풍부한 새누리당이 절대 유리하다.

박원순 시장의 대세론으로 고전이 예상되는 서울에서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총리의 경선 이벤트를 띄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경기도에서는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남경필 의원에게 경기지사 출마를 설득하고 있다. 인천에서도 황우여 대표의 차출론에 이어 최근에는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을 띄우고 있다. 새누리당은 최근 당 부설 여의도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 장관이 황 대표를 제치고 여권 후보 중에 1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지방선거 주무부처인 유 장관까지 여론몰이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왼쪽)와 새정치연합 안철수 중앙운영위원장이 2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촉구 정치권, 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에서 ‘정당공천 폐지’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여당 경선 쇼에 정책경쟁 사라질 판

제주도에 원희룡 전 의원을 출마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에 입당한 우근민 제주지사로는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며 “제주 출신이면서 개혁 성향을 갖고 있는 원희룡 전 의원이 선거에 출마한다면 선거판도를 단번에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새누리당의 성동격서식 선거전략이 먹혀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새누리당에서 중진 차출론을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써 새누리당 후보들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며 “새누리당의 중진 차출론과 뒤를 이은 경선 이벤트로 어젠다가 발붙일 여지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안철수 의원이 만드는 신당인 새정치연합의 출현도 정책선거가 실종되는 계기로 작용되고 있다. 언론이 제3당의 출현과 인물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젠다는 ‘가을부채’ 신세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새정치연합은 당장 창당작업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지난 2월 17일에야 창당발기인대회를 연 새정치연합은 지방선거 때까지 창당과 출마자 공천 일정이 꽤 촉박하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많지 않다. 새정치연합이 속도를 내서 지방선거 후보등록일인 5월 15∼16일까지 후보자를 결정한다 해도 끝이 아니다. 그 후에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강도 건너야 한다. 야당들 사이에 단일화를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를 갖고 밀고당기기를 할 게 뻔하다. 이럴 경우 어젠다 선거는 더욱 더 기대하기 힘들다.

‘안철수 신당’의 출현으로 여야 간에 전선이 하나의 단일 전선에서 지역에 따라 다각화될 수 있다는 것도 어젠다 선거에는 마이너스다. 수도권에서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영남에서는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이,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대립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이번 선거는 안철수 신당의 출현으로 전국적으로 동질화되는 이슈가 없고 지역마다 이슈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며 “특히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대대적으로 대결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치권에서 꺼지고 있는 어젠다 선거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다.

“복지 등 이슈화하고 공약파기 심판해야”

전문가들은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했던 기초연금 지급 축소, 경제민주화의 대폭 후퇴 등 공약 파기 문제에 대해 반드시 현 정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유승찬 소셜미디어컨설턴트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소득 불평등에 따른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경제민주화는 대선 때 공약했던 것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며 “민주당 등 야당은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파기한 공약을 집중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지방공약 파기 문제도 선거 쟁점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박 대통령의 중앙공약뿐만 아니라 지방공약 이행에 대한 평가도 해야 한다”며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은 지방공약으로 토목사업 등 120여개 사업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121개 지방공약을 분석한 결과 절반의 공약이 파기 또는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파기된 공약에는 해수부의 부산 이전 무산 등이 포함돼 있다.

결국 어젠다 실종은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새누리당은 인물·이벤트 선거로 어젠다를 덮고 있고, 민주당은 무능력으로 인해 어젠다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노동, 주거, 노후, 보육 등 민생문제가 심각한 데도 불구하고 여당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며 “그러면 민주당이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슈화시켜야 하는데, 민주당은 그럴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8월 26일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 연합뉴스

<‘집권당의 무덤’ 역대 지방선거 어젠다>

대부분의 역대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선전했다. ‘집권당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정부·여당은 지방선거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정권 중간에 선거가 실시되면서 집권세력에 대한 중간평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책 어젠다가 결합하면서 여당에 대한 심판은 혹독했다.

최근 세 번의 선거를 보면 이런 흐름이 확연히 나타난다. 2010년 지방선거 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 선거였다. 여기에 4대강 사업, 세종시 건설, 무상급식이라는 정책 어젠다가 결합했다. 선거 전에는 천안함 사건이라는 대형 안보 이슈가 터짐으로써 민주당이 고전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국민들은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국고를 들여 4대강 사업 등 토목사업에 매진한 이명박 정부에 패배를 안겼다. 무엇보다 시민단체가 제기한 보편적 무상급식을 야권연대(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가 선거 쟁점화에 성공한 게 지방선거의 향방을 갈랐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무상급식이라는 정책을 고리로 야권이 연대를 한 최초의 선거였다. 결국 한나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등 야권연대가 승리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경우 지방선거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재선에 성공했으나, 무상급식 주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졌다가 시장직을 잃고 말았다.
 

2006년 지방선거는 참여정부의 참패로 끝난 선거였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6개 광역단체장 중 유일하게 전북에서만 승리했다. 나머지는 모두 한나라당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이 가져갔다. 당시 유권자들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불만이 컸다.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한 것이 참여정부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여기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서울 유세 도중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는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한 것도 열린우리당엔 뼈아픈 치명타가 됐다.

2002년 지방선거 역시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심판선거였다. 당시 최대의 쟁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 비리 문제였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진보진영이 최초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었지만 정권 말기로 갈수록 정권 핵심들의 부정·부패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자멸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에 패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