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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10. 팔달문 시장

[수원수원사람들] 10. 팔달문 시장
최영재 기자|cyj@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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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16전자신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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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 왕이 만든 시장. 역사상 유일하게 왕이 만든 시장.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수원 화성’에 있는 그 시장은 바로 팔달문 시장이다.

새로운 조선 건설을 위해 정조대왕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다름아닌 국가의 부(副)다. 그것도 일부 세력의 독점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유통과 무역을 담당할 수 있는 상인층의 형성과 그들을 통한 상설 시장으로 조선의 상업을 주도하는게 바로 정조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 아래 주도면밀하게 탄생한 시전이 바로 팔달문 시장이다.

5일장, 7일장과 격을 달리하는 왕의 시장, 수원천 복원과 함께 다시 주목받는, 수원사람들의 삶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그 팔달문 시장의 역사로 들어가보자.

▲ 휴일을 맞아 수많은 시민들이 전국 최고의 재래시장인 팔달문시장을 돌아보고 있다.


대형 마트들이 곳곳의 상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거대한 흡입력으로 지역경제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놓은 지금, 수원 사람들은 아직도 변함없이 재래시장, 혹은 전통시장이라 불리는 시장을 애정을 갖고 찾아 보듬는다.

그속에 역사가 있다고 믿고, 사람과 사람의 정(情)과 관계가 이어진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곧 애민(愛民)과 부국강병의 근원이자 ‘수원의 자존심’이라 여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재래시장을 갖고 있는 수원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또 하나의 새로움이 있다. 바로 ‘왕이 만든 시장’.

신분계급에 얽매여 나라발전이 정체되어 있다고 여긴 정조대왕은 부국강병의 기본이 상업의 발전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도시 ‘수원 화성’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현실화됐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며 가장 천시했던 상업을 정조는 조선의 발전을 위하는 길로 장려하며 수원에서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 팔달문시장과 지동시장 사이를 흐르는 수원천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와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정조 13년(1789년) 7월 하순, 수원 신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고, 조심태의 제안에 따라 균역청 관하 진휼청의 돈 6만 5천 냥을 풀어 시전(市廛)을 설립했다. 장안문과 팔달문을 연결하는 남북대로에 정조의 명으로 성 내외에 거대한 기와집이 들어서면서 시전이 형성되고, 본격적인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정조대왕의 시전인 ‘팔달문 시장’은 일반 도시의 정기 시장들과는 격이 달랐다. 정조는 남북대로의 시전은 다른 시장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규모와 위엄을 갖추기 위해 처음부터 기와집으로 조성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신도시 육성을 위한 각종 상업진흥정책을 비롯해 전국 팔도의 부호와 부상들을 옮겨 살게 했다. 실제 윤선도의 후손인 해남 윤씨들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사해온 것이 대표적으로 이후 이들은 단순히 조선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이 아니라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거대한 상업체계를 꾸리고 기존의 상업패턴을 바꾸기 위한 노력하였다. ‘양반상인론’과 ‘신해통공 반포’가 대표적인 사례.

늘 조선을 위한 이용후생 방도를 고민하던 정조는 박제가의 ‘양반 상인론’을 토대로 시장을 구축했다.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고 조선의 발전을 꾀하자 주장했던 이용후생 학파의 대명사 ‘북학의(北學議)’의 저자인 실학자 박제가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인 ‘병오소회(丙午所懷)’는 3년후 1789년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인 가난 극복을 위해 박제가는 양반들이 장사와 무역을 하고 중국과의 통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충언을 올렸고, 정조대왕은 이를 적극 수용해 국가의 경제적 안정과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양반들이 상인이 되는 것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 팔달문시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된 안내판들이 주변 곳곳에 설치돼 문화학습의 새로운 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왕이 만든 시장’이자 ‘양반들이 앞다퉈 나라의 발전을 위해 뛰어들어 헌신한 시장’으로 ‘개인의 부보다 나라의 미래를 앞에 놓고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을 창출한 시장’인 팔달문 시장이 전국의 다른 시장들과 격이 다르고, 선비상인 ‘유상(柳商)’이 정조대왕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팔달문 시장에 대한 정조대왕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니 각별 그 이상이었다.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롭게 백성과 나라의 발전을 담금질하는 용광로가 된 ‘팔달문 시장’을 위한 대표적인 정책은 ‘신해통공’ 반포다.

1791년 영의정 채제공의 건의로 시행된 신해통공은 금난전권을 둘러싼 시장개혁이 핵심이다. 바로 서울 시전상인들의 독점상업특권을 혁파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 준 것. 정조는 신도시 화성의 번영을 위해 농업과 함께 상공업 진흥을 과감히 실천했다. 그리고 그 결과 수원의 성내외 시장은 정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했다.

서울과 전국을 잇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수원이 해를 거듭할수록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이 모여들고,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

사통팔달은 곧 수원 유상의 상도가 되었다. 길을 만들고, 사람이 모이고, 물류가 흐르고 문화가 꽃핀다는 도통(道通), 인통(人通), 물통(物通), 문통(文通)의 사통과 능숙한 솜씨로 천지를 익히고 이치를 따져서 이익을 구하되 예의를 갖추어 성의를 다하니 재산을 불리고 존경을 받는다는 숙달(熟達), 통달(通達), 이달(理達), 이달(利達), 예달(禮達), 성달(誠達), 재달(財達), 영달(榮達)의 팔달이다.

이만큼 정의와 멋과 풍류, 이타주의가 한번에 담긴 상도가 어디 있겠는가. 다시 봄이 찾아왔고, 콘크리트 더미에 갇혔던 수원의 핏줄로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버드나무 하천’ 수원천이 다시 팔달문 시장 옆에 복원됐다. 그리고 오는 21일엔 200만 수원권 사람들은 물론 700만 경기남부권 사람들이 함께 했던 희노애락을 다시 기억할 수 있는 수원천 축제가 열린다.

이봄 꼭 한번은 정조대왕과 옛 선조들의 흔적이 배어 있는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 시장과 수원천을 동시에 맛보고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자료제공=수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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