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는 화성을 축성할 당시 수원천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화성이 성곽만이 아니라 수원천에 물이 흐르고 사람들이 통행하는, 그래서 성곽과 도시,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도록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수원천은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을 가로 지른다. 화성의 북수문(화홍문)·남수문·방화수류정과 같은 수려한 건축물과 조화를 이뤄, 수원천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환경문화재다.
정조가 말했던 그 수원천이 돌아왔다. 오염된 하수구에서 맑은 냇물로 돌아왔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더러워지고, 일부 구간이 복개돼 주차장과 도로로 쓰이다가 우여곡절 끝에 생태하천으로 거듭나 수원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수원천은 광교산(582m)에서 발원해 광교저수지를 거쳐 시의 남쪽을 가로질러 황구지천으로 흘러든다. 수원의 도심을 흐르는 대표적인 도시형 하천이다. 길이가 16.0km, 유역면적이 25.37㎢이다. 수원사람들의 생활 속 깊이 자리했던 수원천은 1970~1980년대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자연생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수원시는 1990년부터 더러워진 하천에 콘크리트 덮개를 씌우는 ‘복개(覆蓋)’공사를 진행했다. 교통난을 해소하고 주변 상권을 살린다는 취지하에 1994년 지동교에서 매교까지 780m 구간이 복개됐고, 1995년 3월부터 상류 구간의 2단계 복개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일부 구간 복개로 수질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복개 중지를 위한 시민운동이 전개됐다. 복개구조물에 의해 수원천의 생태축 단절과 하천의 물길이 막히고, 수질오염으로 악취가 발생해 수원천의 자연문화재적 가치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생명·역사·문화의 복원
그 중심에 염태영 수원시장이 있었다. 염 시장은 잘 다니던 삼성을 그만두고, 1994년 수원환경운동센터를 창립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수원천 복개공사 반대운동을 벌였다. 15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수원천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를 만들었고, 사무국장을 맡았다. 1996년 수원화성 축성 200주년의 해, 그는 치열한 쟁논 끝에 복개중단과 복원사업 결정을 이끌어냈다.
또 한사람, 지금은 고인이 된 심재덕 전 시장의 결단도 한몫했다. 당시 수원천 복개는 팔달산 터널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추진되던 국책사업이었다. 시장이라고 해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1996년 첫 민선시장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심 전 시장은 ‘수원천을 이대로 죽게 할 수 없다’며, 복개공사 전면 중단을 발표했다.
수원시는 2009년 수원천 복개구간 복원사업에 착공, 최근 지동교∼매교 구간의 콘크리트 덮개를 걷어내는 공사를 마무리하고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했다. 복원 구간에는 보행용과 차량 교량 9개가 신설됐고, 하천엔 분수와 징검다리도 만들었다. 하천변과 교각에는 이벤트 광장과 생태습지가, 광교저수지에서 세류동 경부철교에 이르는 5.8㎞ 구간에는 산책로가 마련됐다. 수원천 복원은 경제적 효과가 연간 918억원이나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수원천은 청계천과 다르다
복원된 수원천은 ‘제2의 청계천’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한때 콘크리트로 복개됐던 하천의 덮개를 걷어내고 물길을 복원한 도심형 하천이란 측면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수원천과 청계천은 다르다. 청계천은 이명박 서울시장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큰 성과로 손꼽히지만, 생태적 복원과는 거리가 멀다. ‘길게 누운 분수대’, ‘긴 어항’은 복원된 청계천의 또다른 이름이다. 일부에선 대규모 조경사업, 토목사업으로 불린다. 반면 수원천은 행정주도형이 아닌 시민참여형으로, 생태복원을 위한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이 추진됐다. 수원천의 물은 한강에서 끌어온 펌핑수가 아닌 광교산에서 흘러내린다.
수원천 복원은 단순히 물길을 되살려낸 것이 아니다. 수원의 생명과 역사, 문화를 복원시킨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시민의 힘으로 일궈냈다는 점에서 시민운동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