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박근혜의 ‘박정희 DNA’
5·16, 51년6개월 만에 51.6%로 당선되는 기막힌 우연
박근혜 정부의 성패는 박정희 재평가와도 연결
박 당선인은 1993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펴냈다. 만일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8년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것부터 ‘대통령의 딸’로 태어난 숙명 때문이었다. 당시는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이 야심차게 동진(東進) 정책을 추진할 때였다.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보수의 본향에 진보의 깃발을 꽂기 위해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을 내세웠다. 이에 이회창 총재가 이끌던 한나라당은 ‘거물 엄삼탁을 꺾을 수 있는 대항마로 ‘대통령의 딸’을 찾아내 진보의 동진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정치인 박근혜’의 든든한 우군은 영남 보수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일반 유권자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대에 녹을 먹었던 관료, 산업화시대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던 학자·전문가, 성장의 과실을 나눠먹은 기업인들이 박근혜 후견인을 자임했다. 박 당선인은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이래 가장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2007년 첫 대권 도전에서 예선(한나라당 후보경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시련을 맞았으나 박근혜 마니아들의 성원은 여전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그림자가 선거판의 상당 부분을 덮었다. 새누리당 후보 경선에서부터 본선에 이르기까지 5·16의 반(反) 역사성, 민주화 역행, 유신시대의 인권탄압 등이 박 당선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여기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성격, 용인술 역시 야당의 공격대상이 됐다. 이 때문에 10월에 ‘박근혜 위기론’이 제기되면서 최대 고비를 맞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이를 정면돌파하며 위기론을 잠재웠지만, 지난 19일 투표 당일까지 위태위태했다. 특히 선거가 보수 대 진보, 영남 대 호남의 대결구도에 더해 2030 대 5060 세대간 대결로 치닫자 내부에서 불안감이 팽배했다. 아무래도 진보, 호남,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 까닭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에겐 박정희 시대를 잊지 못하는 충성도 높은 지지자들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표를 많이 갖고 있는 보수, 영남, 장·노년층이 투표장으로 모여들었다. 50대의 투표율이 무려 90%에 육박했다는 추정치는 박근혜 지지층이 느낀 절박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결과다. 이들은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역사가 송두리째 부정 당하고, 매도되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다. 또 대한민국 정부를 ‘남쪽 정부’라 칭하고 “유신의 딸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공언한 세력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박정희의 딸 박근혜 당선인은 5년 동안 대한민국호를 이끈다. 앞날은 평탄하지 않다. 경제·외교·남북 분야의 난제에다, 국민의 기대치도 높아져 있다. 만일 5년 후 박근혜 정부가 실패한 정부로 평가된다면 박정희 시대 역시 역사적 명예를 지키기 어렵다. 반대로 박근혜 정부가 성공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과(過)는 묻히고 공(功)은 기억된다. 박 당선인이 갖고 있는 ‘박정희 DNA’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발전시킬까, 후퇴시킬까.
서울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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