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에 듣는다] <4>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
■ 창간기획
"선거는 당 지도부 중심으로…" 신뢰·원칙 외치며 정중동 행보
"선거는 당 지도부 중심으로…" 신뢰·원칙 외치며 정중동 행보
동행 취재: 임세원기자 why@sed.co.kr
- 입력시간 : 2011.08.30 18:20:58
18대 총선후 선거와는 '거리' 지원 유세등 직접 안나서
"수첩속에 국민과 약속 기록" 당직자에 꼼꼼히 질문하기도
상대방과 대화할땐 주로 경청 반응 없으면 거절 표시 가까워
중장년층서 '열성팬' 많지만 '젊은 안티' 포용 과제로 지적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경북 청도를 찾은 지난 27일, 기자는 국내 신문ㆍ방송매체 가운데 유일한 취재기자로 박 전 대표와 동행했다.
차기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그는 항상 수십 명의 기자와 측근 의원들, 경호원,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타난다. 이날이 토요일인 탓에 평소보다 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취재할 수 있었다.
이날 그는 아버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켰고 자신도 참여했던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했다. 마치 고향을 찾은 듯 환호하는 주민들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던 박 전 대표는 '새마을운동에 계속 참여하셨는데 오늘 성역화 사업을 본 소회가 어떠냐'는 질문에 "인사말에 다 들어 있잖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행사를 마치고 나설 때 기자는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당내에서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에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어떤 생각이세요"(기자) "나중에 해요…지금은 시간이….(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회식에 참석하러) 가야 하니까" 그는 서둘러 차를 타고 자리를 떴다. 기자에게는 박 전 대표의 말에서 서울시장 선거 지원 여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듯한 속내가 읽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와 나눈 짤막한 대화는 대변인 격인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을 통해 몇몇 언론에 전달돼 10ㆍ26 재보선 지원 가능성을 닫지 않았다는 식으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언론이 그의 두루뭉술한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싣는 것은 박 전 대표가 현재 정치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이면서 가장 접하기 힘든 취재원이라는 데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실제로 그는 2008년 3월 지역구인 대구의 지방신문과 한 인터뷰를 끝으로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08년 이후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다. 그가 준비해 뱉은 짧은 말 한마디에 정국이 요동친 적도 여러 번이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분분하다. 언론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한나라당 의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선망을 품기도 하지만 그의 소극적 행보를 '부자(富者) 몸조심'으로 치부하며 반감을 갖는 이도 적지 않다. 4년 동안 박 전 대표를 근접취재하며 기자가 듣고 본 '박근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선거의 여왕'이 선거판에 없다?
박 전 대표는 17대 대통령선거 이후, 더 정확히는 친박근혜계가 '공천 학살'이라고 일컫는 18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선거 지원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선거는 당 지도부가 중심이 돼 치르는 것"이라는 게 그가 밝힌 공식 이유다.
지난해 5월 기자가 박 전 대표가 고문으로 있는 평창올림픽 유치특위 일정으로 평창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바로 옆에서 한나라당 강원도 도지사 후보 경선이 열리고 있어 정치권은 박 전 대표가 간접적으로 선거를 지원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경기장으로 걸어서 3분 정도를 이동하는 동안 함께 따라가던 강원도 출신 한나라당 의원이 "경선장 밖으로 지나가며 차창 밖으로 손만 한번 흔들어달라"고 거듭 청을 하자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라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선거에 연계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측근 의원들이 많은 영남권 중진의원의 물갈이론이 한나라당을 몰아쳤던 8월9일 그가 소속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실 앞에 기자들이 몰아닥쳤다. 그는 평소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그날은 그가 다소 회의시각에 늦은 터여서 기자들은 그의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막상 박 전 대표는 서두르지 않았다. 기자들 틈바구니에 있던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어차피 늦은 거 (답변)하고 갈게요"라고 말했다. 여러 질문이 오갔고 공천 문답도 오갔다. 기자가 등 뒤에서 "영남 중진 물갈이론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뭐가요"라고 되물었다. "당내에서 영남 중진의원들이 스스로 물러나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데요"라고 다시 설명하자 그는 "공천이라는 것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고 공당에서 공천은 국민이 납득할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답변했다.
수첩공주
기자는 그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 1989년 5월18일 그가 출연한 두 시간짜리 방송 대담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그는 자신이 적은 듯한 몇 장의 쪽지를 손에 쥐고 나왔다. 몰아치듯 이어지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차분하게 답변했지만 몇 번은 손에 쥔 쪽지를 한참 쳐다본 후 말하기도 했다.
2004년 당 대표가 된 뒤 그에게는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는 "민생현장을 둘러본 뒤 수첩에 적은 내용을 펼쳐놓고 어떻게 됐는지 하나하나 물을 때면 당직자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보이곤 한다"면서 "수첩 속의 약속이 국민 피부에 닿는 혜택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기자는 올 5월 말 박 전 대표가 유럽특사로 네덜란드와 그리스ㆍ포르투갈을 방문했을 때 함께 갔고 각국 동포간담회를 취재했다. 동포간담회의 핵심은 재외국민 6~7명이 나와 외국에 살면서 어려운 점을 말하고 한국이 도와주기 바라는 '민원'이었다. 박 전 대표가 대선주자이다 보니 그에 대한 질문도 꼭 들어간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한정 없이 길어지거나 두서가 맞지 않기도 하고 박 전 대표가 평소 잘 대답하지 않는 정치적 사안을 묻기도 한다. 박 전 대표는 듣기에 거북할 경우 외면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질문자의 핵심 내용을 적어둔다. 곧바로 뒷사람부터 빠짐없이 질문의 요지를 읊고 간결하게 답변한다. 그를 지켜보면서 기자는 '수첩공주' 습관이 정치인으로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도 가방 속에 손으로 적은 쪽지를 들고 다닌다. 기자는 그가 소속한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가방에서 연필로 자신의 질의내용을 쓴 쪽지를 꺼내 읽으며 준비했다.
세심함과 차가움
한번은 국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기자들 속에 둘러싸여 있던 박 전 대표가 실수로 한 기자의 발을 밟았는데 그때 그는 손을 그 기자의 발에 갖다 댈 만치 몸을 굽히며 "다치지 않으셨어요"라며 미안해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기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대단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그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벽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듣는 편이다.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박 전 대표의 습관상 대화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거절에 가깝다. 동남권 신공항 논란이 일었을 때 기자가 정부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박 전 대표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문 채 시선을 거뒀었다.
광팬과 안티
박 전 대표는 기자가 본 정치인 중 열성팬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7월19일 박 전 대표가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의 첨단LED공장 기공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한 할머니가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박 전 대표에게 다가갔다. 경호원은 혼비백산하며 말렸지만 그 할머니는 기어이 귀엣말을 한 뒤 돌아섰다. 기자가 그 할머니께 물어보니 1950년 영남일보에 입사한 나이 여든 둘의 여기자 전경화씨였다. 그는 "박 전 대표를 보려고 새벽부터 올라왔어"라며 "아까는 연설 잘했다고 말해줬지"라고 말했다. 고 육영수 여사 추모식에 온 거의 모든 사람이 박 전 대표의 팬이라고 보면 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물론 박 전 대표의 얼굴과 무궁화가 그려진 우산 등을 들고 나타난다. 주로 중장년층이나 고령의 노인도 있다. 이들은 "근혜님이 우리 손을 잡아주셔"라며 반가워 한다. 박 전 대표는 추모식에 온 사람들에게 두 시간 넘게 악수나 목례로 감사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자신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박 전 대표에게 걸어주며 "평생 사치도 안하고…"라며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추모객 중 이런 목소리도 있었다. "여기에 전부 박근혜 찍을 건데 여기서 악수하면 뭐해. 젊은이들한테 가서 악수해야지."
기자는 박 전 대표가 대구 달성군 LED공장 기공식에 가던 길에서 봤던 두 명의 영남대 학생을 기억한다. 그들은 널빤지에 "영남학원 주인 박근혜의 복지는 영남대의료원 노조간부 해고자 복직부터다"라고 적혀 있었다. 박 전 대표는 그 학생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론과 박근혜
박 전 대표는 전체 흐름을 읽지 않고 눈에 띄는 내용만 잘라 확대 해석하는 언론 보도에도 부정적인 듯하다. 사실 그를 취재하는 이른바 '박근혜 담당기자'는 대개 그가 2004년 당 대표 시절이나 2007년 대선 경선 시절부터 그를 취재해왔다. 연차도 최소 7년 이상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한마디를 들으려 따라다니는 기자들은 기자를 포함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기자들이다. 아무래도 박 전 대표의 발언 배경이나 뉘앙스, 맥락을 읽어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20~30대 젊은 유권자의 시선에서 그를 바라본다. 그래서 다른 정치인과 달리 본회의장 앞에 내내 기다리다 기껏해야 당연한 이야기인 듯한 말 한마디를 들어야 하느냐는 불만도 팽배하다.
박 전 대표는 "오랫동안 취재한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는데 후자 쪽은 아무래도 저에 대해 오해를 하실 수도 있다"며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그래도 박 전 대표와 언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5월3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실. 웬일로 문 밖에서 기자를 포함해 단 3명만이 박 전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들어갈 때 대학등록금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한 터라 대부분의 기자들이 데스크에 보고하기 위해 현장을 비운 것이다. 대학등록금에 대해 추가로 질문하자 박 전 대표는 "다른 기자분들이 안 계신데 혹시 전달받지 못하시면 어쩌죠"라고 걱정했다. 이에 한 기자가 "걱정 마세요 풀(전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자 "누가 전달하시죠"라고 확인한 후에야 답변을 이어갔다.
"수첩속에 국민과 약속 기록" 당직자에 꼼꼼히 질문하기도
상대방과 대화할땐 주로 경청 반응 없으면 거절 표시 가까워
중장년층서 '열성팬' 많지만 '젊은 안티' 포용 과제로 지적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경북 청도를 찾은 지난 27일, 기자는 국내 신문ㆍ방송매체 가운데 유일한 취재기자로 박 전 대표와 동행했다.
차기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그는 항상 수십 명의 기자와 측근 의원들, 경호원,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타난다. 이날이 토요일인 탓에 평소보다 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취재할 수 있었다.
이날 그는 아버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켰고 자신도 참여했던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했다. 마치 고향을 찾은 듯 환호하는 주민들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던 박 전 대표는 '새마을운동에 계속 참여하셨는데 오늘 성역화 사업을 본 소회가 어떠냐'는 질문에 "인사말에 다 들어 있잖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행사를 마치고 나설 때 기자는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당내에서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에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어떤 생각이세요"(기자) "나중에 해요…지금은 시간이….(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회식에 참석하러) 가야 하니까" 그는 서둘러 차를 타고 자리를 떴다. 기자에게는 박 전 대표의 말에서 서울시장 선거 지원 여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듯한 속내가 읽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와 나눈 짤막한 대화는 대변인 격인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을 통해 몇몇 언론에 전달돼 10ㆍ26 재보선 지원 가능성을 닫지 않았다는 식으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언론이 그의 두루뭉술한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싣는 것은 박 전 대표가 현재 정치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이면서 가장 접하기 힘든 취재원이라는 데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실제로 그는 2008년 3월 지역구인 대구의 지방신문과 한 인터뷰를 끝으로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08년 이후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다. 그가 준비해 뱉은 짧은 말 한마디에 정국이 요동친 적도 여러 번이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분분하다. 언론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한나라당 의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선망을 품기도 하지만 그의 소극적 행보를 '부자(富者) 몸조심'으로 치부하며 반감을 갖는 이도 적지 않다. 4년 동안 박 전 대표를 근접취재하며 기자가 듣고 본 '박근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선거의 여왕'이 선거판에 없다?
박 전 대표는 17대 대통령선거 이후, 더 정확히는 친박근혜계가 '공천 학살'이라고 일컫는 18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선거 지원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선거는 당 지도부가 중심이 돼 치르는 것"이라는 게 그가 밝힌 공식 이유다.
지난해 5월 기자가 박 전 대표가 고문으로 있는 평창올림픽 유치특위 일정으로 평창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바로 옆에서 한나라당 강원도 도지사 후보 경선이 열리고 있어 정치권은 박 전 대표가 간접적으로 선거를 지원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경기장으로 걸어서 3분 정도를 이동하는 동안 함께 따라가던 강원도 출신 한나라당 의원이 "경선장 밖으로 지나가며 차창 밖으로 손만 한번 흔들어달라"고 거듭 청을 하자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라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선거에 연계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측근 의원들이 많은 영남권 중진의원의 물갈이론이 한나라당을 몰아쳤던 8월9일 그가 소속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실 앞에 기자들이 몰아닥쳤다. 그는 평소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그날은 그가 다소 회의시각에 늦은 터여서 기자들은 그의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막상 박 전 대표는 서두르지 않았다. 기자들 틈바구니에 있던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어차피 늦은 거 (답변)하고 갈게요"라고 말했다. 여러 질문이 오갔고 공천 문답도 오갔다. 기자가 등 뒤에서 "영남 중진 물갈이론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뭐가요"라고 되물었다. "당내에서 영남 중진의원들이 스스로 물러나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데요"라고 다시 설명하자 그는 "공천이라는 것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고 공당에서 공천은 국민이 납득할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답변했다.
수첩공주
기자는 그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 1989년 5월18일 그가 출연한 두 시간짜리 방송 대담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그는 자신이 적은 듯한 몇 장의 쪽지를 손에 쥐고 나왔다. 몰아치듯 이어지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차분하게 답변했지만 몇 번은 손에 쥔 쪽지를 한참 쳐다본 후 말하기도 했다.
2004년 당 대표가 된 뒤 그에게는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는 "민생현장을 둘러본 뒤 수첩에 적은 내용을 펼쳐놓고 어떻게 됐는지 하나하나 물을 때면 당직자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보이곤 한다"면서 "수첩 속의 약속이 국민 피부에 닿는 혜택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기자는 올 5월 말 박 전 대표가 유럽특사로 네덜란드와 그리스ㆍ포르투갈을 방문했을 때 함께 갔고 각국 동포간담회를 취재했다. 동포간담회의 핵심은 재외국민 6~7명이 나와 외국에 살면서 어려운 점을 말하고 한국이 도와주기 바라는 '민원'이었다. 박 전 대표가 대선주자이다 보니 그에 대한 질문도 꼭 들어간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한정 없이 길어지거나 두서가 맞지 않기도 하고 박 전 대표가 평소 잘 대답하지 않는 정치적 사안을 묻기도 한다. 박 전 대표는 듣기에 거북할 경우 외면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질문자의 핵심 내용을 적어둔다. 곧바로 뒷사람부터 빠짐없이 질문의 요지를 읊고 간결하게 답변한다. 그를 지켜보면서 기자는 '수첩공주' 습관이 정치인으로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도 가방 속에 손으로 적은 쪽지를 들고 다닌다. 기자는 그가 소속한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가방에서 연필로 자신의 질의내용을 쓴 쪽지를 꺼내 읽으며 준비했다.
세심함과 차가움
한번은 국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기자들 속에 둘러싸여 있던 박 전 대표가 실수로 한 기자의 발을 밟았는데 그때 그는 손을 그 기자의 발에 갖다 댈 만치 몸을 굽히며 "다치지 않으셨어요"라며 미안해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기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대단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그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벽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듣는 편이다.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박 전 대표의 습관상 대화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거절에 가깝다. 동남권 신공항 논란이 일었을 때 기자가 정부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박 전 대표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문 채 시선을 거뒀었다.
광팬과 안티
박 전 대표는 기자가 본 정치인 중 열성팬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7월19일 박 전 대표가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의 첨단LED공장 기공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한 할머니가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박 전 대표에게 다가갔다. 경호원은 혼비백산하며 말렸지만 그 할머니는 기어이 귀엣말을 한 뒤 돌아섰다. 기자가 그 할머니께 물어보니 1950년 영남일보에 입사한 나이 여든 둘의 여기자 전경화씨였다. 그는 "박 전 대표를 보려고 새벽부터 올라왔어"라며 "아까는 연설 잘했다고 말해줬지"라고 말했다. 고 육영수 여사 추모식에 온 거의 모든 사람이 박 전 대표의 팬이라고 보면 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물론 박 전 대표의 얼굴과 무궁화가 그려진 우산 등을 들고 나타난다. 주로 중장년층이나 고령의 노인도 있다. 이들은 "근혜님이 우리 손을 잡아주셔"라며 반가워 한다. 박 전 대표는 추모식에 온 사람들에게 두 시간 넘게 악수나 목례로 감사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자신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박 전 대표에게 걸어주며 "평생 사치도 안하고…"라며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추모객 중 이런 목소리도 있었다. "여기에 전부 박근혜 찍을 건데 여기서 악수하면 뭐해. 젊은이들한테 가서 악수해야지."
기자는 박 전 대표가 대구 달성군 LED공장 기공식에 가던 길에서 봤던 두 명의 영남대 학생을 기억한다. 그들은 널빤지에 "영남학원 주인 박근혜의 복지는 영남대의료원 노조간부 해고자 복직부터다"라고 적혀 있었다. 박 전 대표는 그 학생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론과 박근혜
박 전 대표는 전체 흐름을 읽지 않고 눈에 띄는 내용만 잘라 확대 해석하는 언론 보도에도 부정적인 듯하다. 사실 그를 취재하는 이른바 '박근혜 담당기자'는 대개 그가 2004년 당 대표 시절이나 2007년 대선 경선 시절부터 그를 취재해왔다. 연차도 최소 7년 이상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한마디를 들으려 따라다니는 기자들은 기자를 포함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기자들이다. 아무래도 박 전 대표의 발언 배경이나 뉘앙스, 맥락을 읽어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20~30대 젊은 유권자의 시선에서 그를 바라본다. 그래서 다른 정치인과 달리 본회의장 앞에 내내 기다리다 기껏해야 당연한 이야기인 듯한 말 한마디를 들어야 하느냐는 불만도 팽배하다.
박 전 대표는 "오랫동안 취재한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는데 후자 쪽은 아무래도 저에 대해 오해를 하실 수도 있다"며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그래도 박 전 대표와 언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5월31일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실. 웬일로 문 밖에서 기자를 포함해 단 3명만이 박 전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들어갈 때 대학등록금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한 터라 대부분의 기자들이 데스크에 보고하기 위해 현장을 비운 것이다. 대학등록금에 대해 추가로 질문하자 박 전 대표는 "다른 기자분들이 안 계신데 혹시 전달받지 못하시면 어쩌죠"라고 걱정했다. 이에 한 기자가 "걱정 마세요 풀(전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자 "누가 전달하시죠"라고 확인한 후에야 답변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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