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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박근혜 두 사람 모두는 영웅이다 / 안철수와 박근혜 비교는 넌센스다

안철수-박근혜 두 사람 모두는 영웅이다 / 안철수와 박근혜 비교는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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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안철수-박근혜 두 사람 모두는 영웅이다

안철수와 박근혜 비교는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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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박근혜 두 사람 모두는 영웅이다
이찬석 본지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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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와안철수. © 아산톱뉴스

안철수 교수의 출현은 기성 정치판을 향한 국민의 실망만을 대변한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온 국민이 던지는 희망의 낚시질에 가깝다. 그는 남다른 사고력과 철학을 가진 사회 봉사개혁의 실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나 혼자 만의 욕망의 찬치가 아니다. 나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연대의 공간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란 나눔 이전에 공익의 기여라는 책무를 개개인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군중은 개인의 이익 추구와 행복 정착이라는 목적을 두고 최선을 다해 간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을 지키는 굶주린 사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행복조차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노력이 우선되지 않을 때 불균형의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기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힘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들이나 소외계층에게 희망으로 다가가 안기게 된다. 이때 역사의 좌판은 희망으로 달구어 지게 된다.

자신만이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경쟁구도는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축이 되긴 하지만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어두운 그늘을 양산해 낸다. 세상이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 것은 희망을 주도해내는 일꾼들이 더 이상 희망의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 줄어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정치가 희망인 세상이었다. 위대한 정치가 한 사람의 출현은 역사를 희망으로 도배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가 희망인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희망인 세상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다시 나에게 너와 나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인 것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공익적인 기여라는 초점에 맞추어져 개인의 역사를 다스려 나갈 때 그런 모두는 우리에게 희망이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 교수는 우리에게 희망이며, 국민이 기다리고 찾은 영웅인 것이다.

박근혜는 기성 정치판의 새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남성의 전유물로 이어진 현대 한국정치사에 여성이 지도자로 나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기성정당정치에 유일한 대안 인물로 부상했다는 사실이 영웅의 역사이다.

그 자리에게 오르기까지 그녀는 적대적 세력들로부터 온갖 위기와 핍박을 당해 왔다. 남성우월주의의 사회에 뿌린 내린 기득권층은 박근혜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일등이었다. 자신 앞에 놓인 위기를 의연하게 맞서 지금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의 출현은 지금도 희망이다. 반대와 벗하며 걸어가는 길은 고독하다.

특히 여성은 오죽하랴. 위기를 벗하며 걸어온 자의 삶은 외경이 묻어있다. 그 자취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려는 무수한 노력과 열정이 녹아져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희망을 제시하는 능력이 남다를 수 있다.

남·녀 평등사회를 구현하는 것은 역사의 평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성을 구별하는 사회는 올바른 문명이 아니다. 남성이 역사의 주인인 사회에서 정당정치의 대표주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녀는 이미 승자이다.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는 차후의 문제이다. 훗날의 영광보다 바로 지금 그녀는 독보적인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 있는 것이다.

신촌 백화점 앞에서 있었던 박근혜의 테러 사건은 한 여성의 정치 행보가 얼마나 고단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때 그녀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그 냉철한 이성적인 대응은 그녀가 한사람의 여성이기 이전에 이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당시 박근혜의 출현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희망이었다. 박근혜의 정치력은 결코 온실 속의 공주가 아니다. 격화된 반대 세력과의 승리이며, 굴곡진 운명과의 한판 승부이다.

그녀는 아주 오래도록 위기와 벗해 왔다. 따라서 그녀 또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미 준비된 영웅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출현은 그 자체로서 역사의 희망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언제나 새로운 역사의 나침반을 요구한다.



이찬석 본지 칼럼위원





<필자 소개>
이찬석


<이력>
-전)한국 노년 유권자연맹 대변인 역임
-전) 동부 실버 라이프 회장 역임
-현) 파이소 대표
-현)글이 사는 마을 출판 사 대표
-현) 기업일보 발행인
-전) 예스 위크 회장 역임
-현) 미드림 하우징 회장
-현) 한울 문학 등단 시인
-현) 왕따 신고의 날 공동 의장


<저서>
▲방황과 도전 ▲어느 ceo의 누드 경영 ▲어머니와 김장김치 ▲담장 안에서 건져 올린 생각


<시집>
▲멀어진 만큼 가까워지기 ▲팔리지 않는 시 외 다수



기사입력: 2011/09/18 [17:55]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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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박근혜 비교는 넌센스다
정치는 정치인이, 연구는 학자가
이찬석 본지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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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거지고 있는 박근혜와 안철수의 대선비교는 비교로서 끝나야하는 가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이것을 현실 정치와 대치시켜 사실화하는 것에 필자는 반대한다.

안철수 교수는 학자로서, 기업가로서, 연구가로서 사회정화나 문화의 가치 발전에 기여해왔다. 기업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경영윤리 기반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공헌한 것은 그의 업적이기도 하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야기되는 피해를 남보다 일찍 깨우쳐 준 것도 모두 그의 앞선 예지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치가 사회문화 개혁을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를 정치무대로 불러들여 기성정치를 뛰어 넘는 대안의 주체로 삼아 가려는 것은 금물이다. 이미 그는 분업화된 사회의 통합 구도 안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역사의 기여는 이렇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 안에서 책무를 완수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한사람의 대중스타가 정치 발전을 단숨에 달성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어불성설이다.

시계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사회는 각자의 역할에 의해 맞물려 돌아간다. 정보 분야는 안철수 교수가 잘하는 일이다. 학문의 일등이 정치의 일등일 수는 없다.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낀 세대들이 뭔가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이 뛰어 나와 구리고, 병들고, 어두운 정치판을 속 시원하게 개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뉘 뭐라 하겠는가마는 애당초 정치란 기업에게 요구하는 투명한 윤리가 실현 될 수 없는 한계성이 있다. 기업은 오너 한사람의 역량에 의해 발전과 퇴보. 개혁이 가능하다. 일당 독재의 권한이 주어진 것이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이와 반대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균형 잡힌 합의의 단계를 벗어나서는 정치는 할 수 없다.

학문에도 단계가 있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씨름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모래판에 밀쳐놓는다고 그가 천하장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꽃피지 않는 군사정권시대에는 일당 독재의 전횡으로 모든 것을 단행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국민이 정치인이고, 모든 국민이 현실 정치 참여를 하는 시대에 와있다.

스타 한사람에게 역사를 바뀔 희망을 거는 도박은 말 그대로 도박일 뿐이다.

정치는 그자체가 권모술수를 요구한다. 정치인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역겨워 보이지만 정치의 역학 구도에 들어서면 방귀 안 뀌는 사람 없다.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게 소위 정치인데, 전체 국민이 찬성하는 일을 해낼 수가 없다. 정책은 어느 쪽에서는 선이고, 어느 한쪽에는 서는 악이 된다. 그렇다면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나와서 대통령이 됐다고 하자 과연 모든 국민이 만족하는 반대 없는 정치를 할 수 있고, 그러한 대안을 마련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전혀 아니다.

반찬 그릇에 반찬을 담고, 커피 잔에는 커피를 담아야 한다. 기름통에는 기름을 부어야지 기름통에 물을 담으면 안 된다.

안철수 교수는 학문의 전당에 남아 있어야 한다. 현실정치에 나와서 할 일보다 그쪽에서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으며, 의미 있는 일이다.

집안에 자식이 많은 사람이 있다. 딸 셋에 아들 셋이다. 한 배 안에서 나왔으니 생각이나 품행이나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이 고만고만하면 될 터인데 생겨 먹은 것도, 성격도 민중문화 유산인 화투장 다르듯이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어느 자식에게는 좋은 아빠 소릴 듣고, 어느 자식에게는 나쁜 아빠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어느 가장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자식을 키우는 것도 이 모양인데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정치인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다만 어느 쪽에서는 좋은 소리를 듣고, 어느 쪽에서는 시원찮은 소릴 듣는다.

이게 정치의 운명이고, 한계이다. 다만 누가 통합의 정치를 할 수 있느냐는 개인의 역량문제로 남아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을 제대로 뽑아야 하지만 학문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는 순수한 국민 토종을 정치판에 불러내어 기성정치인과 비교하면서 ‘한번 바꿔보자’ 식의 요구는 사리에 맞지 않다.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가 썩었다. 윤리적으로 판단하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다. 점진적인 발전을 기대해보면서 여유를 갖도록 하자. 그리고 비교 놀음을 그만하도록 하자.



이찬석 본지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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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9/11 [22:29] 최종편집: ⓒ 아산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