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 읽기] 안철수 보면 고건 생각난다 | |
기사입력 2012.06.04 12:05:48 | 최종수정 2012.06.04 13:21:09 |
지난 5월 30일 부산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이날 안 교수는 정치 참여 여부에 관한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고건 전 총리.
박찬종, 고건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뭘까? 한때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렸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먼저 박찬종 전 의원을 보면, 대선 2년 전인 1995년 9월에는 누구랑 붙어도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 부동의 1위였다. 당시 그의 지지율은 대략 44~50%에 달했다. 반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26~28%의 지지율을 보여 2위에 머물렀다. 이회창 전 총리 지지율은 19%였다.
박찬종 전 의원의 기세는 대선의 해인 1997년 초까지 이어졌다. 박찬종 당시 신한국당 고문은 당내에서 이회창 후보를 압도할 뿐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두 인물보다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해 6월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박찬종 전 의원의 선두 유지는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6월 말부터 급부상한 이인제 의원에게 위협당하고 이회창 전 총리가 당심(黨心)을 장악하면서 박찬종 대세론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 박찬종 전 의원은 1997년 7월 13일 “이회창 후보가 금품을 살포했고 자신에게 후보를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하다 7월 19일 대선 후보 사퇴를 선언한다. 당심에서 밀리니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어쨌든 유력 대권주자 박찬종은 그렇게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와 유사한 경우가 2007년 대선에서도 있었다. 바로 고건 전 총리다. 고건 전 총리가 대선구도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다. 탄핵 당시 고건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을 대리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차기 대통령 감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당시 고건 전 총리는 지지율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2위와의 격차가 무려 두 배에 달했다. 이런 현상은 2005년 9월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2005년 10월경부터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이른바 ‘청계천 효과’를 등에 업고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고건 전 총리가 1위를 유지하긴 했으나, 이명박 시장이 고건 전 총리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추격했다. 이때부터 소위 고건, 박근혜 그리고 이명박의 3파전이 시작된다. 2006년 6월까지는 고건 전 총리가 다른 두 주자보다 근소하나마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2006년 2월에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고건 전 총리를 영입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고 고건 전 총리 역시 “김근태 최고위원과 주파수가 맞는다”며 열린우리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민주당 역시 고건 전 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범여권 전체가 고건 전 총리에게 매달리는 형국이 2006년 여름까지 지속됐다.
고건 전 총리는 2006년 8월 ‘희망한국국민연대(희망연대)’를 출범시키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주장하며 ‘안정’과 ‘통합’ ‘중도실용’ 노선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고건 전 총리는 지방선거 이전에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려는 구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계획이 뜻대로 되지 못해 한때 추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희망연대 출범으로 대선 출마의지를 구체화했을 뿐 아니라 방향성과 전략을 가다듬었음을 대중에게 알렸다. 이뿐 아니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일관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내가 앞으로 정치를 하면 (희망연대가 제시한) 대안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나섰다.
그해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고 여권 내의 노선투쟁과 그에 맞물린 정계 개편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고건 전 총리는 그만 추락하고 만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정체성과 관련해 두 가지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햇볕정책이냐 포용정책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고 둘째는 정계 개편 과정에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시킬 것이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냐 하는 부분이 쟁점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각 계파 간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지역구도 타파를 기치로 하는 이념성을 앞세운 정계 개편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건 전 총리는 대북정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고 전 총리는 햇볕정책을 수정해서 승계할 정책으로 인정했지만, 포용정책은 ‘안이하고 경직된 유화고수론’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무조건적 대북지원정책(포용정책)과 햇볕정책을 구분한 것이다.
이후 기존 여권 성향 그러니까 열린우리당 성향의 표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반대 측 그러니까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성향의 지지층은 북핵 실험 이후 더욱 보수화돼 고건 전 총리를 열린우리당 쪽이라고 낙인찍는 상황이 초래됐다. 어쨌든 결국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 빠지기 시작했고 이명박, 박근혜에 뒤이어 3위로 떨어졌다. 고 전 총리는 이듬해인 2007년 1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보면 박찬종, 고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대선 후보 1위를 근 2년여간 지속했다. 또 두 사람 모두 당시 국민들에게는 기존 정치권을 대신할 참신한 대안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차이점도 존재한다. 박찬종 전 의원은 신한국당에 계속 몸담았다가 탈당했던 반면, 고건 전 총리는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를 기록하면서도 정당에 몸을 담지 않았다. 또한 박찬종 전 의원은 정치인 출신이어서 비교적 자신의 정치적 식견을 진솔하게 말했던 반면 행정가 출신인 고건 전 총리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계속 모호한 입장만을 견지하다 북핵 사태 이후 비로소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입장을 개진했다.
고건 전 총리 스타일이 지금의 안철수 교수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안 교수도 지금까지는 지극히 모호한 화법만을 구사했다. 최근 부산대 강연에서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과 표현은 여전히 어중간하다. 통진당 사태와 종북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안 교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도출된다. 만일 안 교수가 사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개진하게 되면 고건 전 총리의 사례처럼 그를 지지했던 한쪽 축이 무너지거나 진보와 보수 모두가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 게다가 안철수 교수는 고건 전 총리의 사례보다 더 어려운 지경에 놓일 수 있는 확률이 있다.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이라고 불릴 만큼 일찍부터 다양한 공직 경험이 있었던 반면 안 교수는 정치는 고사하고 공직 경험 역시 전무하기 때문이다. 즉 탄핵으로 노 전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한 경험까지 있는 고건 전 총리의 경우는 사안에 대해 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 해도 일반 국민들이 어느 정도 그의 행동이나 사고를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다. 반면 안 교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 사안에 대한 대응은 고사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또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국민들이 안 교수에 대해 상당히 불안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얘기하고자 하는 점은 박찬종, 고건 두 사람 모두 2년 가까이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를 차지했던 반면 안철수 교수는 지난해 9월 지지율 1위의 대선 후보로 등장한 이후 8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1위 자리를 다시 박근혜 전 대표에게 내줬다는 사실이다. 이는 안철수 교수 신드롬이 과거 고건 전 총리나 박찬종 전 의원의 경우보다 더욱 ‘바람’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안철수 교수의 바람이 이전 바람보다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고건 전 총리와 안철수 교수의 또 다른 차이점은 바로 검증 여부에 있다. 고건 전 총리는 총리 인준 청문회를 거쳐 나름의 검증 과정을 거쳤지만, 안철수 교수는 검증 절차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 부분은 검증에 대한 내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민주통합당이나 과거 열린우리당의 행위상 공통점도 존재한다. 2007년 대선 전에는 고건 전 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안철수 교수에게 공동정권을 제안하는 모양새가 똑같다. 2006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당에 유력 대권주자가 없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은 이런 차원에서 민주당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외부인사 영입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는지 아니면 내부인사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외부인사에만 관심을 돌렸기 때문에 대선에서 실패했는지를 면밀히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속설일 뿐, 법칙은 아니다. 이번 대선이 그것이 법칙이 아님을 증명할지 아니면 속설을 증명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먼저 박찬종 전 의원을 보면, 대선 2년 전인 1995년 9월에는 누구랑 붙어도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 부동의 1위였다. 당시 그의 지지율은 대략 44~50%에 달했다. 반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26~28%의 지지율을 보여 2위에 머물렀다. 이회창 전 총리 지지율은 19%였다.
박찬종 전 의원의 기세는 대선의 해인 1997년 초까지 이어졌다. 박찬종 당시 신한국당 고문은 당내에서 이회창 후보를 압도할 뿐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두 인물보다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해 6월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박찬종 전 의원의 선두 유지는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6월 말부터 급부상한 이인제 의원에게 위협당하고 이회창 전 총리가 당심(黨心)을 장악하면서 박찬종 대세론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 박찬종 전 의원은 1997년 7월 13일 “이회창 후보가 금품을 살포했고 자신에게 후보를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하다 7월 19일 대선 후보 사퇴를 선언한다. 당심에서 밀리니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어쨌든 유력 대권주자 박찬종은 그렇게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와 유사한 경우가 2007년 대선에서도 있었다. 바로 고건 전 총리다. 고건 전 총리가 대선구도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다. 탄핵 당시 고건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을 대리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차기 대통령 감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당시 고건 전 총리는 지지율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2위와의 격차가 무려 두 배에 달했다. 이런 현상은 2005년 9월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2005년 10월경부터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이른바 ‘청계천 효과’를 등에 업고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고건 전 총리가 1위를 유지하긴 했으나, 이명박 시장이 고건 전 총리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추격했다. 이때부터 소위 고건, 박근혜 그리고 이명박의 3파전이 시작된다. 2006년 6월까지는 고건 전 총리가 다른 두 주자보다 근소하나마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2006년 2월에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이 고건 전 총리를 영입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고 고건 전 총리 역시 “김근태 최고위원과 주파수가 맞는다”며 열린우리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민주당 역시 고건 전 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범여권 전체가 고건 전 총리에게 매달리는 형국이 2006년 여름까지 지속됐다.
고건 전 총리는 2006년 8월 ‘희망한국국민연대(희망연대)’를 출범시키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주장하며 ‘안정’과 ‘통합’ ‘중도실용’ 노선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고건 전 총리는 지방선거 이전에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려는 구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계획이 뜻대로 되지 못해 한때 추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희망연대 출범으로 대선 출마의지를 구체화했을 뿐 아니라 방향성과 전략을 가다듬었음을 대중에게 알렸다. 이뿐 아니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일관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내가 앞으로 정치를 하면 (희망연대가 제시한) 대안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나섰다.
그해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고 여권 내의 노선투쟁과 그에 맞물린 정계 개편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고건 전 총리는 그만 추락하고 만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정체성과 관련해 두 가지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햇볕정책이냐 포용정책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고 둘째는 정계 개편 과정에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시킬 것이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냐 하는 부분이 쟁점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각 계파 간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지역구도 타파를 기치로 하는 이념성을 앞세운 정계 개편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건 전 총리는 대북정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고 전 총리는 햇볕정책을 수정해서 승계할 정책으로 인정했지만, 포용정책은 ‘안이하고 경직된 유화고수론’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무조건적 대북지원정책(포용정책)과 햇볕정책을 구분한 것이다.
이후 기존 여권 성향 그러니까 열린우리당 성향의 표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반대 측 그러니까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성향의 지지층은 북핵 실험 이후 더욱 보수화돼 고건 전 총리를 열린우리당 쪽이라고 낙인찍는 상황이 초래됐다. 어쨌든 결국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 빠지기 시작했고 이명박, 박근혜에 뒤이어 3위로 떨어졌다. 고 전 총리는 이듬해인 2007년 1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보면 박찬종, 고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대선 후보 1위를 근 2년여간 지속했다. 또 두 사람 모두 당시 국민들에게는 기존 정치권을 대신할 참신한 대안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차이점도 존재한다. 박찬종 전 의원은 신한국당에 계속 몸담았다가 탈당했던 반면, 고건 전 총리는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를 기록하면서도 정당에 몸을 담지 않았다. 또한 박찬종 전 의원은 정치인 출신이어서 비교적 자신의 정치적 식견을 진솔하게 말했던 반면 행정가 출신인 고건 전 총리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계속 모호한 입장만을 견지하다 북핵 사태 이후 비로소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입장을 개진했다.
고건 전 총리 스타일이 지금의 안철수 교수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안 교수도 지금까지는 지극히 모호한 화법만을 구사했다. 최근 부산대 강연에서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과 표현은 여전히 어중간하다. 통진당 사태와 종북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안 교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도출된다. 만일 안 교수가 사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개진하게 되면 고건 전 총리의 사례처럼 그를 지지했던 한쪽 축이 무너지거나 진보와 보수 모두가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 게다가 안철수 교수는 고건 전 총리의 사례보다 더 어려운 지경에 놓일 수 있는 확률이 있다.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이라고 불릴 만큼 일찍부터 다양한 공직 경험이 있었던 반면 안 교수는 정치는 고사하고 공직 경험 역시 전무하기 때문이다. 즉 탄핵으로 노 전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한 경험까지 있는 고건 전 총리의 경우는 사안에 대해 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 해도 일반 국민들이 어느 정도 그의 행동이나 사고를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다. 반면 안 교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 사안에 대한 대응은 고사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또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국민들이 안 교수에 대해 상당히 불안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얘기하고자 하는 점은 박찬종, 고건 두 사람 모두 2년 가까이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를 차지했던 반면 안철수 교수는 지난해 9월 지지율 1위의 대선 후보로 등장한 이후 8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1위 자리를 다시 박근혜 전 대표에게 내줬다는 사실이다. 이는 안철수 교수 신드롬이 과거 고건 전 총리나 박찬종 전 의원의 경우보다 더욱 ‘바람’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안철수 교수의 바람이 이전 바람보다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고건 전 총리와 안철수 교수의 또 다른 차이점은 바로 검증 여부에 있다. 고건 전 총리는 총리 인준 청문회를 거쳐 나름의 검증 과정을 거쳤지만, 안철수 교수는 검증 절차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 부분은 검증에 대한 내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민주통합당이나 과거 열린우리당의 행위상 공통점도 존재한다. 2007년 대선 전에는 고건 전 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안철수 교수에게 공동정권을 제안하는 모양새가 똑같다. 2006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당에 유력 대권주자가 없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은 이런 차원에서 민주당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외부인사 영입에 실패했기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는지 아니면 내부인사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외부인사에만 관심을 돌렸기 때문에 대선에서 실패했는지를 면밀히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속설일 뿐, 법칙은 아니다. 이번 대선이 그것이 법칙이 아님을 증명할지 아니면 속설을 증명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60호(12.06.06~6.12 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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