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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계의 큰 별 떨어지다’(제1신)외 기사 모음_수원인터넷뉴스

‘한국 불교계의 큰 별 떨어지다’(제1신)외 기사 모음_수원인터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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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한국 불교계의 큰 별 떨어지다’(제1신)

'불 들어가요! 스님 나오세요!'

봉령사 삼존불의 원력을 하늘에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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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계의 큰 별 떨어지다’(제1신)

수원 봉녕사에서 세주당 묘엄명사 영결식



세주당 묘엄명사. 한국 조계종의 원로 비구니로 수원시 봉녕사에서 입적을 한 스님의 영결식이 봉녕사 우화궁 앞에서, 12월 6일(불기 2555년 음 11월 12일) 오전 11시부터 3,000여명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 영결식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비구니스님들

‘대한불교 조계종 니화상 세주당 묘엄명사 전국비구니회장 장례위원회’에서 주관한 이 영결식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하여, 묘엄명사의 입적을 안타까워했다.

묘엄명사는 1931년 1월 17일, 경남 진주에서 부친 이찬호와 모친 차점이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스님의 아버지는 두 번의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며, 종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청담 순호스님이시다. 15살에 성철스님과의 만남으로 출가 수행자가 된 묘엄명사.

▲ 운구에 들고 갈 번이 놓여있다

1945년 3월 25일 경북 대승사에서 원혜스님은 은사로 득도를 하였으며, 1945년 4월 15일 대승사에서 성철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년 3월 18일 경남 통도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 영결식장에 모인 조문객들

▲ 비구니스님들이 입적을 한 묘엄명사를 추도하고 있다

1966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1956년 동학사 강사, 1966년 운문사 강주, 1979년 봉녕사 주지 및 강주로 취임을 하였다. 1992년에는 제10대 중앙종회의원에 당선이 되었으며, 1999년에는 비구니 금강율원 율원장에 취임을 하였다. 2003년에는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에 취임을 하였으며, 2007년 10월 23일에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종정스님이신 법전스님으로부터 명사 법계품서를 수지받았다.

▲ 명종(타종)으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조계종 문화부장인 진명스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영결식은 범종을 치는 명종(5타)을 울림과 동시에 시작이 되었으며, 삼귀와 영결법요, 헌다와 헌향, 행장소개, 추도입장, 영결사, 법어, 추도사, 추모사, 조사, 조가, 각계 대표의 헌화, 문도의 인사말씀, 사홍서원으로 이어지고, 이어서 발인식이 거행이 되었다.

▲ 영결식을 거행하기 전에 봉녕사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영결사를 맡은 전국비구니회 회장인 명우스님은

〃스님, 스님, 정말 이대로 뿌리치고 가시는 것입니까? 스님께서 세연이 다하여 떠나시던 날, 스님께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계에는 큰 별 하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중략) 몇 해 전 행사장에서 뵈었을 때, 스님께서 키우신 강사스님들을 앞세우시며 ‘이제는 이 스님들이 주불이야. 나는 이제 후불탱화 할 거야’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까지도 제 뇌리에 박혀 마구 가슴을 울립니다. 이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신 이 장엄한 봉녕사 도량에서, 저희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님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하략)“

▲ 생전의 묘엄명사(사진 전사)

영결식장에 모인 모든 추모객들은 스님의 떠나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울먹이기도 하였으며, 인계동에서 왔다는 이모불자(여, 42세)는 “마치 친정 할머니 같으셨던 스님께서 이렇게 가신다고 하니, 억장이 미어지는 듯 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불교계의 큰 별이신 세주당 묘엄명사. 하늘에는 때 아닌 무지개가 봉녕사 하늘을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었다. ‘스님께서 저 무지개를 타시고 연화세계로 오르시나 보다’ 누군가 이야기에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다.

하주성(sw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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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들어가요! 스님 나오세요!'

‘한국 불교계의 큰 별 떨어지다’ (제2신)



【수원인터넷뉴스】박진영 기자 = 한국 불교의 대덕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전수받고 봉녕사 승가대학과 율원을 세워 후학 양성의 도량을 가꾼 비구니계의 주춧돌인 묘엄 스님이 지난 2일 오전 9시 5분 수원 봉녕사에서 입적했다.

조계종 통합종단의 2대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의 속가 딸이며 성철 스님의 제자이기도한 묘엄 스님의 영결식이 6일 오전 11시 봉녕사 우화궁 앞에서 전국에서 모인 5,000여명의 불자와 신도들이 애도를 표하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김문수 도지사를 비롯해 임태희 대통령비서실장, 염태영 수원시장, 남경필 국회의원, 김충영 팔달구청장, 김용서 전 시장, 각계대표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묘엄 스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이 날 명종을 시작으로 열린 영결식은 조계종 어장 원명 스님의 영결법요, 화성 신흥사 주지 성일 스님의 행장소개, 추도입정 등이 진행됐다.

이어서 전국 비구니회 회장 명우 스님의 영결사가 있었고, 자승 스님의 추도사와 고산 스님의 추모사, 현응, 정호 스님 등의 조사가 있었다.

각계대표의 헌화를 끝으로 영결식이 끝나고 스님의 법구는 영결식장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봉녕사 다비장으로 운구됐다.

묘엄 스님의 법호가 적힌 명정을 앞세운 가운데 영정과 위패, 만장 등을 앞세운 운구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신도들은 스님의 마지막 길을 따라 산길을 가득 메웠다.

다비식장에 도착한 묘엄 스님의 법구는 가마에서 옮겨져 다비대에 모셔졌고, 거화 신호가 떨어지자 스님들이 새끼줄로 만든 방망이에 불을 붙이며 "불 들어가요! 스님 나오세요!"를 연호했고, 이어서 새끼줄과 솔가지 등을 덮은 다비대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묘엄 스님의 다비는 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며, 문도들은 스님의 유골을 수습해 봉녕사에 봉안할 예정이다.

한편 묘엄 스님은 “마음공부는 상대적인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인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를 단속하여 인천의 사표 되고 생사에 자제하여 중생을 제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관련사진>

박진영(sw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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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령사 삼존불의 원력을 하늘에서 보다

봉녕사 하늘에 걸린 무지개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 석조 삼존불을 모신 용화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석조삼존불.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의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코,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밑에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 도식화 된 모습의 안면

▲ 우편견단으로 조성한 법의와 섬세하지 못한 손

▲ 받침돌인 연화대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12월 6일, 봉녕사에서는 큰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되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묘엄명사의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한 사람들로 인해, 각 전각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틈에도 문화재를 답사하겠다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촬영을 한다.

▲ 좌협시불

▲ 우협시불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 무지개. 화엄명사의 영결식이 열리는 날, 하늘에 걸렸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큰 스님의 다비식을 맞아 찾아간 봉녕사. 많은 사람들 틈에서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고 나오면서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저 삼존불의 원력이 있어 이렇게 큰 비구니스님이 득도를 한 것이나 아닌지. 삼존불 촬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봉령사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하주성 국장(sw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