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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고향] (5)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목자의 고향] (5)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 2011.12.07 17:14


12월 23일은 극동방송 창사 55주년 기념일이다. 그동안 방송사 발전에 도움을 주신 분들과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내 인생의 78년을 돌아보려 한다.

나는 1934년 7월 25일 경기도 화성군 안용면 장지리 버드네의 가난한 소작농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말기였기 때문에 가난과 벗하며 자랐다. 그리고 해방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가난한 형편에 공부는 꿈도 못 꾸던 중 누군가 철도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학비를 내지 않아도 국비로 공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용돈도 나온다고 귀띔해 줬다.

그 길로 난 바로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로 상경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해버린 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기적적으로 살리셨고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수원집으로 돌아왔다.

수원서 목회 반세기… 기적을 낳다

그때 내 나이 열여섯 살. 어렵고 힘든 생활 가운데 새로운 즐거움이 찾아왔다. 미군 24사단 21연대. 그곳에 가면 늘 초콜릿과 껌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영어를 전혀 못하니 손짓 발짓을 하며 그들을 따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동네아이들 가운데 유난히 똘똘하게 보였던 나는 미군병사의 눈에 띄어 하우스 보이로 발탁됐다. 어릴 적에도 부지런하고 열심이었던 성격이었는지라 미군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공군의 남하로 점점 미군 부대들이 남쪽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 미군들은 나에게 같이 내려가서 하우스보이 일을 계속해 달라고 간청했고 고심 끝에 결국 그들을 따라 1950년 성탄절 날 경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기적의 사람을 만났다. 칼 파워즈 상사. 그가 바로 나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나의 제 2의 고향, 밥 존스 학교

1951년 11월 12일,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정든 고향 수원을 뒤로 한 채 타향에서 고향을 잊지 말라고 어머님께서 넣어주신 내 고향, 수원의 향취가 담긴 흙주머니 한 개와 하우스보이 시절 모아둔 미화 130달러만 가지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배를 탔다.

미국에 도착하여 간곳은 밥 존스 학교. 이곳에서 타향살이가 시작되자 난 곧 향수병에 걸렸다.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수원 고향집 마당의 흙이 담긴 주머니를 부둥켜안고 매일 울었다. 지독한 향수병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제리 메이저라는 룸메이트 형이 예수 믿으면 향수병이 낫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 영접기도를 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외로움이 사라졌다. 나와 예수님의 뜨거운 만남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내 인생의 방향까지도 바뀌게 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농림부장관이 되어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예수님 만나고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온다

결국 난 신학대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자 외딴 미국의 시골마을들을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전도에 열정을 다했다. 주님을 만나니까 내 삶은 완전히 변했다. 향수병이 나으니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주님을 만나니 자신감도 생겼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한반도, 전쟁국가 한국에서 온 작은 소년이었던 내가 미국 온 지 2년 만에 사우스캐롤나이나 주 웅변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고교 졸업 때는 우등상을 타고 밥존스 신학대학과 대학원 시절 모두 올 A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밥존스에서 단 1점의 벌점도 받지 않았으며 자랑스러운 모범생이 됐다. 또한, 축구부의 주장으로, 성가대원으로, 신앙상담자로, 교내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내외 봉사활동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리더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자,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하나의 멋진 사랑의 기적을 주셨다. 1958년 8월, 난 학교에서 만나 알게 된 동문후배 트루디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1959년 2월 2일, 단테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11월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8년만에 목사되어 귀향

17세 소년이었던 난 8년 만에 25세의 늠름한 목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수원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국으로 여전히 부족하고 불편한 것뿐이었다. 1959년 12월, 한국에 돌아온 난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던 가족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전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허허벌판이었던 인계동에 집을 지어 사람들을 모았다. 이 집은 이후 30년간 전도를 위한 거점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개방된 작은 교회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학생들과 선교사 가족들, 미군들까지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진국에서 당시 최빈국으로 시집을 온 신실하고 헌신적인 나의 아내 트루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 아내 트루디는 그 누구보다 수원을 더 사랑하고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곳에서 눈물로 뿌린 복음의 씨앗은 셀 수 없이 많고 기도로 심은 사랑이 셀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만나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소읍에 불과했던 수원은 내가 돌아온 1959년 12월말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가용이라고는 단 2대뿐이었던 가난한 도시였다. 이 작고 가난한 땅 수원에서 난 복음을 위해 열정을 다했다. 큰 교회를 만들려면 서울에서 개척하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결코 수원을 버리지 않고 1966년 1월 1일, 수원 복음화를 위해 헌신을 다짐하며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이 교회가 지금은 1만5000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단 12명의 교인이 전부였다. 다 낡아 비가 새는 교회를 다시 짓고 성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증축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부지런히 전도하며 결코 수원 복음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원에 대한 사랑은 수원중앙침례교회 한 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더 나아가 수원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역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십대선교회(YFC), 굿뉴스클럽, 기독봉사회 등을 만들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수원기독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수원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없었기에 기독회관도 건축했다. 그밖에, 수원중앙유치원과 수원중앙양로원 개원 등 여러 가지 지역 봉사활동으로 수원을 위해 애쓰며 수원복음화에 전력을 다했다.

수원의 복음화를 위해 수원을 섬겼던 난 2004년 12월 19일 39년간 섬겼던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직을 고명진 목사에게 위임했다. 10여명 남짓한 교인들과 다 쓰러져갈 듯한 낡은 예배당이 전부였던 수원중앙침례교회가 지금은 수원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로 성장한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

난 귀국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 곧 내 고향 수원을 지키며 수원에서만 살고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수원을 품는 비전을 주셨다. 그리고 난 한평생 수원 복음화를 위해 뛰었다. 그 결과 수도권에서, 대한민국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2의 빌리 그레이엄이 되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셨다.

●김장환 목사

극동방송 이사장이며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인 김장환 목사는 세계침례교회 연맹(BWA) 총회장을 역임했다. 미국 밥존스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원과 사우스 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바이올라 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동백장과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국 십대선교회(YFC) 이사장과 세계 각 전도대회의 주 강사, 방송진행자 등의 중책을 맡고 있다.

정리=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