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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기존_ 자료3(수원관련)종합

[수원 탐방] 수원 화성 답사 ⑧

[수원 탐방] 수원 화성 답사 ⑧

세계로 뻗는 화성의 문, 팔달문과 장안문



수원 화성은 조선조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문화유적이다.

▲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현재는 보수 공사중이다. 사진은 2004년 8월의 자료이다.

수원 화성의 4대문은 남문은 ‘팔달문’이요, 북문은 ‘장안문’이다. ‘팔달(八達)’이란 그야말로 팔방 어느 곳이나 다 통한다는 뜻이요,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 팔달문은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 앞은 ‘성시(成市)’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전국을 수없이 돌면서 명당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 복원 전의 팔달문 모습. 1960년에 발간된 <수원의 역정>에 수록된 자료이다. 옹성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팔달문의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이곳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을 기점으로 화성의 거대한 계획을 수립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 시장 안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화성을 축조할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한다. 아마도 남문 밖에 성시(시장)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노역자들이 장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은 수원 상권의 중심적로 팔달문 인근에 7개의 시장이 몰려있다.

▲ 끊어진 팔달문. 팔달문은 문만 따로 서 있고, 성과 연결이 되지 않아 보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완벽한 방어의 극치 옹성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남문과 북문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헤 외부에 원형으로 쌓은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 이전의 자료를 보면 옹성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팔달문은 4대문 중에 화서문과 함께 누각 등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인 팔달문은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 현재 팔달문은 보수 공사중이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양 대문의 형태는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손꼽힌다.

▲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 였기 때문이다.

▲ 장안문과 옹성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를 비켜서 성을 쌓으라고 지시를 하였다.

▲ 옹성 위 통로.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이 된 장안문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것이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 가는 길목인 장안문, 남으로 가는 길목인 팔달문. 그 두 문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장안문인 북문은 이곳을 기반으로 북으로 한 없이 뻗어나가는, 문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뜻이 숨어있다는 생각이다. 팔달문 또한 이 땅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가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산 정조를 왜 우리가 ‘정조대왕’이라고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마도 그 마음속에는 더 큰 조선, 더 강한 왕권, 그리고 세상의 문물의 중심지인 화성을 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주성 국장(sw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