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인 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성이다. 또한 화성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으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둘레의 길이가 5,744m인 화성은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이 되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남아 있으며, 그 중 남수문은 현재 복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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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룡문. 화성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
자연의 시작 창룡문
수원 화성, 난 이 성을 바라볼 때마다 거대한 자연이란 생각이 든다. 인위적으로 축조한 성곽이긴 하지만, 한 곳도 자연을 거슬리게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을 하였다.
축성은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이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방을 ‘청(淸)’이라고 하는데, 그 청을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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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은 두꺼운 철판으로 감사 불에 타거나 공성무기에 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창룡문은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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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성 위에도 병사들이 이동하는 통로가 있어, 옹성 안으로 들어 온 적을 공격할 수가 있다 |
창룡문의 문루에 올라본다. 한편을 터놓고 둥글게 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옹성위로도 병사들이 이동을 하고 적을 공격할 수가 있어, 적이 성문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용이하지가 않다. 성벽 여기저기에는 뜨거운 기름등을 부어 성벽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옹성이 있어 성문을 깨트릴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쉽지가 않다. 하기에 성문 하나만으로도, 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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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문인 화서문의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동문인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든 것이 다르다. 화서문을 둘러쌓고 있는 서옹성의 제도는 동문의 옹성인 동옹성과 동일하며, 높이는 11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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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 안에서 바라본 화서문. 문 밖으로 옹성이 보인다. |
화서문은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화서문은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년 1월 8일에 완성을 하였다, 화서문은 서해안과 남양만 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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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은 앞 뒤 측면을 모두 펄판으로 보호를 했다 |
화성의 성문들은 자연이다. 사방으로 난 길을 따라 난 성문들은, 그 형태들이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네 곳의 문이 다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양 하다. 주변의 지형에 맞게 꾸며진 사대문. 그것 하나만으로도 화성에 쏟아 부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성곽인지 알만하다.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면서 참 잘 쌓은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늘어놓는다. 땀과 눈물, 그리고 그 성벽에 북진으로의 꿈. 그러나 끝내 이루진 못한 이산 정조의 눈물이 있어 안타까움이 더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