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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51)] 화성행궁의 맥(脈)을 잇고 있는 ‘삼정승 느티나무’와 현판-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51)] 화성행궁의 맥(脈)을 잇고 있는 ‘삼정승 느티나무’와 현판-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승인 2021.12.27 04:20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화성행궁 정조어필 원본현판. (사진=화성박물관)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 ‘조선읍성 철거 시행령’에 의하여 대부분 헐리게 된다. 일제는 화성행궁에 자혜의원과 토목관구, 수원군청, 경찰서, 학교를 건립한다는 미명하에 노래당과 낙남헌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화성행궁은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1796년 화성 축성이 끝나고 1801년 출간한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기적비문(華城紀蹟碑文)’에 화성축성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보호하고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화성행궁이 정조의 지대한 관심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갑자년설로 일컬어지는 1804년 임금 자리를 아들 순조에게 양위하고 화성에 와서 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건립한 궁궐이었다. 신읍건설 시기인 1789년 9월 신읍치 관아인 화성행궁의 동헌이 완공됐다.

장남헌 정조 친필 원본현판. (사진=화성박물관)

이듬해 2월 정조가 수원에 행차하여 장남헌(壯南軒)이라고 명명하고 친히 현판 글을 썼다. 그리고 화성행궁의 정전으로 삼았다. 이때 내사(內舍)는 복내당(福內堂)으로 짓고, 사정(射亭)은 득중정(得中亭)으로 이름 지었는데 모두 정조의 글로 같은 해 4월 14일 각 건물에 현판을 걸었다.

화성행궁 정문은 2층 누각으로 세워졌다. 누각의 명칭을 진남루(鎭南樓)라 칭했다. ‘수원은 도성의 남쪽에서 삼남(三南)을 아우르는 큰 고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남루의 현판은 신도시 건설을 담당한 수원부사 조심태가 정조의 명을 받아썼다.

진남루 현판은 소실되고 탁본 중 ‘진남’만 남았다. (자료=화성박물관)

1793년 1월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킨다는 하교를 내리고 어필로 쓴 화성행궁 현판을 장남헌에 걸게 했다. 1795년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열기 위해 화성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장락당과 경룡관·낙남헌·노래당·외정리소·서리청·집사청과 함께 여러 건물들이 증개축 됐다. 1789년에 지은 건물이 188.5칸이었는데 387.5칸이 확장되어 화성행궁은 576칸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봉수당 조윤형이 쓴 원본 현판. (사진=화성박물관)

정조는 회갑연에 앞서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고 했다. 이때 화성행궁을 봉수당으로 바꿔 부르게 하고 글씨는 당대 명필 송하(松下)조윤형(曺允亨)에게 쓰게 했다. 그리고 화성행궁의 정문을 진남루에서 신풍루로 바꾸고 조윤형에게 쓰게 했다. 낙남헌(落南軒) 또한 조윤형이 썼다.

낙남헌 조윤형이 쓴 원본 현판. (사진=화성박물관)

정조는 어머니가 머무는 전각을 장락당(長樂堂)이라 칭하고 정조 자신이 직접 글을 썼다. 경룡관은 조종현(趙宗鉉), 유여택은 유사모(柳師模), 노래당은 채제공(蔡濟恭)이 쓰도록 했다. 기타 전각과 문들의 현판은 누구의 글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성행궁과 화령전에는 40여개가 넘는 현판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장락당 정조 친필 원본 현판. (사진=화성박물관)

일제 강점기 화성행궁이 헐리는 과정에서 현판 모두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화성행궁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이 중요한 현판을 수습하여 중앙에 인계해 지금까지 남아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편액 6개와 시액 5개가 전해지고 있다. 정조가 쓴 장남헌, 화성행궁, 장낙당, 득중정 4점과 조윤형이 쓴 봉수당과 낙남헌 2점이 전해지고 있다.

득중정 정조친필 현판. (사진=화성박물관)

현판이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1975~1979년 화성복원공사 때다. 화령전과 운한각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복원됐다. 이때 화령전 재실인 풍화당 현판도 함께 복원됐다. 화성행궁 1단계 복원사업을 진행하던 2003년 국립고궁박물관에 수장하고 있던 6점은 원본을 탁본하여 복원했다.

신풍루 사진을 확대하여 제작한 현판.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현판 역시 이때 복원됐다. 당시 화성행궁 복원사업의 학술분야를 담당한 이달호 학예사(현 수원화성연구소장)의 증언에 의하면 조윤형이 쓴 현판이 남아 있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1910년대 촬영된 신풍루 사진에서 조윤형이 쓴 신풍루 현판글씨가 발견됐다.

사진이 너무 작고 흐릿해서 현판글씨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사진을 확대한 다음 조윤형 글씨의 특징을 살려 신풍루 현판을 제작했다. 현판제작은 MBC 미술부가 주관하여 복원했다. 그리고 2003년 경룡관(景龍館)과 노래당(老來堂)현판이 추가로 제작됐다. 경룡관 글은 가람 신동엽 선생이 썼다. 그리고 노래당은 죽사 박충식 선생이 썼다. 현판은 고원 김각한 중요무형문화재 106호 각자장 이수장(현 중요무형문화재 106호 각자장)이 제작했다.

경룡관 현판 가람 신동엽 선생이 쓰고 김각한 각자장이 제작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2단계 현판복원 사업은 화성사업소가 설립되고 1년 후인 2004년~2005년에 시행됐다. 이때 화성행궁과 화령전 궁중유물 복원·전시 고증연구 용역이 실시됐는데 김준혁 학예사(현 한신대교수)가 담당했다. 현판 복원사업 총괄은 김각한 각자장이 담당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의 나머지 현판복원이 추진됐다.

화성행궁 현판복원을 위한 사업대상과 기준이 정해졌다. ‘첫째, 현판복원은 화성행궁과 화령전의 전각 및 문에 걸려있던 현판 34개를 우선 대상으로 한다. 둘째, 현판 복원은 가능한 한 원형복원을 원칙으로 한다. 셋째, 학술적 고증에 입각한 복원은 문헌자료, 이미지 자료, 그리고 동시대 유사한 실물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단, 관련 자료가 없을 때에는 고증회의를 거쳐 복원작업을 추진한다’고 정했다. 현판복원 작업에 참여할 전문가가 정해졌다. 먼저 현판글씨 분야는 김문식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관, 현판 문양 및 크기 분야는 임영주 전 공예박물관장, 현판위치 분야는 정해득 경기도 기전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이 선임됐다.

현판 글씨분야는 동강 조수호, 소헌 정도준, 근당 양택동, 취송 정봉애, 백농 한태상 등 서예가가 위촉됐다. 서각은 철재 오옥진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고원 김각한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장이 위촉됐다. 단청은 양준태 단청장이 위촉됐다. 현판 복원 절차는 현판위치고증 → 글씨 고증 → 집자선정 → 현판규격 → 현판 문양 → 서각 → 단청 → 설치의 7단계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각 단계를 모두 만족하는 원형복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문제점 또한 존재했다. 현판복원 절차상 중요도 비중은 글씨와 서각방식에 비중을 두었다. 글씨(書)에서는 문헌상의 고증이 가능했다. 그러나 글자 선정의 단계에서 집자 가능성 여부를 철저하게 검토한 결과 서법상의 문제가 발생했다.

집자를 할 경우 대부분 문집이나 비문을 원본으로 해야 했다. 현판 글은 큰 글자의 서법으로 써야 하는데 문집과 비문은 작은 글(細筆)이기 때문에 현판 크기로 확대할 경우 오히려 본래 글씨의 격이 실추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집자 복원은 4개만 채택됐다.

노래당 정조 글을 집자해 제작한 현판, 중요무형문화재 106호 철제(銕齊)오옥진(吳玉鎭)각자장이 제작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2003년 제작한 노래당(老來堂)현판은 정조가 늙어 오겠다는 의미가 있는 전각임을 감안하여 정조어필 중 ‘대로사비’를 집자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어천문 역시 정조 어필 집자로 결정됐다. 삼수문은 조윤형 글 중에서 집자됐다. 경선문은 홍경모 글 중에서 집자되어 복원됐다. 나머지 현판은 위촉된 서예가의 글로 복원됐다. 화령전, 좌익문, 중양문, 공신루, 미로한정은 조수호 서예가의 글이 채택됐다.

운한각, 풍화당, 유여택, 복내당, 비장청, 서리청, 집사청, 기층헌, 외정리아문, 다복문, 득한문, 유여문, 지락문, 빈휘문, 향춘문, 경화문, 유복문, 구여문은 정도준 서예가의 글로 현판이 제작됐다. 남군영, 중약문, 가어문은 양택동 서예가의 글로 현판이 제작됐다. 장복문, 연휘문은 정봉애 서예가의 글로 제작됐다. 건장문은 한태상 서예가의 글로 현판이 제작됐다.

다음 작업은 현판 판각이 진행됐다. 화령전, 운한각, 좌익문, 중양문, 유여택, 노래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이 현판을 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복내당 등 29개의 현판은 김각한 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장이 현판을 제작했다. 그리고 단청은 양준태 단청장이 모두 완성했다. 그리고 2008년 개관한 화성박물관은 사라진 화성행궁 현판탁본 몇 점을 수집했다. 진남루 현판 중 ‘진남’ 탁본과 득한문·중영문·구여문과 삼수문 중 ‘삼수’가 남아있는 탁본을 소장하고 있다.

현판(懸板)은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를 말한다. 일명 편액(扁額)이라고도 한다. 편(扁)은 문호(門戶)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다.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한다. 즉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주는 의미이다. 현판은 전각(殿閣)의 얼굴이요. 전각의 상징물이기에 중요하다.

다행이도 행궁 앞에 삼정승을 뜻하는 품자형 괴목인 느티나무가 화성행궁을 지키고 있다. 또한 원본현판 6점과 시액 5점 탁본 5점이 남이 있어 화성행궁은 철거됐어도 이들이 화성행궁의 정통성을 이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참에 장남헌, 화성행궁 현판도 제 위치에 걸고 남아있는 탁본으로 현판을 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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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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