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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자! 미래유산] ①수원 ‘영신연와’, 국내 마지막 남은 호프만 가마식 벽돌공장

[지키자! 미래유산] ①수원 ‘영신연와’, 국내 마지막 남은 호프만 가마식 벽돌공장
-국내 유일한 ‘호프만 가마’
-투탄구·댐퍼조절장치 등 벽돌생산 전 과정 온전히 남아
-전문가들 "희소성·보존가치 높다"
-시민들 보존 운동 벌이며 공론화 앞장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현재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은 어느 정도 있을까. 경기연구원에서 2015년 조사한 <경기도 근대건조물 조사 및 관리방안>에 따르면 당시 547개의 근대건축물이 존재했다. 시설별로 살펴보면 교육시설 54, 군사유산 35, 산업기반시설 29, 산업시설 44, 상업시설 47, 업무시설 44, 종교시설 107, 주거시설 59개 등이다.

이후 경기도에서 2018년 조사한 <경기도 건축자산 목록 총괄표 및 기초조사> 자료에는 근대건축물이 총 430개로 집계됐다. 조사기관은 다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근대건축물이 사라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두 보고서의 책장을 넘기며 현존하는 건축물을 추려봤다.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이라 이들의 현존 파악이 다소 불명확했지만, 멸실된 건축물 외에도 우수건축자산으로 꼽힌 것도 꽤 많다. 이 중 건축물의 용도, 원형 보존 상태,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을 찾아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소개한다. 시작은 서수원의 산업문화유산으로 빼놓을 수 없는 벽돌공장 영신연와.

 
 
60년대 만든 '영신연와' 2021년 지금의 모습
 

 

▲수원 고색동에 위치한 1960년대 지어진 벽돌공장 '영신연와' 전경.

칼바람이 부는 궂은 날,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위치한 영신연와를 찾아갔다. 도착하니 아파트 15층 높이( 40m)의 기다란 굴뚝이 한눈에 들어왔다. 196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 생산 공장 영신연와의 굴뚝이다. 산업화 당시에는 이 굴뚝에서 연기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루 5만 장이 넘는 벽돌을 생산할 정도로. 여기서 만들어낸 그 많은 벽돌은 그 시절 주택·학교·공공기관 등 다양한 건물에 두루 쓰였다. 지역의 건축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자재였던 것이다.

공장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아봤다. 1992년 문을 닫았으나 현재 5천775 면적(건축물 1천902)에 가마터, 출하 창고, 무연탄 야적장, 초벌 야적장, 점토 채취장, 노동자 숙소 등 당시의 시설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러 업체가 공장 터를 임대해 쓰고 있어 어수선했다. 부지 한쪽은 건설회사가 건설장비를 두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고물상이 자리 잡았다. 벽돌 출하 창고로 쓰이던 공터는 중고 자동차 회사가 차량의 적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장이 자리한 일대는 진흙투성이다. 군데군데 얼음이 녹아 흙탕물이 고였고 신발에는 진흙이 가득 묻었다. 점토 채취장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니 그럴 만도 하다. 벽돌의 주재료가 되는 진흙이 풍부해 이곳에 공장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공장에서 점토 채취부터 생산까지 한 번에 이루어진 걸 실감케 했다.

▲가마터 입구에서 본 쇠잔한 모습의 호프만 가마. 슬레이트 지붕은 녹슬고 부서졌고, 건물 주변에는 각종 적치물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어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럽다.

신발을 털며 공장 뒤편으로 가니 가마터 입구가 나온다. 가까이서 보니 굴뚝을 제외한 공장 건물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듯 낡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험해 보였다. 살이 에일 듯 세찬 바람에 녹슬고 허물어진 슬레이트 지붕이 들썩이며 삐거덕~ 덜그럭~’ 스산한 소리까지 낸다. 멈춘 지 오래인 가마의 쇠잔한 모습도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 가마는 1858년 독일의 화학자가 개발한 호프만 가마. 연료비 절감, 대량 생산 등의 특징으로 소성기술의 혁신을 일으켰다. 현재 국내 유일하게 남은 것이어서 역사적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현정 수원과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호프만 가마는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설비다. 근대 시대를 대표한 건축 재료 생산으로 건설 기술을 알 수 있다. 또 현대 공장과 다른 외관으로 60년대 조형 미학이 있어 문화유산으로 희소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1. 공장은 현재 문이 굳게 닫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으로, 외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내부를 볼 수 있다. 2. 호프만 가마 상부 모습. 3~4. 석탄함. 5. 투탄구. 6. 댐퍼 조절장치.

지금은 가마 주변으로 각종 적치물과 폐기물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 전체적인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아마 벽돌공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그저 낡은 흉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속히 건물 보존을 위한 조치와 주변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내부도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모든 문이 막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외벽에 사다리를 놓고 가마 상부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석탄함과 투탄구, 댐퍼 조절장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 벽돌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불허전, 미래유산답다.

 

 

▲1. 4개 동이 나란히 있는 영신연와 노동자 숙소에는 아직도 3가구가 살고 있다. 2. 일본식 다세대 노무자 주택 '나가야' 처럼 기다란 형태의 영신연와 숙소 측면 모습. 3~5. 부서지고 깨지고 폐기물이 나뒹구는 숙소 골목. 6. 사람이 거주하는 듯한 숙소.

공장 건물에서 나와, 영신연와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숙소로 가봤다. 팔 뻗으면 지붕에 닿을 듯 야트막한 가옥이다. 공장에서 생산한 적벽돌로 지어졌다고 한다.  4개의 동이 종렬로 배치돼 있는 형태다. 한동마다 방 1, 부엌 1칸이 전부인 5평 남짓의 여러 세대가 좁고 긴 골목을 끼고 일자형으로 붙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나가야 주택과 유사하다. 1930년대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사용할 계획에 대규모 공장과 산업시설을 건설했고, 그에 따른 노동자를 수용하려 지은 일본식 다세대 노무자 주택이 나가야다. 따라서 영신연와 노동자 숙소는 구조나 시공방법이 근대 한국 노동자 주택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숙소는 황폐화된 모습이다. 부서지고 깨지고 폐기물이 나뒹군다. 그 누구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 당연히 아무도 살지 않겠거니 하고 들어갔는데, 몇몇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교적 멀쩡한 문 앞에 무언가를 담아 보관 중인 고무대야가 있고, 줄에 걸어 말리고 있는 나물도 보였다. 또 어느 집 입구에는 텃밭과 오토바이도 서 있었다.

▲현재 숙소에 남아 살고 있는 영신연와 노동자 이영식씨.

텃밭을 서성대니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곳에 묵고 있는 영신연와 노동자 이영식씨(70). 숙소에 홀로 살고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공장 폐쇄 후 다 떠나고 여기에 나랑 집사람, 그리고 다른 동에 두 세대가 더 살고 있다. 자녀들은 다 출가했다. 우린 이곳이 삶의 터전이고 갈 곳도 없다. 가능하다면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본래 이곳 노동자 숙소에는 50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비록 부엌 하나에 방 하나로 된 좁은 공간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시거나 자녀들과 함께 사는 세대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살던 숙소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새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은 세월이 가져다준 무게를 짊어지다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3가구만 남았다. 노후된 건물에서 여름엔 선풍기 하나에, 겨울엔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며. 남은 이들에게 영신연와 숙소는 어려운 형편에 맞춰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집인 셈이다.


▲현재 공장 부지는 민간인 소유로 여러 업체가 임대해 쓰고 있다. 부지 한쪽에는 건설회사가 건설장비를 두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다른 한쪽은 고물상이 자리 잡았다. 벽돌 출하 창고로 쓰이던 공터는 중고 자동차 회사가 차량의 적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신연와 같은 형태의 벽돌공장은 10여 년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수십 개 가량 있었지만 모두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영신연와 조차 존폐 위기에 놓였다. 2010년 민간이 추진하는 도시개발사업구역 내 포함돼 철거 대상물로 지정된 것.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몇 년째 수 백번, 수 천번 부쉈다, 말기를 반복한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벽돌공장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지키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학계를 비롯해 소수의 시민이 스스로 나서 영신연와 보존 운동을 벌이며 공론화에 앞장서고 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서동수 영신연와 보존 시민모임 대표(56) 이곳은 주택조합에 수용돼 있어 언제든지 아파트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라며 영신연와가 사라지면 서수원의 근현대 산업화를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이나 건축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유일하게 남은 벽돌공장을 지켜 지역의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벽돌을 굽던 가마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굴뚝, 노동자 숙소가 그대로 남아있는 영신연와는 서수원의 근현대 산업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건축물로 문화재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수원시도 시민 의견에 공감해 보존 방안을 찾고자 백방으로 뛰고 있다. 하지만 실제 보존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영신연와 건축물이 있는 부지가 사유지라 소유주가 건물을 헐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수원시 관계자는 영신연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도 될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 문제는 현재 민간인 소유라서 사유재산인 만큼 동의 없이 함부로 지정할 수가 없다. 이미 가치 조사, 기록화 사업을 해놓고, 도시개발 조합 측을 설득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막연히 보존하자는 목소리만으로는 설득력을 얻기란 어려워 보인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주민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벽돌공장 부지를 활용할 방안을 함께 고민하면 수원지역 도시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주민들은 영신연와 보존이 재개발에 마이너스 영향이 없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확신이 서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수원시가 도시 계획을 수립할 때 주민들에게 손해 가지 않도록 용적률을 보장해주는 방법이 있다. 공익을 위해 보존하는 만큼 벽돌공장 부지를 제외하더라도 주민들이 원하는 아파트 세대 수를 지을 수 있는 방침을 정해주면 되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고색동 일대 재개발 시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녹지를 지금 그려진 방식이 아니라 영신연와를 포함하는 쪽으로 대체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영신연와 부지를 공원으로 몰아주게 되면 보존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익도 추구하면서 도시개발사업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수원시 도시계획 위원회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일침 했다.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신연와. 산업화시대 대표적인 가옥 양식에서 외장재로 주로 사용하던 빨간 벽돌을 굽던 가마터는 후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보존만 된다면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도심 재생 사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의지가 남았을 뿐이다.

·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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