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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47)] 이병희의 수원화성 복원 이야기-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47)] 이병희의 수원화성 복원 이야기-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승인 2021.11.29 02:25

김충영 도시계획학박사

47-1, 장안공원에 세워진 수원성곽복원정화비.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 필체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정비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두 명을 꼽으라면 고 이병희 국회의원겸 제1무임소장관과 고 심재덕 수원시장이다. 이번 회에서는 먼저 이병희 제1무임소장관이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을 추진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으로 만들어진 조선 후기 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쇠락해갔다. 일제 강점기에는 의도적으로 화성행궁을 파손하고 성곽 또한 자동차 통행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4대문 옆을 철거해 도로를 만들었다. 남쪽에 시장이 형성되자 팔달문 양옆의 성곽을 철거, 도로를 개설한 것

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장안문과 창룡문, 성곽과 부속 시설물 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엔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국난극복 역사를 발굴하게 된다. 이어 1961년 10월 2일 문화재관리국을 신설했다. 1962년에는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했다.

1964년에는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이 수립됐으나 국가예산부족으로 한동안 추진되지 못했다. 1968년 7월 24일 문화공보부가 발족되면서 문화재관리국이 통합됐다. 이는 예술부문과 전통문화 부문의 업무가 일원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국난극복의 역사를 역점시책으로 펼치게 된다.

1970년대 들어서 문화재의 보호 및 복원·보수업무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문화재 사업의 초점은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에 맞춰져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사업은 이순신 장군 유적의 성역화 사업이었다. 1966년 4월 17일 문화재관리국에 현충사 성역화사업 추진지시가 내려졌다.

뒤이어 국난극복 유적 복원정화사업이 전개됐다. 이때 추진된 사업이 진주성 복원사업, 낙성대, 제승당, 칠백의총, 충장사, 윤봉길의사 유적, 행주산성, 강화전적지, 남한산성, 한양도성, 고창읍성, 홍주산성, 해미읍성, 문경관문 등이다.

수원출신 이병희 국회의원 겸 제1무임소장관은 당시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문화재 복원사업에 수원성곽복원사업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고심을 했다. 1973년 7월 이병희 장관은 당시 제1무임소장관실 행정사무관 임수복(전 경기도지사 직무대행)에게 지시했다.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보고서(경기도, 1973.11). (자료=화성박물관)

“임 사무관은 오늘부터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우리 수원성에 대한 역사공부를 철저히 하여 수원성 복원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에 따라 김병모교수(현 고려문화재연구원장), 최영희 박사(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자문과 수원의 향토사학자인 안익승씨 등과 함께 2개월여에 걸친 현장조사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계획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花山大孝園綜合計劃)’을 수립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목적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 근세사 상 문예부흥기 형성을 주도한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사상이 발현된 효의 상징적 문화재로서의 융·건릉, 용주사 및 수원일대에 산재한 문화재를 개발하여 이를 효역화(孝域化)하고 관광자원화 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효사상의 계발을 통하여 물질문명의 부산물인 퇴폐풍조에서부터 새 시대에 알맞은 국민의 정신적 윤리도덕관을 확립하여 애국애족 사상을 제고 하는데 있다”

1973년 11월 이 계획서는 김종필 국무총리의 결재를 얻게 된다. 이병희 장관과 김종필 국무총리는 육군사관학교 8기 동창이었다.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서 상단에 적은 지시문 “문공부장관은 본 계획에 의한 종합계획을 세워서 보고 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에 따라 당시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은 이병희 장관과 협의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보고서를 제출했다.

1973년 12월 청와대 오휘영 경제비서관으로부터 대통령 재가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이 때부터 수원성곽복원정화공사는 준비에 들어갔다. 수원성곽복원정화공사 추진은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의 주관 하에 이병희 제1무임소장관실과 경기도, 수원시와 긴밀한 협조 체계로 이루어졌다.

수원성곽복원설계 방침 보고서(경기도, 1973.2.28.). (자료=화성박물관)

그리하여 문화공보부가 시달한 지침에 의하여 1974년 2월 18일 경기도가 사업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서에 의하면 1974년 개략설계를 마치고 실시설계는 1975년 3월 12일까지 삼성건축설계사무소가 추진한다고 적고 있다. 사업 준비를 하던 1974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를 첫 방문했다.

당시 경기도 공무원으로 수원성곽복원사업에 참여했던 이낙천 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의 증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청을 방문할 때는 장안문과 팔달문을 거쳐 도청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 방문 때에는 장안문에서 방향을 돌려 화서문을 통해 팔달문으로 돌아 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팔달문에서 대기하던 기자단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당시 기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박대통령의 인상이 안 좋았다고 한다. 이는 1973년 12월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을 재가 한 것에 대한 진척 사항을 확인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 추진계획을 조속히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경기도에서 세부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보고서(경기도, 1974.7.24.). (자료=화성박물관)

1974년 7월 24일 수립한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에 의하면 성곽과 주변 현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추진방침을 3개 부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성곽복원 보수 방침이다. ‘복원이 가능한 중요시설을 전면 복원, 퇴락된 성벽을 보수해 수원성을 원래의 면모로 재현한다.’

둘째, ‘성곽주변정화사업은 성곽보호구역내의 사유지를 매입하고 민가를 모두 철거 이주시킨다. 보호구역은 성벽이 부각될 수 있도록 규모있게 조경한다. 성곽외측을 순환하는 관광도로를 개설하고 성곽내측에는 성곽을 따라 성역을 일주할 수 있는 보도를 개설한다. 중요시설 지역에는 간이주차장 시설과 관광휴식을 위한 시설녹지를 조성한다.’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 공구분할도(경기도, 1974.7.24). (자료=화성박물관)

셋째로 추진단계를 설정했다. ‘본 계획의 시행은 성역을 중요도와 시급성 및 투자효과에 따라 5단계 권역으로 구분하여 5개년 계획으로 추진한다. 제1단계 장안문~서장대구간, 제2단계 서장대~팔달문 구간, 제3단계 화홍문~창룡문 구간, 제4단계 장안문~화홍문구간, 제5단계 창룡문~동남각루 구간으로 구분했다.’ 팔달문 양옆의 끊어진 부분은 수원시의 반대로 복원계획에서 제외했다.

이 계획서는 문화공보부가 수정보완해서 육영수 여사 서거 하루 전인 1974년 8월 14일 극적으로 결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사업비는 26억5000만원으로 국비 14억7900만원, 지방비 11억 7100만원으로 계획됐다.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은 경기도에 문화재과 산하에 수원성곽복원정비사업소를 설치해 복원업무를 주관했다.

수원성곽복원보수공사 기공식 모습. (사진=마당발정치인 이병희평전 중에서)

수원성곽복원보수공사는 실시설계가 완료돼 1975년 6월 7일 장안문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와 조병규 경기도지사, 이병희 국회의원, 이재덕 수원시장과 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수원성곽복원사업은 1979년 9월에 공사가 마무리돼 준공행사는 1979년 10월 27일 장안공원에서 수원성곽복원정화비 제막식을 거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져 준공식을 치르지 못했다. 필자는 1979년 8월 9일 수원시 도시과에 발령받아 장안공원 마무리작업에 참여해 당시 사정을 기억하고 있다.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 준공식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참석, 1979년 11월 29일 장안공원과 서장대에서 갖게 됐다.

47-7, 서장대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께 보고하는 모습. (사진=마당발정치인 이병희평전 중에서)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은 착공 4년3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공사비는 당초 국비는 14억7900만원이 계획됐으나 12.6%가 증가한 16억6600만원이 들어갔다. 지방비는 11억7100만원이 계획됐으나 38.3%가 증가한 16억2000만원이 들어가 총사업비는 32억8600만원이 들어갔다.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은 수원의 걸출한 정치인 백웅(白熊) 이병희(李秉禧)의 고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이 기초지방자치단체 중에서 선두에 서있는 것 역시 이병희의 노력이 기초가 됐다.

만석공원에 세워진 이병희 선생 동상. (사진=김충영 필자)

이병희는 1926년 용인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다녔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장교로 임관, 5.16에 참여한 이후 38세에 국회의원이 된 뒤 경기도청 유치사업에 뛰어들어 첫 번째 과업을 완수했다.

이후 삼성 이병철 회장을 설득해 삼성전자와 성균관대학교를 수원에 유치했다. 그리고 연초제조창과 한일합섬을 유치했다. 그리고 공설운동장 조성에 힘을 썼으며, 한강물을 수원까지 끌어들이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 평전. (자료=이병희 평전 표지)

당시 실무를 맞았던 임수복 사무관(전 경기도지사 직무대행)의 회고에 의하면 수원을 '효원의 도시'로 만들고자 고심했다고 한다. 이병희는 수원의 미래를 생각했던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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