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트북]수원과 이병희 / (2)= 이병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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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1) [노트북]수원과 이병희 |
(2) 이병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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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트북]수원과 이병희
신지영 발행일 2020-09-21 제19
이병희(1926~1997) 전 국회의원이 작고했을 때 그 묘지 앞에서 목 놓아 통곡했던 경찰관이 승진했다는 풍문이 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높은 분이 애향심이 있는 공무원으로 봐 그렇게 조치했다는 얘기다. 어디까지나 풍문이지만 이 에피소드는 고 이병희 의원이 수원 지역에 어떤 의미의 인물이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어떤 도시는 어떤 인물을 얘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수원과 이병희가 그렇다. 이병희는 수원에서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수원시민들은 박정희 군사쿠데타의 군벌 출신인 그를 1963년 6대 국회에 입성하도록 선택해줬다. 같은 군벌인 유승원이 인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이 둘은 박 전 대통령에게 각각 인천과 수원으로 경기도청을 이전해달라고 건의한다. 결의를 보여준다고 삭발한 이병희는 박 전 대통령과 담판해 경기도청 수원 이전을 성사시켰다. 삼성 수원공장 설립, 성균관대학교 수원 유치, 화성성곽 복원 등 지금의 수원을 있게 한 굵직한 일에는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경인일보 본사 수원 이전의 숨은 세력이기도 하다. 60년대 후반 사장이 옥살이를 하며 경영진이 공백이던 시기에 신문사에 돈을 댈 발행인을 섭외하고 본사를 이전시킨 뒷배가 바로 그였다. 또 선경직물이 군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운 막후이기도 했다. 6·7·8·9·10·13·15대 국회의원. 중간중간 빈 숫자는 그가 걸어온 길이 순탄하지 않았으리란 걸 짐작케 한다. 군벌이었으나 신군부에선 부정축재자로 몰렸고 주먹계 거물 김두한·남경필 전 지사의 아버지인 남평우와 겨뤄야 했으며 자민련 소속으로 어렵게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이병희 평전이 곧 출간된다. 저자는 경인일보 4·5대 편집국장이었던 이창식 국장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원이란 도시를 쥐락펴락 한 장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과 그늘은 있을 것이나 그것 역시 이병희를 알아야만 논할 수 있을 터. 일독을 권한다. /신지영 경제부기자 sjy@kyeongin.com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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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병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2045&cid=46626&categoryId=46626 terms.naver.com [ 李秉禧 ] 네이버 인물정보 옮김
정의 해방 이후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국회의원, 국회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개설 본관은 성주(星州). 아버지는 문순(文淳)이다. 경기도 용인 출생.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5ㆍ16군사정변의 핵심 인물 가운데 1인이다. 6·7·8·9·10·13·15대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6년 8월 1일 경기도 용인의 빈한한 농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6년 삼일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49년 8기로 졸업,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1958년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중국문화학원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3년경희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군에서는 정보계통(육군특무대)에서 오래 근무하였으며, 5·16군사정변 이후인 1962년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을 때 서울시 지부장을 지냈다. 김종필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그 후 줄곧 정치적 행로를 함께 하였다. 1962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여 공화당 창당에 참여하고, 이듬해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공화당 공천으로 수원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7·8·9·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 공천으로 연속 당선되었고, 1980년 신군부 집권하에 정치규제로 묶였던 11·12대를 제외하고, 13·15대까지 지역구에서만 7선을 기록하였다. 의원직 재임 중 여러 당직과 국회의원직 및 내각에서도 활동하였는데,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민주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과 원내 부총무를 거쳐, 1964년부터 1996년까지는 아세아자유청년연맹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9년에는 국회운영위원장을 역임하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제1무임소장관을 지냈으며, 1971년부터 1980년까지는 한일의원연맹을 창설하여 간사장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는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당무위원과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지내고, 1976년에는 민주공화당 중앙위 의장을 거쳐, 1979년부터 이듬해까지 같은 당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가, 1984년에 해금되어 1987년 김종필 등의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해서 수석부총재 및 경기지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88년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뒤 1990년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할 때 이에 참여하여, 1992년부터 1994년 사이에 경기도 수원 장안지구당위원장·당무위원·상무위원회의장 및 총재상임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95년에 김종필이 민자당에서 이탈하여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할 때 그 역시 행동을 같이 하여, 총재상임고문과 수원 장안지구당위원장 및 경기도지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공천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월 13일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1964년에 대한농구협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1980년까지 연임하면서 한국농구발전에 기여하였다. 1965년 아주농구연맹 부회장을 지내고, 1967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71년 아세아농구연맹회장 겸 세계농구연맹 부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1980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등 체육관련 직책을 겸임하였다. 추모 및 상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등체육훈장과 1등근정훈장을 받았으며,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대원경성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중국(中國)과 장총통(蔣總統)』(이병희, 제일문화사, 1968) 「일·소 외교에 있어서 갈등과 협력에 관한 연구」(이병희, 경희대 박사학위논문, 198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http://www.history.go.kr) 조선일보 인물정보(http://www.chosun.com)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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