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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수원의 형용사-아름다운 버드내 - 이해균 화가, 해움미술관 대표

[문화와 삶] 수원의 형용사-아름다운 버드내 - 이해균 화가, 해움미술관 대표

코로나19는 정신적 제약뿐 아니라 생활 패턴마저 바꿔 놓았다. 내가 다니던 피트니스 클럽도 확진자가 발생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던 운동마저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던 문화센터 강의도 오랜 중단 상태이다. 무엇보다 습관화된 운동을 할 수 없는 게 잊히지 않은 연정처럼 고통스러웠다.

대신 일상적 운동 하나를 생각해 냈다. 집에서 작업실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이른 아침 걷는 기분도 상쾌하고 조금만 나가면 수원천이 놓여있어 사색하기에도 금상첨화다. 버드내라 불리는 세류사거리에서 매교까지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이 길은 정조임금께서 능행차 가시던 정조로를 철길의 평행선처럼 끼고 있다. 냇물은 맑고 군데군데 잉어도 보이고 물고기들이 파열음을 내며 튀어 오르기도 한다. 오리는 요즘 귀여운 새끼들을 여럿 거느리고 물위를 종종걸음 친다.

하지만 풀물 든 물가에 누군가 물고기에게 뻥튀기 과자를 던져 놓아 일부는 구정물이 되었다. 제발 자연을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 세류동을 지나는 풀숲에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가 보인다. 그는 이곳에 살다가 나환자가 되어 떠났다. 보리 익는 단오가 가까우면 보리피리 불던 옛 생각도 난다. 수원은 버드나무가 들어간 지명이 유독 많다. 방화수류정, 세류동, 유천파출소 등이 그렇다. 버드내는 싱그러운 실버들이 아직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다. 버드나무는 이른 봄 연둣빛이 가장 아름답고 짙은 녹색 가지가 휘늘어진 여름날도 융성하다.

하지만 이 멋진 버드나무는 언제부턴가 꽃가루 알레르기의 주범이 되어 제거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년 된 고목들이 한꺼번에 잘려나갔다. 농대 앞 진흥청 주변과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의 버드나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버드내의 수양버들은 길고 울창한 가지를 흔들며 군데군데 살아남아있으며 물가에 치솟은 수초들 또한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둑 아래의 관목들은 수시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스포츠형으로 나란히 삭발 당하고 있지만 말이다.

형형색색 다양한 꽃과 식물도 마음을 정화시켜 주지만 가끔 보이는 뽕나무와 오디는 그윽한 향수가 있다. 떨어진 오디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자주색 핏자국을 유서처럼 남긴다. 문득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하교 길엔 뽕나무 밭에 가서 입가가 시커멓도록 오디로 배를 채우곤 했다. 오디를 한 다래끼 따다 공판장에 팔기도 했는데 잉크향이 밴 빳빳한 새 지폐로 값을 쳐주어 무척 행복했었다. 냇가 둑 위에 거꾸로 가는 시간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되돌아가는 시계의 이미지가 함께 걸려있다. 참 엄숙하다. 방울땀이 맺힐 때 노란 자전거라는 카페가 보이는 매교동으로 오른다. 노란 자전거, 이 카페에서 지난여름 멋진 제자와 함께 냉커피와 버드와이즈 한잔으로 갈증을 풀었다. 그때 마주한 경쾌하고 시원한 맛, 지울 수 없다. 늘 빈약하고 안일했던 매너리즘 속에서 사람은 가고 추억만 남았지만, 나는 40년째 이곳 교동에서 그림 노동자의 삶을 옮기지 못하고 있다. 혹시 모른다. 이 버드내에서 내 일생 가장 뚜렷한 황혼을 지나며 기억할 만한 추억하나가 머무를지도. 이런 시의 은유를 삭인다.

-꽃이/피는 건 쉬워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중략)그대가 처음/내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중에서

이해균 화가, 해움미술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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