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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삶] 미술관 옆 성곽 길 - (이해균 해움미술관장)

[문화와삶] 미술관 옆 성곽 길 - (이해균 해움미술관장)

이해균

기사입력 2020.06.18 21:41

최종수정 2020.06.18 21:41

장미가 붉은 몸을 비틀며 마지막 욕정을 불태우고 있다. 겹겹이 속 깊은 꽃잎은 첫사랑처럼 설레고 순수하다. 많은 화가들이 이 꽃을 한번쯤은 그렸고 연인에게 지인에게 축하의 마음을 심기도 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멀리서 온 연인에게 주려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천국으로 이송 되었다. 릴케는 죽기 1년 전 운명을 예감한 듯 장미를 의인화한 묘비명을 썼고 사후 실제로 비에 새겼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수많은 눈꺼풀 아래/누구의 잠도 아니라는 기쁨이여 -장미뿐 아니라 찔레꽃, 접시꽃, 작약, 자운영도 늦봄의 향훈을 전한다. 봄이 벚꽃, 목련 등 관목에서 꽃을 피웠다면 초여름은 교목이 피워낸다. 먼 뽕나무 밭에서 오디 떨어지는 소리 들리는 호시절, 코로나19에 지친 마음이 아니더라도 이런 계절이면 걷고 싶어진다. 오월 한 달간 전시한 나의 개인전은 별도의 오프닝을 알리지 않았다. 코로나19의 부담 때문이다. 대신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그림 보러 오라고 소식을 올렸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참석하는 이변을 낳았다. 유추하건데 코로나에 유폐되었던 답답함을 풀어 보려고 스스로 소환되었을 것이다. 비록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저녁 한 끼 같이 먹자했던 것은 허구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빈병이 박스에 가득 널브러질 때까지 장시간 잔을 나눴다. 뿐만 아니라 여력 있는 주객들은 2차 3차 자리를 옮겨가며 달아오른 기분을 불태웠다는 후문이다. 많이 우려가 되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대학원 동기생 두 분이 찾아왔다. 그녀들은 나의 권유대로 낮 시간에 찾아왔다. 전시를 관람하고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수원성을 한 바퀴 돌고 같이 식사하자고 제의했다. 흔쾌히 동의하여 팔달산으로 향했다. 고인돌을 지나 아름다운 화양루에서 다시 서장대까지 올랐다. 확 트인 시야에 수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런데 이분들 좀 채 내려갈 생각을 않고 전망에 도취되어 있었다. 성 밖에 40년을 살았어도 수원화성을 다 돈 것은 열손가락 안팎일거라 생각된다. 아카시아 향기는 오월의 동화처럼 오랜 기억을 불러오고, 산허리엔 군데군데 들장미도 흐드러졌다. 화서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가는 길은 폭신한 잔디가 발걸음을 띄우는 듯 사뿐했다. 그녀들의 초행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듯 즐겁고 행복해 보여 기뻤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오늘은 반만 돌기로 하고 행궁을 지나 지동시장으로 향했다. 시장하여 시장 안의 순대국밥 집을 찾아갔다. 토종 뚝배기에 담긴 순댓국과 깍두기는 가장 간소하고 익숙한 조합이지만 자리에 따라 가치가 틀리다.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니 옛 선비의 주막집 분위기다. 지난시절을 도란도란 얘기하는 시간 앞에 또 다른 내일이 궁금했다. 세월은 빠르고 봄날은 짧고, 우리는 꽃잎처럼 가파르게 시들어 가리라. 부근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나누며 봄밤을 아끼는 사이 밖은 벌써 어둠이 내렸다. ‘잘가요’, ‘즐거웠어요’ 밤길을 돌아오며 나는 문득 이런 시를 생각해 냈다.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사랑이 올 때/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봉숭아 꽃물처럼 기뻐/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신현림 ‘사랑이 올 때’

이해균 해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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