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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장동민·백석대 교수(교회사)

입력 May 09, 2020 05:29 PM KST

"네 잘못이 아냐"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재난이 닥칠 때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동차 접촉사고를 낸다든가 자녀가 감기에 걸린다든가 하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이게 하나님이 나에게 벌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를 돌아보곤 한다. 하물며 세계적인 대재앙이 닥쳤는데 이를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코로나19와 같은 위중한 사태를 맞아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인기가 없는 일이다. 우선 '심판'이라는 말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실직을 당하고 경제가 어렵게 되었는데, 위로와 용기를 주지는 못할망정 심판이라니. "네 탓이 아냐"(It's not your fault.),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고객의 말은 무조건 옳다" 등과 같은 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말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건 마치 전광훈목사가 문재인대통령을 심판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신(神)의 심판을 빙자하여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미신적인 종교가들의 뻔한 술책 아닌가. 아니면 종교적 두려움을 이용해 교세를 늘이려는 공포 마케팅이든지. 최초에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코로나가 중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수원의 한 교회 목사도 그렇게 설교했는데 다음 주일에 그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문득 20만 명이 사망하였던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한 목사가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해서 공공의 적이 되었던 일이 생각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도 파늘루 신부(神父)가 페스트 창궐이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회개하라고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도 어린아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하나님의 심판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는 실존주의자답게 대재난의 시대에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신(神)을 끌어들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하였다. 대신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한 개인들의 희생적 결단과 연대,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를 대답으로 제시한다. 카뮈의 제안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꽃을 피워 지금 우리 사회 대다수의 지성은 전문 과학과 공동체의식의 결합이 대재난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믿는다.

신학자들도 대체로 이 방향을 취한다. 신약학자 N. T. 라이트의 최근 코로나 사태에 관한 인터뷰를 시청하였다. (https://youtu.be/tUTD0S9YVuU) 질문자가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이런 팬데믹을 허락하셨느냐고 질문하며 이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대답을 들려달라고 하였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언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사건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이기기 원하신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만물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의 탄식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볼 때 코로나19 사태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주제 넘는(presumptuous) 행동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Photo : ⓒ장동민 교수 페이스북 갈무리)

▲피터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 1563

그러나 나는 뭇매 맞을 각오를 하고 인기 없는 말을 하련다. 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맞는 것이다. 만일 세상을 다스리는 신(神)이 실재하고, 그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분이라면, 이 세상을 심판하고 벌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의 구원도 무의미하게 된다. N. T. 라이트는 심판을 이야기하지 말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탄식하자고 하였는데, 따지고 보면 탄식의 이유와 심판의 이유는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고,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왕과 신들을 벌하였으며, 가나안 7족속을 심판하였고, 마침내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 특별히 전염병은 하나님의 징벌의 도구로 자주 사용되었다. 구약에 이어 신약도 마찬가지다. 그는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분이며(눅1:51-53),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관하는 분이다.(눅12:6)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임을 여러 차례 경고하셨고(눅13:1-5), 예루살렘이 그 죄악으로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눈물을 흘리셨다.(눅19:41) 사도행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마리아의 무당 시몬, 그리고 사도들을 박해한 헤롯 아그립바 1세 등.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다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심판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더 많은 부분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3:17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얻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를 통한 구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의 잘못과 실수로 빚어진 재난일 뿐, 신(神)의 개입이 없이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자연재해(지진, 한발, 홍수, 메뚜기 등)나 재판(裁判), 사고, 전쟁과 같은 인간 행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예컨대 일반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를 바벨론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과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몽둥이로 바벨론 제국을 사용하셨다 한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하나님은 나와 내밀한 대화를 나눌 만큼 격의 없고 친밀한 분이다가 도무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타자(他者)로 돌변하신다. 그는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빠와 같은 분이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빼앗는 대적이 되곤 하신다. 그는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다가 어느 순간 앞뒤좌우를 보아도 찾을 수 없도록 숨어 버린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둥지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다른 한 편 우리의 편안한 둥지를 흐트러뜨려 편히 쉬지 못하게 하신다.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지만 동시에 불과 같은 맹렬한 분노를 품고 계시는 무서운 심판자다. 그의 한 손은 모든 죄인을 받아주는 못 박힌 손이며, 그의 다른 손은 세계를 진멸하기 위한 역병(疫病)을 들고 있는 손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심판자라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은 우선적으로 택한 백성들을 향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자라고 말할 때 본능적으로 심판의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 습관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편이고, 믿는 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기적을 베풀어 박해자를 심판하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개혁신학자 존 파이퍼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그리스도』 (Coronavirus and Christ)라는 책에서 개혁주의자답게 코로나19 사태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담대하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파이퍼는 그 책을 설명하는 영상에서(https://youtu.be/05hSo5zWu7c) 누가복음 13:1-5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인간은 회개해야 한다고 올바로 말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그 심판의 대상은 중국 당국이며, 심판의 이유는 기독교인을 박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영상이 포스팅된 때는 2020년 3월 15일이었는데 중국의 확진자 숫자가 최고에 달하였을 때였다. 그러나 이후 중국은 완만한 커브를 그리면서 누그러졌고 미국은 확진자 숫자가 급격히 늘어 중국의 수십 배에 이르렀다. 파이퍼는 이제 미국이 심판을 받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파이퍼가 증거 구절로 든 누가복음 13:1-5 이야말로, 회개의 대상으로 다른 사람을 지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함을 말씀하신 구절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비롯한 인근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번성케 하는 이스라엘의 부족 신(神)이 아니다. 그는 온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의 정의로운 통치를 보여주려 함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 부족들을 심판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신다. 다윗과 같은 권력남용의 죄를 지은 독재자가 주변 나라들에 많았겠지만 다윗을 특별히 무섭게 다루신 것은 그에게 거신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에스겔 9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무서운 천사가 먹과 붓을 들고 예루살렘 성을 순찰한다. 그 성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 때문에 탄식하고 우는 사람의 이마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동그라미가 없는 사람은 칼로 쳐서 죽였다. 그런데 그 살육의 출발지가 바로 예루살렘의 핵심인 성전이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장로들부터 이마에 표시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후일 베드로는 에스겔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썼다.(벧전4:17)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성도들은 심판의 대상을 외부에서 찾기를 멈추어야 한다. 중국, 신천지, 해외입국 유학생, 동성애자, 정부... 희생양을 찾아 차별과 혐오를 쏟아 붓는 미성숙한 행태를 그치자. 그렇게 함으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자. 하나님 심판의 대상은 한국의 교회이고, 교회의 일부인 나다.

당신의 백성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그 진노를 자기 몸에 담당하려는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전염병을 옮기는 천사를 본 다윗의 기도다.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대상21:17) 또한 폭풍 속에서 요나의 고백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1:12)

심판의 복잡성

자연재해나 인재(人災)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재해들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임한다는 데 있다.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처럼 히브리인을 피하여 이집트인에게만 임한다면, 혹은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임한다면, 누구나 쉽게 하나님의 징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심판은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코로나19는 계층과 인종과 종교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골고루 전염된다. 진정한 의미의 '팬데믹'(pandemic)이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천지불인'(天地不仁), 즉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규정할 수 없다는 사상이 더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여기 성경적 심판의 두 번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차원을 가진 복잡한 것이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무심하게 모두에게 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심판자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아예 심판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복잡한 것이다.

사회가 덜 복잡하고 지성이 덜 발달된 시대에 성경이 쓰여 졌기 때문에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였다고 속단하지 말자. 성경은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생각 없는 미개인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맨 처음 항변이 창세기에 등장한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 소돔성(城)을 불로 멸망시키면 그 안에 사는 의로운 사람도 함께 죽을 것을 염려한 항변이다. 엘리야 시대 3년 6개월의 한발은 악한 왕과 왕비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저주가 이루어져 가난한 백성들이 맥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엘리야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바벨론의 침공으로 악한 왕조와 더럽혀진 성전에 심판이 임할 때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유아들과 그 어미들의 원한은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성경은 이런 질문들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심판을 거론할 때는 칼로 무 자르듯 명백하고 단순한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는 곳이며, 심판의 때에 순진한 사람들도 함께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성경의 저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내어 죄 없는 사람에게 닥치는 재난의 의미를 설명해 줄 현자(賢者)가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놓치지 않도록 도와줄 인도자가 있는가? 이 모순의 역사를 이끌고 가는 하나님이 선의를 가진 전능자임을 변호해 줄 사람이 있는가?

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를 돕는 이들이다!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혼돈스런 심판의 한 가운데서 함께 고통하며 역사의 의미를 찾아가는 예언자들, 광맥을 찾아 지하를 헤매는 광부들처럼 고뇌의 심연 속에서 신의 실존을 추구하는 지혜문학가들, 짐승 같은 권력자와 거짓말의 영이 결탁한 바벨론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따르는 묵시문학가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 사랑과 질투의 하나님을 몸으로 보여주시고, 죽음의 세력 앞에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고, 희생을 결단하는 통곡의 제사를 올렸으며, 자신의 몸에 심판을 쏟아 부어 악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앞서 말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영 안에서 그들에게 빛을 비춰주신 분이고 예수님에게 충만히 임하셨던 분이다.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달라고 간구할 때, 성령은 다시금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혼돈의 세상에서도 믿음의 삶을 살 분별력과 용기를 주시는 가르침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심판의 다차원적 의미, 그리고 나에게 주시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우리의 영 안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우리는 그의 신음소리에 동참한다. 나와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21세기 세계에 주시는, 형벌과 징계와 통찰력과 지혜와 인도와 위로와 안식을 경험하게 하신다.

심판은 숨은 것을 드러낸다

세 번째 하나님 심판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심판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징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숨겨진 치부를 드러나게 하는 목적도 있다. 몸에 병균이 침투하면 몸의 가장 약한 곳이 고통을 받으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험을 치게 되면 학과의 가장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드러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그 사회의 타락하고 고통 받는 영역이 어디인지 밝혀진다. 예컨대 다윗의 범죄로 인한 심판은 다윗과 그의 가문에 대한 징벌이지만, 동시에 이 심판을 통하여 다윗 왕국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정실에 의한 통치, 정치세력들 간의 권력투쟁, 백성들의 아픔을 돌보지 않는 고관들, 간신배들의 말의 성찬, 왕의 눈에 들기 위하여 경쟁하는 제사장들, 해묵은 지역감정, 후계 구도를 둘러싼 암투 등등...

코로나19 사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방역에서 뜻밖에 선진국임이 드러났다. 어렸을 적부터 "이게 나라냐?"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등의 자조 섞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서구 선진국을 선망하던 우리 나이 세대는 지금 국뽕에 흠뻑 취해 있는 중이다. 우리가 어떻게 방역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를 즐거움으로 읽는다. 의료진의 헌신, 검사 키트의 신속한 개발, 위치추적 기능이 있는 IT 기술, 방역당국의 공격적인 검사, 성숙한 시민의식, 정부의 역할 등이 결합된 결과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뒷받침도 있었다. 주기적인 정권교체, 공동체의식과 개인주의의 적절한 조화, 실력 있는 공무원들의 자긍심,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촘촘한 그물망,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국가주의 등이다. 방역에 실패한 나라들은 대체로 이런 사회적 자본이 하나나 둘씩 결여되어 있다.

원래 비관주의자인 나는 우리 방역 성공의 기반이 생각만큼 탄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여러 조건들이 만나서 이렇게 된 것일 뿐, 앞으로 다가올 여러 가지 자연적·사회적 재난에 대하여 코로나19처럼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의심한다. 코로나19와 진보 진영의 총선 승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하였다. 출생률, 자살률, 행복지수, 청년실업률 등 모든 주요 지표에서 대한민국은 OECD 국가들 중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손꼽히는데, 이게 나아졌다는 보고를 읽은 일이 없다. 작년 1년 동안 보수와 진보 양진영에서 각각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상대를 부정하는 집회를 열만큼 국론이 분열되어 있다. 학교와 대학과 군대와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이 보편화되었고, 외국인과 한국남자와 페미니스트와 노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불만 붙이면 활활 타오른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언제 재개될지 모르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국익과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코로나 방역의 성공이, 하나님이 진노 중에서도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겨 시간을 벌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승리를 자축할 때가 아니다. 이른바 K-방역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회적 자본을 점검해 보고, 그 자본을 우리 사회의 긴박한 문제를 위하여 전용하기 위하여 서둘러야 할 때다. 사회적 자본을 결여한 다른 나라들의 방역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가 그런 사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나라는 잘 몰라도 미국에서 몇 년 살아 본 경험이 있으니 미국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궁핍한 유학생 시절이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인종이 함께 사는 필라델피아 시티에서 살았다. 필라델피아의 대표적 슬럼가인 사우스필리의 세컨스트릿에 가끔씩 갈 일이 있었다. 백년이 넘은 낡은 로우하우스(수십 개의 집이 붙어 있는 연립주택), 바람에 뒹구는 쓰레기, 불결한 위생 상태, 여름이 되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통을 벗은 채 담배를 피우고, 밤이 되면 랩뮤직을 크게 튼 컨버터블이 질주한다. 누가 사는지, 누가 마약을 하는지, 누가 총에 맞아 죽어 나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상관도 하지 않는다. 경찰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행정력이 미칠 리가 없다. 이런 슬럼가가 있는 대도시에서는, 그리고 그런 대도시가 있는 나라에서는 결코 바이러스를 잡을 수 없다.

우리나라도 코로나19 시대에 임금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열악한 환경에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는 클러스터들이 존재한다. 집단감염이 일어난 구로구 콜센터나 젊은 신천지 교인들이 사는 임대주택이 대표적이다. 중산층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우리도 슬럼가가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극심한 빈부차이는 가난한 사람 뿐 아니라 부자의 생명도 위협한다. 방역의 기술과 시민의식과 사회적 자본으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에 착수해야 할 때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포스트코로나 시대 달라질 그리고 달라져야 할 세상의 모습에 대하여 세계적 석학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한다. 발 빠른 방송사와 신문사에서는 특집 시리즈를 내보내고, 벌써 책을 발간하는 학자들도 있다. 각자 자신들이 세상을 보던 눈을 가지고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예견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세계화와 국가주의, 과학과 미신, 신자유주의와 보편적 복지, 차별과 연대, 전체주의와 민주적 시민의식, 개발과 생태주의 등, 우리 시대의 문제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등장한다. 기독교에서도 내놓을 대답이 있을까? 세계적 석학들의 제안에 편승할까? 혹은 그 제안들을 실천할 동력을 제공하는 것에 만족할까? 세계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기독교만의 독특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리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적 원리를 가지고 상황을 이해하고, 세상과 대화하여야 한다. 석학들의 대답 가운데 성경의 원리와 일치하는 것을 취하면서, 그 무신론적 기반을 비판할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한국의 교회가, 아니 미국식 복음주의 교회가, 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온라인 예배 논쟁에 매몰되어,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세상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그 세상 속에서 생존을 위협 받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더욱 안타깝다. 자 이제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자.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말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날들이 손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이 나이가 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세상의 많은 학자와 저술가와 논설위원과 진보적 평론가와 종편 패널과 보수 유튜버와 승려와 목사와 점쟁이들이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논평할 때, 자신의 잘못은 쏙 빼놓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주장이 그들과 그들이 속한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이들의 말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볍기만 하다. 그들의 훈수에 나의 영혼과 삶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믿는 성도들이 가지는 한 가지 이점이 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죄악들은 겨울잠 자는 뱀처럼 서로 얽혀 있고, 내 안의 죄악은 땅땅 뭉친 기생충처럼 꼬물거리고 있다. 나는 작은 우주이고 작은 대한민국이다. 만일 내가 내 안의 기생충 덩어리를 끊어 헤쳐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지닌 셈이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 아래서 탄식과 통곡으로 자신 속에 있는 죄악을 끊어냄으로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줄 자 누구인가.

※ 이 글은 장동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