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 글은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두 가지 배경을 설명한다. 하나는 정치공학적 배경이고 또 하나는 개인심리적 배경인데 '대선후보' 박근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인간' 박근혜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본문에서 이름을 제외한직책은 되도록생략하며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란 거창한 이름보단<박근혜를 주인공으로 한 수필> 정도로 이 글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물론 모든 내용은 사실을 근거로 했다.
- 이서문은 본 기획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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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05년 4월 재보선을 하루 앞두고 경북 영천시 금호읍을 방문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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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IMF 때문이다?
"1998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구 달성 지역구에 출마했을 때 일이다.
박근혜가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 달성군은 대구광역시로 편입한지 얼마 안 된 지역 대다수가 논밭인 촌락이었다.
박근혜가 선거유세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연단이 보이는 저 멀리서부터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두 노인은 삼보일배를 하면서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두 노인은 우리 공주님이 대구에 오셨다고... 감읍하셨더란다"
위 글은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관한 일화를 소개해 놓은 것이다. 게시자는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명할 길은 없다.
다만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박근혜는 무엇 때문에 정계에 진출했을까? 각종 언론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박근혜의 정계 진출 변은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으로 요약된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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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가봉 대통령 내외를 맞이한 박근혜의 '영애' 시절. 그는 어릴 때부터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체화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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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IMF 이전에는?
"나는 지금도 18년(1980~1997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 웃음이 나온다"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박근혜 자신이 직접 언급한 말이다. 자의든 타의든 실제로 박근혜가 청와대를 나온 1980년부터 정계에 등장한 1997년까지 박근혜가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중 1980년대에 박근혜와 접촉했던 한 인사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을 뿐 이 시기 박 위원장이 칩거하거나 은둔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시기 박근혜는 주변 공원이나 문화 유적지 등을 주로 찾았고 정약용 기념관, 강화도 전적지 등 아버지와 유서 깊은 곳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의 정치적 행보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신군부 7년간은 일체의 공식 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새마음봉사단'의 해산, 영남대 이사장 사퇴를 포함해 양친의 추도식마저 열 수 없었으니 꽤나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근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유신정권에 복무했던 가신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살아오면서 내가 미치지 않은게 다행"이란 말은 이 때의 절망적인 심경을 잘 대변한다.
27살때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거처를 옮긴 박근혜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물론 박근혜가 6월 항쟁에 관여한 일은 없겠지만 '독재자의 딸'이 '독재타도'의 수혜를 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박근혜는 아버지를 복원하는 일에 매달렸다. 1988년 '박정희기념사업회' 발족을 시작으로 1989년 '근화봉사단' 조직, 그해 '박정희 10주기 추도식'을 성대히 치르는 등 박정희 기억 되살리기에 앞장섰다.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세요?'라고 묻던 박근혜는 그 '권력(정확히는 아버지)'을 되찾기 위해 이때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1992년 동생 박근령씨에게 육영재단의 이사장직을 내놓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결정적인 사건으로 풀이된다.
명분은 육영재단의 방만한 경영상태였지만 이 뒷배경에 1974년부터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분류된 최태민 목사(육영재단 고문이사, 94년 사망)의 전횡이 있었단 사실은 지금까지도 알만한 사람들에겐 공공연한 비밀로 각인돼있다. 육영재단의 재산도 문제지만 운영권을 둘러싼 암투를 경험하며 자신이 가장 아끼던 두 사람인 최태민과 박근령(당시 박서영), 모두를 잃은 박근혜는 이후 누구에게도 솔직한 마음을 터놓기 힘든 운명에 처한다.
이런 데카르트적 의심에 빠진 박근혜 곁에는 과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1975~1979년) 청와대에서 친분을 쌓았던 출입기자들이 일부 남아있었다. 이들은 그래도 가끔이나마 박근혜와 테니스회동을 갖고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며 박근혜 역시 기회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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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경향)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 3남매의 육영재단을 둘러싼 법정분쟁은 이들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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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IMF 이후에는?
15대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1997년 12월 10일 '영원한 영애'는 오랜 공백을 깨고 한나라당 경북 구미지구당에 입당계를 제출한다. 이날 오후,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영애'에게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직을 제안한다. 박통을 기반으로 한 '구국의 정치인' 박근혜가 탄생한 순간이다.
15대 대선 당시 각 대통령후보 진영은 대구·경북 지역 표심을 흔들 적임자로 박근혜를 지목한다. 그가 매일 오전 11시께 나타났다는 서울 양재동 테니스코트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양 진영에서 파견한 특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 함께 운동을 다녔다던 강남 피플들도 박근혜의 정치 참여를 적극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아버님을 매도했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던 박근혜가 택한 이는 이회창이었다. 1997년 12월 2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둘만의 비밀회동을 가진 박근혜는 정치 입문 전 한 가지 딜을 한다. 정치권이 제시한 조건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이듬해인 1998년 2월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구 달성 지구위원장으로 공천 받게 된 것을 상기하면 '공천 자유이용권'을 약속 받지 않았나 추측된다. 혹자는 정부 차원에서의 '박정희 기념관' 설립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온갖 '설'이 난무하지만 당사자들은 아직까지 박근혜의 정치 입문 과정을 함구하고 있다. 박근혜와 이회창의 만남을 누가 먼저 주선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정치권과 커넥션이 있는 전직 기자들이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들에게 박근혜의 권력의지를 소개했다는 일화와 그와 초등학교 동창이자 자주 테니스를 치던 모습이 목격된 '박근혜의 절친'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중간 다리를 놓았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정호성 보좌관 등을 포함한 주변 진술을 종합해보면 박근혜가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에게 직접 지원 의사를 밝힌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간 박근혜 영입에 회의적이었던 이회창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근혜를 포섭하기로 결단한다. 당시 이회창의 공보특보를 지낸 이흥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씨 정도면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이회창 후보가 직접 챙긴 것으로 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서실장 등 고위급 인사가 박근혜 영입에 관여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이후 박근혜는 정몽준과 그의 친구 강신옥 전 의원 등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얼마 뒤 박근혜와 이회창의 비밀회동이 성사된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이회창에게 표를 줬고 이회창은 박근혜에게 정치입문의 기회를 줬다. 박근혜의 정계 진출 명분은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이었지만 실제 정치현실은 비지니스였다.
그들은 '박정희의 기억'을 거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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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15대 대선 상황과 박근혜가 맞이하고 있는 18대 대선 상황이 비슷하다. 압도적인 대세론 속에 독주하고 있던 이회창은 결국 김대중에게 패배했고, 이후 노무현에게 마저 패배하며 사실상 정치적 생명을 잃었다. 박근혜도 현재 후발 주자들에 의해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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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박정희
당시 박근혜가 할 수 있는 일은 '박정희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게 박근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11일. 청주 중앙공원에서 벌어진 이회창 후보 지지 유세에 참석한 박근혜는 “60, 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걸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멘다.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기여하는 게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이 후보를 지지한다.
비록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은 야당에게 패하며 정권을 내줬지만 박근혜는 약속대로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선에 출마한다. 여기서도 박정희의 기억은 빛을 발한다. "아버지의 애국 충정과 못다한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낙후된 대구 경북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변을 밝힌 박근혜는 국민회의(현 민주통합당)와 자민련의 연합공천을 받은 엄삼탁 후보와 맞서 61%(3만4천2백71표)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둔다.
국회에 입성하게 된 박근혜는 다시 한 번 박정희를 언급한다. "부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시다 비운에 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앞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켜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이쯤되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맞춤형' 연구사례로 박근혜를 추천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의 지지자들이 듣기엔 조금 거북스럽겠지만 라깡(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 살아있었다면 "박근혜에게 아버지는 동일시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다. 이 욕망이 상징적(혹은 언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국가와 민족이며, 실재로 환유된 것이 정치 참여다"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적 가정이다.
박근혜는 지금도 자신의 정치참여가 IMF 때문이라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박근혜는 생전 박정희처럼 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과 '이성적 남자'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동경에 시달렸으며 박정희 사후 생긴 공허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박정희가 욕망했던 국가와 민족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한다. 즉 그에게 있어 국가와 민족은 곧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IMF로 인해 국가가 어려워지자 아버지가 이뤄놓은 것이 훼손당하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은 고통이 됐으며 결국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겠다"는 결심이 선다. 이런 그에게 남은 건 권력에의 길 밖에 없다.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이란 말은 너무 거룩하다. "IMF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과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박근혜를 정치로 이끈 진짜 동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