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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3부/2부/1부_ 위키프레스

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3부/2부/1부_ 위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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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3부,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2부, 퍼스트레이디 5년 경험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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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3부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2012년02월14일 14시09분조회수: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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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 글은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두 가지 배경을 설명한다. 하나는 정치공학적 배경이고 또 하나는 개인심리적 배경인데 '대선후보' 박근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인간' 박근혜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본문에서 이름을 제외한직책은 되도록생략하며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란 거창한 이름보단<박근혜를 주인공으로 한 수필> 정도로 이 글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물론 모든 내용은 사실을 근거로 했다.

- 이서문은 본 기획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박근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05년 4월 재보선을 하루 앞두고 경북 영천시 금호읍을 방문했다.



▲이게 다 IMF 때문이다?

"1998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구 달성 지역구에 출마했을 때 일이다.
박근혜가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 달성군은 대구광역시로 편입한지 얼마 안 된 지역 대다수가 논밭인 촌락이었다.
박근혜가 선거유세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연단이 보이는 저 멀리서부터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두 노인은 삼보일배를 하면서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두 노인은 우리 공주님이 대구에 오셨다고... 감읍하셨더란다"

위 글은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관한 일화를 소개해 놓은 것이다. 게시자는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명할 길은 없다.

다만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박근혜는 무엇 때문에 정계에 진출했을까? 각종 언론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박근혜의 정계 진출 변은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으로 요약된다. 과연 그럴까?

1976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가봉 대통령 내외를 맞이한 박근혜의 '영애' 시절. 그는 어릴 때부터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체화해왔다.

▲그럼 IMF 이전에는?

"나는 지금도 18년(1980~1997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 웃음이 나온다"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박근혜 자신이 직접 언급한 말이다. 자의든 타의든 실제로 박근혜가 청와대를 나온 1980년부터 정계에 등장한 1997년까지 박근혜가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중 1980년대에 박근혜와 접촉했던 한 인사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을 뿐 이 시기 박 위원장이 칩거하거나 은둔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시기 박근혜는 주변 공원이나 문화 유적지 등을 주로 찾았고 정약용 기념관, 강화도 전적지 등 아버지와 유서 깊은 곳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의 정치적 행보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신군부 7년간은 일체의 공식 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새마음봉사단'의 해산, 영남대 이사장 사퇴를 포함해 양친의 추도식마저 열 수 없었으니 꽤나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근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유신정권에 복무했던 가신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살아오면서 내가 미치지 않은게 다행"이란 말은 이 때의 절망적인 심경을 잘 대변한다.

27살때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거처를 옮긴 박근혜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물론 박근혜가 6월 항쟁에 관여한 일은 없겠지만 '독재자의 딸'이 '독재타도'의 수혜를 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박근혜는 아버지를 복원하는 일에 매달렸다. 1988년 '박정희기념사업회' 발족을 시작으로 1989년 '근화봉사단' 조직, 그해 '박정희 10주기 추도식'을 성대히 치르는 등 박정희 기억 되살리기에 앞장섰다.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세요?'라고 묻던 박근혜는 그 '권력(정확히는 아버지)'을 되찾기 위해 이때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1992년 동생 박근령씨에게 육영재단의 이사장직을 내놓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결정적인 사건으로 풀이된다.

명분은 육영재단의 방만한 경영상태였지만 이 뒷배경에 1974년부터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분류된 최태민 목사(육영재단 고문이사, 94년 사망)의 전횡이 있었단 사실은 지금까지도 알만한 사람들에겐 공공연한 비밀로 각인돼있다. 육영재단의 재산도 문제지만 운영권을 둘러싼 암투를 경험하며 자신이 가장 아끼던 두 사람인 최태민과 박근령(당시 박서영), 모두를 잃은 박근혜는 이후 누구에게도 솔직한 마음을 터놓기 힘든 운명에 처한다.

이런 데카르트적 의심에 빠진 박근혜 곁에는 과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1975~1979년) 청와대에서 친분을 쌓았던 출입기자들이 일부 남아있었다. 이들은 그래도 가끔이나마 박근혜와 테니스회동을 갖고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며 박근혜 역시 기회를 노린다.

(사진=경향)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 3남매의 육영재단을 둘러싼 법정분쟁은 이들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15대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1997년 12월 10일 '영원한 영애'는 오랜 공백을 깨고 한나라당 경북 구미지구당에 입당계를 제출한다. 이날 오후,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영애'에게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직을 제안한다. 박통을 기반으로 한 '구국의 정치인' 박근혜가 탄생한 순간이다.

15대 대선 당시 각 대통령후보 진영은 대구·경북 지역 표심을 흔들 적임자로 박근혜를 지목한다. 그가 매일 오전 11시께 나타났다는 서울 양재동 테니스코트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양 진영에서 파견한 특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 함께 운동을 다녔다던 강남 피플들도 박근혜의 정치 참여를 적극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아버님을 매도했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던 박근혜가 택한 이는 이회창이었다. 1997년 12월 2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둘만의 비밀회동을 가진 박근혜는 정치 입문 전 한 가지 딜을 한다. 정치권이 제시한 조건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이듬해인 1998년 2월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구 달성 지구위원장으로 공천 받게 된 것을 상기하면 '공천 자유이용권'을 약속 받지 않았나 추측된다. 혹자는 정부 차원에서의 '박정희 기념관' 설립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온갖 '설'이 난무하지만 당사자들은 아직까지 박근혜의 정치 입문 과정을 함구하고 있다. 박근혜와 이회창의 만남을 누가 먼저 주선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정치권과 커넥션이 있는 전직 기자들이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들에게 박근혜의 권력의지를 소개했다는 일화와 그와 초등학교 동창이자 자주 테니스를 치던 모습이 목격된 '박근혜의 절친'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중간 다리를 놓았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정호성 보좌관 등을 포함한 주변 진술을 종합해보면 박근혜가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에게 직접 지원 의사를 밝힌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간 박근혜 영입에 회의적이었던 이회창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근혜를 포섭하기로 결단한다. 당시 이회창의 공보특보를 지낸 이흥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씨 정도면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이회창 후보가 직접 챙긴 것으로 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서실장 등 고위급 인사가 박근혜 영입에 관여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이후 박근혜는 정몽준과 그의 친구 강신옥 전 의원 등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얼마 뒤 박근혜와 이회창의 비밀회동이 성사된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이회창에게 표를 줬고 이회창은 박근혜에게 정치입문의 기회를 줬다. 박근혜의 정계 진출 명분은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이었지만 실제 정치현실은 비지니스였다.

그들은 '박정희의 기억'을 거래했다.

이회창의 15대 대선 상황과 박근혜가 맞이하고 있는 18대 대선 상황이 비슷하다. 압도적인 대세론 속에 독주하고 있던 이회창은 결국 김대중에게 패배했고, 이후 노무현에게 마저 패배하며 사실상 정치적 생명을 잃었다. 박근혜도 현재 후발 주자들에 의해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그래서 다시 박정희

당시 박근혜가 할 수 있는 일은 '박정희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게 박근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11일. 청주 중앙공원에서 벌어진 이회창 후보 지지 유세에 참석한 박근혜는 “60, 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걸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멘다.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기여하는 게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이 후보를 지지한다.

비록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은 야당에게 패하며 정권을 내줬지만 박근혜는 약속대로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선에 출마한다. 여기서도 박정희의 기억은 빛을 발한다. "아버지의 애국 충정과 못다한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낙후된 대구 경북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변을 밝힌 박근혜는 국민회의(현 민주통합당)와 자민련의 연합공천을 받은 엄삼탁 후보와 맞서 61%(3만4천2백71표)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둔다.

국회에 입성하게 된 박근혜는 다시 한 번 박정희를 언급한다. "부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시다 비운에 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앞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켜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이쯤되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맞춤형' 연구사례로 박근혜를 추천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의 지지자들이 듣기엔 조금 거북스럽겠지만 라깡(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 살아있었다면 "박근혜에게 아버지는 동일시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다. 이 욕망이 상징적(혹은 언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국가와 민족이며, 실재로 환유된 것이 정치 참여다"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적 가정이다.

박근혜는 지금도 자신의 정치참여가 IMF 때문이라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박근혜는 생전 박정희처럼 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과 '이성적 남자'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동경에 시달렸으며 박정희 사후 생긴 공허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박정희가 욕망했던 국가와 민족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한다. 즉 그에게 있어 국가와 민족은 곧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IMF로 인해 국가가 어려워지자 아버지가 이뤄놓은 것이 훼손당하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은 고통이 됐으며 결국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겠다"는 결심이 선다. 이런 그에게 남은 건 권력에의 길 밖에 없다.

"IMF로 인해 고통받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이란 말은 너무 거룩하다. "IMF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과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박근혜를 정치로 이끈 진짜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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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2부

퍼스트레이디 5년 경험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2012년01월25일 16시25분조회수: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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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그 첫 공식 업무 - 퍼스트레이디

"한 게 뭐냐?"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장하는 말이다. 도대체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한 일이 뭐기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당 대표를 지내고 대선 후보까지 올라가느냐는 것이다. 100% 아버지 후광 말고는 뭐가 있느냐는 얘기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먼저 이런 대답을 한다.

"벌써 20대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대답들이 있지만 국회의원이 된 이후의 활동에 대해선 잠시 접고, 인간 박근혜가 가장 먼저 공식적인 일을 맡았던 70년대 후반기로 가보자.

박사모 홈페이지에는 당시의 박근혜를 찬양하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몇 구절만 인용해 본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엿새 후부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중략) 공인이란 그런 것일까. 우리는 기쁘면 마음대로 기뻐하고 슬프면 마음대로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여유마저도 없었다. 대통령 딸이라는 책임에 더해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퍼스트레이디라는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더 독해지고 더 단단해져야만 했을 것이다...(중략) 5년여의 퍼스트레이디 생활로 단련된 정치 감각은 지금의 정치인 박근혜를 만든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동양의 부덕 겸비한 한국의 무궁화'라는 제목의 글에는 좀 더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이 나온다.

"다망한 일정 가운데도 거의 매주 열리는 새마음운동대회의 축사를 대필시키지 않고 직접 쓴다. 기자들이 스피치라이터에게 맡기라는 의견을 냈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열과 성을 다해서 이 새마음운동을 해도 성공할까 말까한 정신 혁명 운동을 그렇게 안이하게 해서 성취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필을 권했던 기자들은 그의 열성과 확고한 신념에 두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외에도 "그의 학덕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사서오경에 도달하고 있다"는 글을 보면 여기가 북한인지 남한인지 혼동될 정도이다.


백보 양보해 위의 말들이 대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퍼스트레이디로서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치자. 퍼스트레이디 역할 5년 한 것이 과연 정치적 능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혹자는 힐러리클린턴이 퍼스트레이디로서 지낸 세월이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힐러리는 오히려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힐러리 옆에 누가 남편이 되었어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농담도 있다.
왜 가만 있는 날 갖고 그래, 정치 생각 없어요

그토록 영부인으로서의 경험이 중요했다면 오히려 이순자 여사는 어떨지 물어보고 싶다. 박근혜보다 2년 더 영부인 생활을 했고, 이 여사 역시 비리가 좀 있어서 그렇지 큰 무리 없이 내조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 두 살의 박근혜가 정신없이 겪은 5년 보다는, 웬만큼 정치를 알만한 50대의 이순자여사가 겪은 7년의 시간이 더 값지지는 않을까. 혹 이 여사의 비리가 정말 문제라면 다음 일화는 어떨까.

1978년 박근혜는 <대한구국십자군>과 <구국여성봉사단>의 명예총재로 있었다. 이 두 단체를 창설한 이는 최태민 목사. 낯선 이름일 수 있으나 70년대 말 기업인들에게는 이가 갈리는 이름이다. 물론 김재규에게도 그랬다. 최태민은 두 단체를 만들고 박근혜를 명예 총재로 앉힌 후, 호가호위 하듯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 기업들에게 수천만원씩의 협찬을 받았다.


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 1000만원 정도 할 때니 기업들의 부담은 엄청났고 그만큼 청와대로 민원도 빗발쳤다. 1978년 김재규 정보부장은 최태민에 대한 내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와의 불륜, 수십억 원의 횡령 등 비위사실이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박근혜 최태민 김재규 백광현(당시수사책임자)을 불러 대질까지 시켰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울며불며 '아니라고' 주장했고 마음이 약해진 박대통령은 이 일을 유야무야 끝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갈라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김재규 정보부장. 10.26 사건의 발단은 여기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박통과도 막역한 최태민 목사,94년 사망

최태민 목사는 최근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 측에 수억원을 건넸다고 주장한 A씨가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정모씨와 함께 캠프의 자금을 담당했다"고 '뉴시스'측에 폭로하면서다.

물론 기사 어디에도, 또 70년대 일화 어디에도 박근혜가 직접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하긴 박정희나 박근혜 모두 비리를 저지를 필요가 없던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하려고 했고 대한민국을 '내것'처럼 생각했던 사람이다. 기업이든 언론사든 정치인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굳이' 귀찮게 비리를 뭣하러 저지르겠는가. 하지만 직접 더러운 곳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러운 신발들이 현관에 있으면 저절로 깨끗한 신발에도 냄새가 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자리는 일을 하는 자리라기보다 사람을 앉히는 자리라는 점이다. 대통령이 직접 '전봇대를 뽑아라',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돈을 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이 똑바로 박힌 국토해양부 장관을 임명하면 되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앉히면 된다. 얼마나 주변 사람들이 괜찮은가가 그 대통령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직무수행에는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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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프로젝트-1 박근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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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 그는 누가 뭐래도 현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이다. 지난 수 년간 대선 후보로 늘 지지율 1위를 달려왔다. 최근 몇 개월 사이 안철수 원장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집권 여당의 강력한 대선 주자이고, 지금 당장 선거를 한다면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재자 박정희의 딸, 수첩공주, 선거의 여왕 그리고 "대전은요?"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박근혜에 대한 전부다. 그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근혜 위원장에 대해 '약속을 지킬 것 같다' 정도의 막연한 믿음과 기대를 갖고 있고, 마찬가지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독재자의 딸', '수첩공주'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위키프레스>는 앞으로 여권 유력 대선 후보인 박 위원장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통해 과연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될 자격이 있는지, 대통령이 된다면 국정을 잘 운영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근혜 검증 프로젝트’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첫째,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는지, 얼마나 친일 행위를 했는지, 얼마나 방탕하고 얼마나 비열했는지는 어디까지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로 끝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물론 박근혜의 지지라는 것이 대개 박정희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무 자르듯 모든 관계를 끊을 수는 없겠으나, 이번 검증 프로젝트는 가능한 박근혜에게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의 능력과 철학만을 따져볼 것이다.

둘째, 잃어버린 17년에 대해서는 가능한 다루지 않을 것이다. 19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97년까지 박근혜는 영남대학교 이사, 육영재단 이사장 등 직함을 가진 것 외에 별다른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록을 추적함으로써 개인적 비리나 부정행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는 조중동에서 흔히 하는 '신상털기' 수준의 저급 기사라 판단해 되도록 공적 활동 및 발언 등을 토대로 검증할 것이다. 즉, 퍼스트레이디로 있었던 74년부터 79년까지, 국회의원으로 데뷔한 1998년부터 지금까지의 의정활동 및 공식적 대외 활동에 대해서 집중할 예정이다.

셋째, 박근혜 측의 반론 및 의견 제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박 의원의 반론 요청문은 원문 그대로 실어줄 것이며 박 의원 측의 해명에 대해서도 언제든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외에 원칙은 다음과 같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혼동의 소지가 없는 경우 ‘의원’ ‘위원장’ 등 호칭을 생략할 것이다. 박지만, 박근령 등이 관련된 인척비리는 박 위원장과 관련된 현재진행형 비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은 비껴가지 않을 예정이다.

끝으로 만에 하나 기사에 대한 어떠한 형식이든 압력이 들어올 경우, 그 상황 그대로 다시 기사화 할 것임을 밝혀둔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특정 정치인을 흠집 낼 의도도 이유도 여유도 없다. 다만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를 잘 이끌어나갈 사람인지가 우리가 밝히려는 A 부터 Z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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