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 고질 다룬 최준식 교수 
정부 문화융성위원회 경험 폭로

최순실과의 만남도 ‘경악 그 자체’ 
끼리끼리 ‘해먹는’ 문화 병폐 비판

 

한국 문화의 몰락-대반전을 위한 마지막 고언 
최준식 지음/주류성·1만6000원

책 들머리에 나오는 서울 송현동의 옛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 터 얘기부터 참신했다. 경복궁 오른쪽 동십자각 뒤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에 높은 돌 담장으로 둘러싼 널찍한 공터가 있다. 미국 대사관원 숙소가 있던 자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때 조선식산은행의 직원 숙소 자리다. 2000년에 삼성생명이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사들인 이 땅은 2008년 한진그룹에 넘어갔고, 한진은 거기에 호텔을 지으려다 반대가 거세지자 문화융합센터 건립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

경복궁 옆,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던 터. 2000년 삼성생명이 미국 대사관에서 구입했다가 2008년 한진그룹에 매각했다. 한진은 이 자리에 호텔을 지으려다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문화융합센터를 짓기로 했다. 왜 ‘문화’일까? 주류성 제공
경복궁 옆,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던 터. 2000년 삼성생명이 미국 대사관에서 구입했다가 2008년 한진그룹에 매각했다. 한진은 이 자리에 호텔을 지으려다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문화융합센터를 짓기로 했다. 왜 ‘문화’일까? 주류성 제공
그 근처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한국 문화 전문가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가 그 땅이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였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고 “망연자실했다”는 게 놀랍다. 망연자실한 이유는 일개 외국의 대사관 직원 숙소가 어찌 수도 중심부에 있느냐, 어찌 그런 금싸라기 땅을 외국 대사관 직원 숙소로 내줄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한국 문화의 몰락>에서 지은이 최 교수는 나아가 광화문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미국 대사관의 “파격적 우대” 역시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라고 직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이런 얘기다. “백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하는 회의였는데, 10시에 시작하는 회의에 우리는 9시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회의 ‘리허설’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일찍 불러모은 것이다. 발표하는 사람들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이 리허설을 하는 동안 나는 할 일이 없어 빈둥대기만 했다. 이윽고 대통령이 들어오고 회의가 시작됐는데 회의의 철칙이 가관이었다. 자유발언은 대통령만 하고 질문은 일절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발표하는 사람들도 그저 원고만 읽을 뿐이지 다른 개인적인 발언은 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회의 3시간 동안 그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나왔다. “도대체 이 바쁜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뭐하자는 것이냐?” 그런 식이니 대통령은 자신이 듣기 좋은 것만 듣게 되어 모든 일이 잘 돌아간다고 착각할 것 같았다.

2015년 1월,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워크숍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한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위원회 위원들. 중간 줄 맨 왼쪽이 최준식 교수, 그 오른쪽이 배우 김성녀씨, 또 그 오른쪽 가수 설운도씨,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동호 부산영화제 이사장.  주류성 제공
2015년 1월,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워크숍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한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위원회 위원들. 중간 줄 맨 왼쪽이 최준식 교수, 그 오른쪽이 배우 김성녀씨, 또 그 오른쪽 가수 설운도씨,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동호 부산영화제 이사장. 주류성 제공
그 ‘회의’란 게 박근혜 정부가 만든 문화융성위원회인데, 최 교수는 2년간 위원으로 있었다. 또 그 위원회가 한 일 중 가장 유명한 게 ‘문화의 날’ 제정이었는데, 위원인 최 교수도 제정 소식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도 몰랐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문화생활’이라는 걸 공연장이나 전시장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이 더 큰 문제였다. “(우리에게) 문화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가서, 어떤 때에는 특별한 옷(정장?)을 입고 가서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요 “공연장에 가서 오페라라도 감상하면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인 그 고정관념. 한진이 짓겠다는 문화융합센터 구상도 공연장 중심의 그런 관념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를 더더욱 놀라게 만든 일이 또 있었다. “(…) 그렇게 박씨 일행들을 만났는데 그때 나는 더 이상 그 만남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적인 이유는 최순실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 치는 저질이었다. 도무지 상대할 수가 없었다.” 최순실은 처음엔 최 교수를 우대하는 듯했으나 곧 보좌관처럼 부려먹을 태세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정치가 박근혜와 학계의 자신이 만나 우리 문화 진작 방안에 대해 동등하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위원회에 들어갔으나,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어디 유세를 가면 어떤 슬로건을 갖고 가면 좋은지와 같은 지엽적인 것을 만들어달라는” 식의 요구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과의 연락을 끊어버린 최 교수는 일갈했다. “여보 박근혜씨! 당신은 어찌 저런 인간을 데리고 일을 하시오?” 오늘의 탄핵정국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조 아닌가.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등을 써 온 최 교수는 이번 책에서 경제적·물질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문화는 유치할 정도로 유아적이며 전근대적인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신분제적 경어와 반말 남용 등으로 왜곡되고 타락한 언어문화와 제 의미를 잃고 정치화한 혼례·상례·제례 등의 생활문화, 종교문화, 교육문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며 점검, 비판하는 내용이 본론이다. 그 병폐의 근원을 최 교수는 ‘내 가족 제일주의’, ‘내 새끼 유일주의’를 토대로 “끼리끼리 해먹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문화의 잔재라고 짚는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문화적 우행과 기행의 단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서론과 후기가 없었다면 맥이 빠질 뻔했다. 서론과 후기에 나오는 권력자들의 우행은 저급하고 뒤틀린 문화의 소산이지만 그들 자신이 그런 문화를 생산·유통하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그냥 나왔겠는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