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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을 말하다] 2. 경기 천년의 역사 / 1. 2015 경기천년 학술대회 기조강연 -경기일보

[경기천년을 말하다] 2. 경기 천년의 역사  / 1. 2015 경기천년 학술대회 기조강연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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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을 말하다] 2. 경기 천년의 역사     
류설아 기자 rsa119@kyeonggi.com 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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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 행정구역 변천 김종혁 (성신여대 교수)

 

경기 좌·우도 1414년 통합 
광역시·일반시 승격
가장 일찍 진행된 지역

고려 말에 존치했던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는 1414년에 경기도로 통합된다. 이로써 공식적인 명칭으로서의 ‘경기도’가 출범하였다. 

애초에 경기우도는 현재의 황해도 일부 지역이고, 좌도는 현재의 경기도 남부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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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좌우도는 공식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관례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경기도의 좌우 구분은 대체로 한강을 기준으로 하여 이남이 좌도이고 이북이 우도이다. 조선 초기에 330읍으로 정립된 8도제는 군현 간 통폐합이 거의 없이 1914년까지 그 근간을 유지하였다. 한편 유수부(留守府)는 경기도에만 존치했던 읍격이다. 

양란을 겪은 후에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한성의 북쪽에 개성, 서쪽에 강화, 동쪽에 광주, 남쪽에 수원은 각기 1438년, 1627년, 1683년, 1793년에 유수부가 되었다. 유수부는 지방직이 아니라 경관직에 속했으며, 비변사 구성원이기도 했다. 

일제는 강점 후 만3년 4개월만인 1913년 12월 29일날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안을 공포하고 1914년 4월 1일부로 시행하였다. 이때 전국은 기존의 330여 군이 220개 군으로 통합되었고 12개의 부로 편제되었다. 이때의 부는 오늘날 시(city)에 해당한다. 

경기도는 경성부를 관내로 편입하고, 경성의 관할 구역도 크게 축소시켰다. 1914년에 경기도는 두 개의 부와 함께 20개의 군으로 편제됐다. 1914년에 통폐합되면서 없어진 군을 흔히 구읍(舊邑)이라 부른다.

해방 후 경기도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빈번한 영역 변동을 겪어왔다. 우선 1945년 경성이 서울시로 개칭하면서 경기도에서 다시 분리되었고, 인천 역시 1981년에 직할시가 되면서 분리ㆍ독립하였다. 

경기도는 광역시뿐 아니라 일반시의 설치(승격)가 가장 일찍 그리고 활발하게 진행된 지역이기도 하다. 수원이 일찍 1949년에 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남양주시가 되는 등이른바 도농통합시가 되었다.

시의 승격은 서울의 인구가 정체되기 시작하는 1990년 중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른바 신도시가 서울 주변에 건설, 서울 인구를 분산ㆍ유치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공간적으로 확대되면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로써 1990년대 중반 이후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유일한 광역자치단체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시 승격도 활발하게 수반되었다. 2015년 현재 28시 3군(가평ㆍ양평ㆍ연천) 체제로 편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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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과 조선 김준혁 (한신대 교수)

 

실학·개방성은 경기도의 특성
팔도의 모든 문화와 전통 통합
우리 역사의 발전 중심에 있어

경기 천년에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경기지역의 정체성을 정확이 이해해야만 과거를 미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가 단순히 대한민국의 경기도가 아닌 세계속의 경기도로 거듭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경기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실학(實學)과 개방성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을 통합하는 융합성에 있다. 국가 전체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민산(民産)을 풍부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실학(實學)이다. 더불어 실학을 기반으로 열려 있는 사고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개방성이다. 이러한 실학과 개방성은 다른 지역에서 드러나지 않은 경기지역만의 독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경기지역은 조선후기에 나타난 경세치용의 실학만이 아니라 조선초기부터 경세학(經世學)으로서의 주자성리학을 실용지학으로 발전시켰다. 고려말 백성들을 탐학하는 폐단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화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경세적 주자성리학은 실학이었다. 이러한 실용지학이 조선후기 실학으로 발전하여 조선 전체를 변화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더불어 경기지역은 특유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다. 개방성이란 외부적 개방성과 내부적 개방성을 들 수 있다. 외부적 개방성이란 대외교류의 추진 및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내부 개방성이란 주자성리학만이 아닌 다양한 학문 사상을 수용하고, 자신이 신분을 뛰어넘는 발상과 행동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농공상(士農工商) 체제하에서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구성을 추구하는 것임과 양반사대부의 특권을 내려놓고 이를 통해 실용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기지역은 팔도의 모든 문화와 전통을 통합하여 문화다양성을 인정하는 융합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융합성은 경기지역 외에 다른 도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경기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지리적 폐쇄성과 사상적 배타성을 고집함으로써 전체적인 발전과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결국 경기도는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와 인문지리적 요인이 함께 결합하여 실용지학을 중시하고, 개방성과 융합성을 보여주며 우리 역사 발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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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경기제의 성립과 경기문화 홍영의 (국민대 교수)
개성서 한양으로 수도 옮겨
조선시대 경기영역 큰 변화
1910년 경기도로 공식적 쓰여

 

전근대 군주(君主) 중심의 왕조국가에서는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의 통치조직이 짜여졌다. 통치영역 또한 군주가 거주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왕경이 구성되었고 그것이 도읍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 왕조사회에서는 도읍을 통치영역의 중앙에 두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도읍이 있는 곳은 중앙이 되고, 그 나머지는 외방[京外] 즉 군현으로 구별되었다.

신분적 질서의식을 영역(공간)에 반영, 설정한 데서 출발한 중앙과 지방의 구분의식에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다”이라는 제민일치(齊民一致)를 추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차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경기는 이러한 중앙과 지방을 구분하는 이념에서 나온 것이며, 국왕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중앙의 범주였다. 삼국시기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면서 왕경(王京)과 경기(京畿) 그리고 군현으로 구분되는 통치원리의 형성과정은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는 신왕조의 물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1390년(공양왕 2) 경기 좌도 8개 현에 양광도 11현과 교주도 6현을 붙이고, 우도 5개현에 양광도 5현과 서해도 9현을 붙였다. 이와 함께 경기 좌우도에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파견하면서 경기는 중앙과 구분되어 점차 하나의 도(道)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전제개혁을 통해 과전법(科田法)을 마련하였다. 과전법은 과전을 경기에 한하여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그에 소요되는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기의 확대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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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경기 영역에서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이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루어졌다.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개성의 북부지역이 서해도로 넘어가고 대신 한양의 남쪽지역이 대거 경기 지역에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의 한양 주변을 흔히 ‘경기도’라고 불러 왔다. 조선왕조가 전국을 8도(道)의 하나로 경기를 포함한 뒤, 경기 관찰사를 파견한 사실은 경기도로 인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 왔다. 더욱이 실록과 각종 문헌 가운데 ‘경기’와 함께 ‘경기좌우도’, ‘경기좌우도성’, ‘경기좌도’, ‘경기우도’, ‘경기도’ 등의 명칭이 발견되는 점도 그 같은 인식에 별다른 의심을 두지 않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자(심승구)에 따르면, ‘경기’는 조선의 공식 용어가 된 시기는 1414년(태종 14)에 경기좌우도를 고쳐 ‘경기’로 한 이후 조선의 8도체제와 함께 ‘경기’는 조선의 공식 용어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각종 법전류에는 ‘경기’로 명문화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경기는 1895년 23부(府)로 바꾸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13도제로 전환하면서 경기가 경기도로 정해진 것으로 보이며, 경기가 공식적으로 경기도로 쓴 것은 1910년 일제에 식민지가 된 뒤의 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기 천년’의 의미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정리=류설아기자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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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을 말하다] 1. 2015 경기천년 학술대회 기조강연

“경기천년사업 경제·문화 등 통괄… 도민 주도로 추진”

류설아 기자 rsa119@kyeonggi.com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제15면
             
경기학회와 경기일보는 경기 천년을 앞두고 지난 20, 21일 ‘2015 경기천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교수와 전문가 50여 명이 참여해 총 2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경기도의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 위한 역사, 문화, 남북관계 등 폭넓고 다양한 시각과 제안이 돋보였다는 평이다. 

미래 천년을 맞이하는 경기도가 경기도민을 주체로 세우고 발전 동력을 확인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경기일보는 각 논문의 핵심내용을 연재,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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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강진갑 (경기학회장·경기대 교수)
분단의 현장 경기도 남북간 문화교류 통해 민족 동질성 찾아야

 

경기 천년의 의미와 새천년 경기도의 미래
2018년은 경기(京畿)가 한국사에 등장하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경기 천년을 기념하는 일을 시민이 함께하고 시민이 공감할 때 행사로 끝나지 않고, 경기도민의 삶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경기 천년 역사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문화가 지배하였다.

고려사회는 개방적인 다문화사회였다. 조선 전기 성리학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조선후기 경기지역에서 실학이 꽃피웠고, 서학(조선후기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 불렀다)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성리학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상적 풍토를 지녔는데 이는 18, 19세기 조선사회가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경기도는 분단의 현장이자 통일의 길목이었다.

새천년 경기도 미래 키워드 ‘시민의 행복’ ‘남북통일’ ‘유라시아 대륙’
첫째, 시민의 행복 문제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으나, 국민은 행복해 하지 않는다. 평균 수명도 크게 늘어났고, 객관적인 삶의 질도 크게 신장되었으나,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는 하락하고 있다. 한국은 2003년 이후 13년간 OECD 회원 국가에서 자살률 1위이다

한국인의 물질주의와 사회 양극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제도 개선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지만, 한국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충족 외에 타인과의 좋은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 시민의 행복이 경제 성장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런 면 에서 수원, 안양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인문도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남북협력과 통일 문제이다. 통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나 멀지 않은 미래에 갑자기 다가올 수 있다. 경기도 미래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요인은 통일이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지역보다 경기도는 매우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통일 이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시급히 해야 할 과제는 남북 간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현시점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이해하는 동시에 민족 동질성을 찾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경기도가 경기천년 기념사업의 남북 공동 추진을 북한에 제안하고, 개성에 있는 연암 박지원 묘 참배를 포함한 여러 가지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유라시아 대륙과의 협력 문제이다. 전통적인 아시아 대륙 국가의 일원이었던 한국은 1945년 분단 이후 북쪽 땅과 아시아 대륙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서 섬나라가 아닌 섬나라가 되었고 해양국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다시 중국과 러시아 등 유라시아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륙 국가로 복귀하고 있다. 대외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지른 지는 오래되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중국과 가장 짧은 항로를 가지고 있는 경기도의 위상이 한국 내에서 높아지고 있다.

한국과 유라시아와의 교류 협력이 늘어날수록, 경기도의 역할이 증대될 것이다. 경기 지역사회 미래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유라시아 대륙이다.

경기천년 사업은 시민이 주역이 되어 경기도의 미래를 만드는 일
2014년 경기 600년 정도 기념사업은 급하게 추진되었기에 하나의 행사로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당시 ‘통일 한국의 중심 경기도’가 슬로건으로 제시되었지만 지금 이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경기천년 사업이 하나의 이벤트나 다른 기념사업처럼 사업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시민이 중심이 되어 함께하고 시민의 공감을 얻으면서 추진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경기 지역공동체가 경기 새천년에 만들고자 하는 미래를 시민과 함께 논의하고 만드는 일이다. 지금부터 경기도민이 만들고 싶은 미래가 무엇인지, 경기 천년 미래를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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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조창희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통일한국·세계화시대 소통의 허브로 거듭나 
새로운 미래 비전 제시

 

‘상생과 통합의 경기도 실현’ 목표 삼아야
경기도는 서울을 포함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 천년의 중심처이자 국학이 태동하고 발전한 지역이며 당대의 문화인들이 배출되어 활동한 지역이다.

 

현재 그 위상과 역할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채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막대한 구심력을 지닌 서울의 주변부만로 인식되어왔다. 전국에서의 전입으로 인한 도민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경기천년을 맞아 우리나라의 근간인 경기도가 세계화 시대와 향후 통일한국시대의 새로운 문화비전을 제시하여 ‘상생과 통합의 경기도 실현’을 목표로 소통의 허브로 자리매김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포용(包容)과 통합(統合)의 역활을 수행하여 온 경기도는 5천년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지였음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천년 경기도의 저력, 경관과 전통의 아름다움, 그리고 경기도민의 희망이 무엇인지 방증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경기천년 기념사업’을 통해 실현해야한다.

경기천년 기념사업,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범위를 통괄해야
경기도는 600년 동안 임진ㆍ병자 양란과 일제 침탈, 6ㆍ25전쟁과 같은 국난의 한 가운데 있었고 학문과 문화, 종교의 터미널 역할을 하였으며, 농업과 상업, 현대 산업 발달의 중심지였다.

‘경기도’라는 직제를 정한 후 2014년에‘600년’이 되었고, ‘경기(京畿)’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후 2018년이면 1천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여 문화경제시대에 경기도의 새로운 위상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2014년에 진행하였던 경기도 600년 사업이 조선시대, 근대시대(서울, 인천 포함)를 중심으로 경기도의 꿈, 힘, 미 발양을 통해 경기도의 위상을 강화하는 사업이었다면, 2018년의 경기천년 사업은 고려시대(개성 포함)를 중심으로 남북교류, 통일을 염원하고 넥스트 경기(Next 경기)를 구현하는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천년사업의 추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범위를 통괄하는 것이기에 실행 주최는 경기도가 담당하고 대외적으로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후원을 요청해 대내외적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업의 실행은 31개 시ㆍ군 자치단체와 경기문화재단 외 각 산하 단체가 협력하되 가시효과가 큰 중심사업은 경기도에서 추진하고, 지역 확산 효과가 있는 사업은 시ㆍ군자치단체에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도민참여 유도를 위해 1천200만 도민을 각종 사업의 주체로 참여시키고 도내 민간 박물관 및 기념관, 지역문화단체 등의 자율참여를 유도해야한다. 도내 유수 대학교의 축전, 기업문화활동(홍보포함) 등도 천년 사업에 접목해야 한다. 부연하면 31개 시ㆍ군의 기존사업 고급화, 주제부여 등 재구성하여 천년 사업화하고 도내 주요 시설물 시공ㆍ착공 등을 이벤트화 하는 것을 제안한다.

경기도,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경기도는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기념사업 및 미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선진 경기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경기도는 고려의 개성, 조선의 한양 두 도읍지를 둘러싸고 1천년을 이어오면서‘물산의 융합’, ‘문물의 전파’, ‘학문의 집성’을 이뤘다.

경기천년사업은 첫째, 통합과 포용으로 한국 통일시대(統一時代)를 선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문예진흥을 통해 세계 인류문화 창출을 도모하고 세번째, 도민화합을 통해 민본을 중심으로 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천하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경기도는 기호사림(畿湖士林)의 중심으로 성리학과 실학을 비롯한 한국유교문화의 본산이었으며 지난 30여 년간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사는 민족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의 서사시로 세계사의 기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경기도는 정체성이 없는 것이 정체성이라는 자조와 함께 역사적 전통과 유산을 망각하고 스스로 돌아보지 않았다. 경기도에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곳이 있는가? 결국 경기천년 기념사업은 정신사에서부터 경제산업까지 도정의 전분야에서 새로운 개혁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경기천년기념사업을 통해 우리 경기도가 1천년전 태동하고 600년 전에 출발한 역사의 심원을 찾아 미래발전의 원동력을 마련하고, 통일한국과 세계화시대에 소통의 허브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정리=류설아기자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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