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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읍교회-수원종로교회] 116년 신앙의 성소… 숱한 바람에도, 말씀의 획 하나 흔들림 없었다

[한국의 성읍교회-수원종로교회] 116년 신앙의 성소… 숱한 바람에도, 말씀의 획 하나 흔들림 없었다

수원 화성 수원종로교회

입력 2015-03-28 02:22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012240&code=23111613&cp=nv
[한국의 성읍교회-수원종로교회] 116년 신앙의 성소… 숱한 바람에도, 말씀의 획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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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1953년 한국전쟁 당시 미국 공군 월워스 병장이 수원 화성 일대를 촬영한 보기 드문 컬러 사진은 시편 22편 '고난의 시'를 보는 듯하다. 전쟁으로 성한 데가 없는 폐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내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그 무렵 전쟁은 정전협정 국면이었다. 전투는 38선 인근에서 국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피난길 1번 국도가 관통하는 수원. 사진 속 정조대왕의 화성(華城)은 포격에 무너지고 훼손됐다. 백성은 성벽 위에 채전을 갈아 생을 이어갔다.

정조 이후 19세기. 서세동점의 세계사의 흐름에 아랑곳 않고 탐욕과 수탈로 백성을 괴롭힌 조선의 권력이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그런 조선은 망했고 백성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고난을 헤쳐 나가야 했다. 와중에도 친일파의 권력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

무너진 화성의 꿈. 남부여대 피난길 1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비바람 피할 첫 도시 수원. 그곳에서 화성과 수원 첫 교회 수원종로교회를 만났다.

화성행궁 앞에 우뚝한 수원종로교회

지난주일. 정조가 화성 행차 시 머물렀던 화성행궁 앞 1번 국도. 시민들은 팔달산 성벽 길과 행궁 앞 광장에서 산책을 즐긴다.

그 광장 앞 신호등을 건너면 수원종로교회이다. 오전 11시 예배를 1시간여 앞둔 시각. 노(老)권사 한 분이 전도지를 들고 지나는 시민에게 “하나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노권사의 전도지에 익숙한 시민들이 눈인사를 하며 지난다. 산수유가 폈고 봄기운이 완연했다.

교회 남쪽으로 400여m에 팔달문이 있다. 뒤쪽으로 수원천이 흐르고 북동방향 300m쯤엔 수원 기독교 교육의 산실 삼일학원이 오늘도 여전하다. 하나님 성읍의 이 같은 평화는 생각건대 채 반세기도 되지 않았다.

‘1899∼2015 민족과 함께하는 수원종로교회.’

교회는 부활절인 오는 4월 5일 이 같은 표어로 창립 116주년 기념예배를 올린다. 어둠을 몰아내는 참빛,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사순절 직후다. 지난 15일부터 특별새벽기도회로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옛 유수부가 있던 성읍 수원.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난민이 폭격을 피한 들에는 이제 글로벌기업 삼성전자가 들어섰다. 그 들판이 상전벽해가 됐어도 구도심의 수원종로교회는 신앙으로 성소로, 영적 유물로 건재하다. 바람이 동으로 불든, 서로 불든 말씀은 획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장자 교회는 결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부심 강한 수원 왕도의 양반들

1896년 감리교회가 ‘수원·공주 구역’을 정하고 순회 전도에 나섰다. 두 고을은 경기도와 충청도 중심도시였다. 왕도 수원은 사대부들의 완고함으로 요지부동이었다. 선교사들은 외곽(동탄 장지리교회)에 처소를 삼고 성읍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조선의 이데올로기 유교는 ‘부활의 예수’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예수가 만왕의 왕이라니…. 앞서 1866년 천주교 병인교난 때에 수원 출신 순교자들이 나왔다. 현 교회 터도 그 순교와 관련 있는 옛 천주교회였다. 1898년 선교사 스크랜턴은 선교보고서를 통해 ‘아직 수원과 공주, 두 곳 모두 직접적인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도로 양쪽 주변 지방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복음은 달과 별이 되어 팔달산 위에 걸렸다. 그 이듬해 이 구역 담당자였던 스웨어러 선교사는 ‘상당한 위치에 있는(in influential position) 교인 서너 명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들을 통해 조만간 사업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한양서 부임한 관료가 예수를 믿게 됐다는 얘기다. 그만큼 수원 유수부 양반들이 완고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렇게 비밀결사 조직처럼 복음을 전하던 이들은 팔달산 언덕에 선교사가 묵을 집을 사서 첫 기도 처소를 마련한다. 수원종로교회의 시작이다. 감리회의 명을 받아 배재학당 출신 조사 김동현이 처소를 매입했다. 한데 김동현이 체포됐다. 스웨어러가 (석방을 위해) 미국 공사 알렌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되레 꼬여 외교적 사안이 되고 말았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매입한 처소가 거래 무효화됐고 김동현은 옥에 갇히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화령전에서 너무 가깝다. 사직을 능멸하는 일이다.”

수원 양반들은 언덕 처소가 행궁 화령전 코앞이라며 분개했다. 화령전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교회는 수원 선교를 위해 수령의 퇴거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화성 북문안 초가(당시 보시동)에 수원의 첫 예배당을 세웠다. ‘신학월보’는 권사 이명숙 김익회, 속장 이춘원, 유사 겸 훈장 오중렵 등이 이끌었다고 기록했다. 설립 과정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첫 예배당 설립을 비밀리에 도왔다. 성령께서 세운 이들이었다.

1번 국도의 교회, 삼남지방 복음 통로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수원역이 생겼다. 수원이 교통 요충지가 되면서 교인도 200여명에 달했다. 미션스쿨 삼일학교도 활기를 띠면서 청년들이 몰렸다. 선교사들은 “예배당이 차고 넘칠 정도”라고 보고했다.

교회는 보시동 초가 교회를 떠나 1912년 8월 북수동 368번지 종로네거리에 도서실과 사교실까지 갖춘 현대식 벽돌 예배당(현 교회)을 헌당했다. 기숙사 건물도 별도로 지었다. 교회는 새 문물의 창구였다. 복음은 가난, 무지, 전염병, 문맹과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됐다.

이덕주 교수(감신대·한국교회사)는 “정조의 지시로 조성된 신도시 격인 수원은 주민 구성과 성격이 복잡했다”며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 학교, 여성 전도 중심의 기숙사는 지역 복음화와 발전의 교량이 됐고 경기 남부지역 선교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고 정리했다.

수원종로교회가 예수의 사랑과 정조의 애민을 바탕으로 민족교회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된 배경에 민족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이하영(1870∼1952) 목사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스웨어러 등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나약한 사람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함축된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수원 자생 크리스천과 지역선교를 이끌었다.

이 목사는 1904∼1910년 사이 현 교회 터의 예배당 헌당, 기숙사 건립, 삼일학교 개교 등을 통해 부흥을 이뤘다. 복음이 서울∼수원을 축으로 삼남지방으로 퍼지게 한 최전선이었다.

그 후 이하영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목회를 했다. 그리고 진남포 3·1독립만세 등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충을 다하여 의를 행한 자에게 이와 같은 징역을 과한다면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해치며 충량을 함해하는 자에 대해서 어떤 율로써 처형한다는 건가!”라고 재판장 앞에서 외쳤다. 그는 평생을 약한 자를 위해 싸우다 말년을 수원에 거했다.

그 외에도 김제원 홍돈후 임면수 차희균 김세환 이선경 등 민족을 사랑하는 자생 크리스천들이 ‘3·1독립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을 주도했다.

베풀 ‘시’ 아닌 ‘모실 시’의 시은관 사역

선대의 민족교회 정신은 오늘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전교인 1100여명은 노숙인 급식 등을 지원하는 ‘사랑의 손길’을 800회째 하고 있다. 본당 옆 시은관에서 외부 기관 도움 없이 순전히 교인들 손에 의해서다. 급식 때마다 140∼220명이 몰린다. 매주 50여명의 교인이 투입돼 급식은 물론 독거노인의 반찬배달까지 한다. 매주 첫 주일 성찬식 헌금은 전액 구제에 쓴다.

교인들은 동네 채소가게 주인이 보내는 채소, 이웃 사찰이 보내는 쌀 포대 등으로 힘을 얻는다. 이러한 나눔 행사에 ‘리액션’이 가장 큰 그룹은 교회 청년들이다. 헌금 개념이 약한 그들은 중장년 신앙의 선배들이 팔 걷어붙이는 것을 보고 물질로, 또는 봉사로 나서기 시작했다.

월워스가 찍은 사진 속 부모 세대. 화성 성벽 위에 가난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좇아 오늘을 이뤘다. 그들은 가난해도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예수공동체 수원종로교회가 한 세기를 훌쩍 넘었다. 화성행궁, ‘바실리카(basilica) 앞 교회’는 역사의 길목 1번 국도에서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수원=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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