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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신통술, ‘MB 심판론’ 지웠다

박근혜 신통술, ‘MB 심판론’ 지웠다

시사INLive | 천관율 기자 | 입력 2012.04.0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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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라졌다. 곳곳에 흔적은 남았는데, 아무튼 사라졌다. 여야가 전열을 정비하고 본격 총선 국면으로 접어든 2월 이후, 이번 총선 최대 화두라던 정권심판론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청와대 선거 개입 논란이 일어도 민간인 사찰 의혹이 다시 불거져도,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쟁점으로 떠오를 기색이 없다. 이쯤 되면 '이명박 실종사건'이라 할 만하다.

유력한 용의자는 둘이다. 박근혜, 그리고 한명숙. 총선 국면에 접어든 2월 이후 여야 사령탑의 공방전을 분석해보면 정권심판론이 증발해버린 과정이 보인다. MB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되살리려는 한명숙 대표의 싸움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현재까지는, 박 위원장이 MB를 지우는 데 성공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범죄자가 현장에 단서를 남기듯 정치인은 말 속에 증거를 남긴다. 박근혜·한명숙의 말을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이 잡은 프레임이 보인다. < 시사IN > 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트리움(TREUM)은, 박근혜·한명숙 체제가 갖춰진 1월15일부터 두 사람이 내놓은 말을 따라가 보았다. 비대위·최고위 모두발언, 방송기자클럽 토론회, 관훈클럽 토론회를 원자료로 여야 사령탑이 구사하는 담론을 분석했다.





ⓒ뉴시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오른쪽)가 1월17일 국회 한나라당 대표실을 방문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시사IN > 과 트리움이 이번 분석에 사용한 담론 네트워크 분석은 발언 내용을 사람이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계산에 의존한다. 발언에서 각 키워드가 등장하는 빈도, 키워드 간의 거리(이를테면 문장에서 각 키워드의 위치)와 키워드의 네트워크를 분석해 '담론 네트워크 지도'를 만든다.

예를 들어 < 그림 1 > 은 박 위원장의 담론 구조를 네트워크 지도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도에서 노드(점)의 색상은 의미 덩어리를 뜻한다. 즉, 같은 색깔의 노드는 비슷한 의미 블록인 셈이다. 노드의 크기는 중요도를, 링크(선)의 화살표 방향은 논리적인 선후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비대위에서 MB 언급 안 해

박근혜 담론 지도에서 '국민'을 제거하면 '심판' '요구' '변화' 같은 키워드가 서로 연결이 끊어진다. 이처럼 다른 키워드를 서로 연결해 담론을 완성하는 교차로가 있다. 더 붐비는 교차로일수록 더 많은 키워드를 연결해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 그림 1 > 에서 크게 두드러진 노드들이 점수가 높은 '교차로 키워드'다.

다음으로 깔때기를 따라 흘러내리듯 담론 지도에서 의미가 흘러가 고이는 키워드가 있다. 말하는 이가 진정 강조하고 싶은 내용인 셈이다. < 그림 2 > 는 이 '깔때기 키워드'로 지도를 재구성한 것이다. 교차로 키워드 중심의 < 그림 1 > 을 '겉의미 지도', 깔때기 키워드 중심의 < 그림 2 > 를 '속의미 지도'라고도 부른다.

"우아한데요. 세련된 아웃복서예요." 분석 결과를 해석하던 트리움 김도훈 대표가 감탄조로 말했다. 그가 들여다보던 것은 박근혜 위원장 담론 지도다. 우아하다? 아웃복서? 담론 분석 전문가의 입에서는 정치권에서 듣기 힘들던 표현이 연이어 나왔다. 무슨 뜻일까. "'변화'를 자기 키워드로 선명하게 가져왔어요. '국민'의 '삶'을 '변화'시켜서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겠다는 구조인데, 그 중에서도 핵심 키워드는 '변화'예요. 교차로 키워드 점수가 가장 높죠. 안철수 교수의 담론 지도를 분석해보면 변화가 핵심으로 나옵니다. 마치 그걸 연구한 것 같네요. 반면 MB는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보세요, 담론 지도에 이명박이 없죠?"

그러고 보니 그 말대로다. 박 위원장은 분석 대상이 된 비대위 모두발언과 토론회 발언 어디에서도 '이명박'을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놀라운 사실 하나. 박 위원장은 이번 분석 대상이 된 비대위 모두발언에서 단 한 번도 '이명박' 또는 '대통령'을 언급한 적이 없다. '정부'는 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중국 정부 또 한 번은 노무현 정부다.





토론회에서 질문의 내용상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 박 위원장은 '현 정부' 또는 '이 정부'라는 표현을 쓴다.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두 번,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두 번 언급했다. 역시 '이명박'은 없다. 최근 두 달 동안 박 위원장이 '이명박'을 입 밖에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 이 정도면 계산된 전략으로 봐야 한다.

1997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는 인기가 바닥이었던 김영삼 대통령과 차별화하겠다며 '김영삼 인형 화형식'까지 벌였다. 역효과였다. 그럴수록 유권자는 눈앞의 선거를 정권심판 선거로 더욱 선명하게 인식했다.

이회창 후보가 '김영삼의 그림자'를 정면돌파하려다 실패했던 인파이터였다면, 박근혜 위원장은 은근슬쩍 싸움터를 옮겨버리는 아웃복서다. '이명박과의 차별화'를 외치지 않고, 그저 '변화'를 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차별화를 시도한다.

이런 추상적인 주장이 먹혀들까. 이명박 그림자를 지우기에는 지나치게 교과서 같은 말씀으로 보인다. 기자가 갸우뚱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김도훈 대표가 다음 그림을 보여준다. < 그림 2 > 다. 담론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 고이는지를 보여주는 깔때기 키워드 지도다. 동심원의 가운데 있을수록 중요한 단어인데, 엉뚱한 단어가 가장 가운데 있다. '25% 룰'.

"이게 박근혜 담론의 진짜 핵심입니다. 변화란 무엇이냐, 곧 공천입니다. 공천이란? 25% 물갈이죠. 변화는 곧 공천. 공천은 곧 물갈이. 고로 물갈이 공천을 잘하면 변화 세력, 이걸 못하면 과거 세력. 2월부터 박 위원장은 이 프레임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합니다. 누가 변화 세력인지를 재는 척도가 'MB와의 거리'에서 '공천 물갈이'로 바뀝니다. MB를 말하지 않고 MB를 자연스럽게 지워냈어요."





물갈이는 원래 다수당이 쓰기 쉬운 전략이다. 잘라낼 의원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소수당 현역 의원은 어려운 선거에서 살아남은, 경쟁력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물갈이 대상으로 보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차이는 또 있다. 새누리당은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사실상 '박근혜 오너 정당'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계파 간 연립 정당이다. 친노·486·호남계·시민사회계 등이 복잡하게 얽혔다. '공천 물갈이 경쟁'이 붙은 순간, 민주당은 기울어진 축구장 아래쪽 필드에서 뛰는 선수꼴이 됐다.

전면전에서 밀려도 국지전은 이긴다

박 위원장은 정권심판론이라는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공천 경쟁이라는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찾아 들어갔고, 그 국지전에만 집중해 큰 전과를 올렸다. 분석 기간의 비대위 모두발언에서 박 위원장은 '공천'을 모두 67번 말했다. 자신의 입버릇인 '국민'(72번)과도 비슷할 정도다. 반면 민주당의 공천은 진통과 난맥상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박근혜 위원장의 '변화=공천' 프레임은 빛을 발했고 민주당은 변화에 처진 구태 세력으로 몰렸다.

새누리당 선대위 이상일 대변인은 공천이 마무리된 3월22일 논평에서 "새누리당은 감동 공천, 민주당은 짜증 공천"이라는 논평을 냈다. 이 표현이야말로 박근혜식 담론 전략의 핵심이 담겨 있는 '국지전 승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박근혜식 담론 전략에는 '도망갈 길'을 마련해두는 노련함도 있다. < 그림 2 > 의 오른쪽 아래 붉은색 블록을 보자. '총선' 결과와 '대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혹 총선에서 패배한다 해도 대선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속내가 읽힌다. '분리'는 의외로 깔때기 키워드 2위로 분석됐다. 언론이나 청중은 이 대목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말하는 본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키워드라는 것이 컴퓨터의 분석 결과다.





민주당으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 그림 3 > 을 보자. 한명숙 대표의 담론 지도다. 크게 그려진 노드가 중요한 교차로 키워드다. 단연 '이명박'이다. 모든 담론이 '이명박'으로 통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한 대표는 MB를 모든 논의의 출발이자 귀결로 삼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언론 환경이 불균형이어서 그랬을까. 김 대표의 생각은 좀 다르다. "권투로 치면, 한명숙 선수가 아주 강력한 라이트훅을 휘두릅니다. 그게 '이명박'이죠. 그런데 스윙이 너무 크고 목표가 불분명해요. 발 빠른 아웃복서 박근혜를 맞히지를 못합니다." '변화=공천=물갈이'와 같은 간결하고 명료한 프레임을 내놓지 못하고 모든 문제가 '이명박'으로 귀결되면서, 정권심판론이 박 위원장까지 타격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다.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국회 내내 MB와 협력은 조용하게, 갈등은 요란하게 했다. 최소한 대중의 기억에서 MB와 박근혜는 한 묶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 대표는 한명숙 대표가 정권심판론으로 박 위원장까지 공략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정교한 담론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야권 일각에서 최근 거론되는 '이명박근혜'와 같은 신조어가 효과적일지도 그는 확신하지 못한다.

김 대표는 이어서 < 그림 4 > 를 보여줬다. 한명숙 대표의 깔때기 키워드로 그린 '속의미 지도'다. 뭐가 문제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요, 일단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김 대표는 두 사람의 담론 분석을 하며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조지 부시(공화당)와 존 케리(민주당)가 계속 떠올랐다고 했다. 부시가 짧고 간결하게 공격을 하면, 케리는 길고 꼼꼼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끝까지 들으면 케리가 하는 말이 옳아요. 문제는 소수 정치 고관여층을 제외하면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다는 거죠." 2005년 셰릴 숀하트 베일리가 두 사람의 연설을 분석해 쓴 논문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한국판 존 케리' 한명숙 대표는 한·미 FTA에 대해서도, 강정 해군기지에 대해서도, 왜 참여정부 당시와 시각이 달라졌는지를 길게 설명한다. 한 대표가 이 두 주제에 메시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동안, '한국판 부시' 박근혜 위원장은 '말바꾸기'라는 짧은 화두 하나를 툭 던졌을 뿐이다( < 그림 1 > 을 보면 이는 박 위원장에게 그리 중요한 키워드조차 아니다). 메시지는 한 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투자하는데, 늘 공세는 박 위원장이 잡는다. 반면 새누리당의 공천 난맥상이 드러날 때면, 박 위원장은 해명하지 않고 흘려버린다. "공천은 시스템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르고를 떠나, 효율적인 아웃복싱이다.

터미널 식당과 전문 식당의 차이

김도훈 대표는 < 그림 4 > 에서 한명숙 대표의 깔때기 키워드로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가 나오는 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신념체계의 중심에 이런 개념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물죠. 다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큰 개념이 너무 여러 종류가 나열됐어요." "메뉴가 100개가 넘는 터미널 식당과, 한 메뉴만 파고드는 전문점의 차이 같은 건가요?" "뭐, 그런 거죠."

프레임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축적된 민심의 저류다. 그런 의미에서, 4년 동안 축적된 정권심판론의 기류가 총선 국면 몇 달 동안의 공중전으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여야 대표의 담론 분석이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총선은 전국 선거인 동시에 246곳 동네 선거다. 공중전 결과에 따라 움직이는 표가 수백 표라 해도, 격전지 동네 선거에서는 결과를 바꿀 만한 숫자다. 대세는 유지돼도 디테일은 흔들린다. 그리고 때로는 디테일이야말로 결정적이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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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라졌다. 곳곳에 흔적은 남았는데, 아무튼 사라졌다. 여야가 전열을 정비하고 본격 총선 국면으로 접어든 2월 이후, 이번 총선 최대 화두라던 정권심판론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청와대 선거 개입 논란이 일어도 민간인 사찰 의혹이 다시 불거져도,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쟁점으로 떠오를 기색이 없다. 이쯤 되면 '이명박 실종사건'이라 할 만하다.

유력한 용의자는 둘이다. 박근혜, 그리고 한명숙. 총선 국면에 접어든 2월 이후 여야 사령탑의 공방전을 분석해보면 정권심판론이 증발해버린 과정이 보인다. MB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되살리려는 한명숙 대표의 싸움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현재까지는, 박 위원장이 MB를 지우는 데 성공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범죄자가 현장에 단서를 남기듯 정치인은 말 속에 증거를 남긴다. 박근혜·한명숙의 말을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이 잡은 프레임이 보인다. < 시사IN > 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트리움(TREUM)은, 박근혜·한명숙 체제가 갖춰진 1월15일부터 두 사람이 내놓은 말을 따라가 보았다. 비대위·최고위 모두발언, 방송기자클럽 토론회, 관훈클럽 토론회를 원자료로 여야 사령탑이 구사하는 담론을 분석했다.





ⓒ뉴시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오른쪽)가 1월17일 국회 한나라당 대표실을 방문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시사IN > 과 트리움이 이번 분석에 사용한 담론 네트워크 분석은 발언 내용을 사람이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계산에 의존한다. 발언에서 각 키워드가 등장하는 빈도, 키워드 간의 거리(이를테면 문장에서 각 키워드의 위치)와 키워드의 네트워크를 분석해 '담론 네트워크 지도'를 만든다.

예를 들어 < 그림 1 > 은 박 위원장의 담론 구조를 네트워크 지도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도에서 노드(점)의 색상은 의미 덩어리를 뜻한다. 즉, 같은 색깔의 노드는 비슷한 의미 블록인 셈이다. 노드의 크기는 중요도를, 링크(선)의 화살표 방향은 논리적인 선후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비대위에서 MB 언급 안 해

박근혜 담론 지도에서 '국민'을 제거하면 '심판' '요구' '변화' 같은 키워드가 서로 연결이 끊어진다. 이처럼 다른 키워드를 서로 연결해 담론을 완성하는 교차로가 있다. 더 붐비는 교차로일수록 더 많은 키워드를 연결해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 그림 1 > 에서 크게 두드러진 노드들이 점수가 높은 '교차로 키워드'다.

다음으로 깔때기를 따라 흘러내리듯 담론 지도에서 의미가 흘러가 고이는 키워드가 있다. 말하는 이가 진정 강조하고 싶은 내용인 셈이다. < 그림 2 > 는 이 '깔때기 키워드'로 지도를 재구성한 것이다. 교차로 키워드 중심의 < 그림 1 > 을 '겉의미 지도', 깔때기 키워드 중심의 < 그림 2 > 를 '속의미 지도'라고도 부른다.

"우아한데요. 세련된 아웃복서예요." 분석 결과를 해석하던 트리움 김도훈 대표가 감탄조로 말했다. 그가 들여다보던 것은 박근혜 위원장 담론 지도다. 우아하다? 아웃복서? 담론 분석 전문가의 입에서는 정치권에서 듣기 힘들던 표현이 연이어 나왔다. 무슨 뜻일까. "'변화'를 자기 키워드로 선명하게 가져왔어요. '국민'의 '삶'을 '변화'시켜서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겠다는 구조인데, 그 중에서도 핵심 키워드는 '변화'예요. 교차로 키워드 점수가 가장 높죠. 안철수 교수의 담론 지도를 분석해보면 변화가 핵심으로 나옵니다. 마치 그걸 연구한 것 같네요. 반면 MB는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보세요, 담론 지도에 이명박이 없죠?"

그러고 보니 그 말대로다. 박 위원장은 분석 대상이 된 비대위 모두발언과 토론회 발언 어디에서도 '이명박'을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놀라운 사실 하나. 박 위원장은 이번 분석 대상이 된 비대위 모두발언에서 단 한 번도 '이명박' 또는 '대통령'을 언급한 적이 없다. '정부'는 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중국 정부 또 한 번은 노무현 정부다.





토론회에서 질문의 내용상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 박 위원장은 '현 정부' 또는 '이 정부'라는 표현을 쓴다.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두 번,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두 번 언급했다. 역시 '이명박'은 없다. 최근 두 달 동안 박 위원장이 '이명박'을 입 밖에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 이 정도면 계산된 전략으로 봐야 한다.

1997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는 인기가 바닥이었던 김영삼 대통령과 차별화하겠다며 '김영삼 인형 화형식'까지 벌였다. 역효과였다. 그럴수록 유권자는 눈앞의 선거를 정권심판 선거로 더욱 선명하게 인식했다.

이회창 후보가 '김영삼의 그림자'를 정면돌파하려다 실패했던 인파이터였다면, 박근혜 위원장은 은근슬쩍 싸움터를 옮겨버리는 아웃복서다. '이명박과의 차별화'를 외치지 않고, 그저 '변화'를 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차별화를 시도한다.

이런 추상적인 주장이 먹혀들까. 이명박 그림자를 지우기에는 지나치게 교과서 같은 말씀으로 보인다. 기자가 갸우뚱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김도훈 대표가 다음 그림을 보여준다. < 그림 2 > 다. 담론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 고이는지를 보여주는 깔때기 키워드 지도다. 동심원의 가운데 있을수록 중요한 단어인데, 엉뚱한 단어가 가장 가운데 있다. '25% 룰'.

"이게 박근혜 담론의 진짜 핵심입니다. 변화란 무엇이냐, 곧 공천입니다. 공천이란? 25% 물갈이죠. 변화는 곧 공천. 공천은 곧 물갈이. 고로 물갈이 공천을 잘하면 변화 세력, 이걸 못하면 과거 세력. 2월부터 박 위원장은 이 프레임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합니다. 누가 변화 세력인지를 재는 척도가 'MB와의 거리'에서 '공천 물갈이'로 바뀝니다. MB를 말하지 않고 MB를 자연스럽게 지워냈어요."





물갈이는 원래 다수당이 쓰기 쉬운 전략이다. 잘라낼 의원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소수당 현역 의원은 어려운 선거에서 살아남은, 경쟁력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물갈이 대상으로 보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차이는 또 있다. 새누리당은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사실상 '박근혜 오너 정당'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계파 간 연립 정당이다. 친노·486·호남계·시민사회계 등이 복잡하게 얽혔다. '공천 물갈이 경쟁'이 붙은 순간, 민주당은 기울어진 축구장 아래쪽 필드에서 뛰는 선수꼴이 됐다.

전면전에서 밀려도 국지전은 이긴다

박 위원장은 정권심판론이라는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공천 경쟁이라는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찾아 들어갔고, 그 국지전에만 집중해 큰 전과를 올렸다. 분석 기간의 비대위 모두발언에서 박 위원장은 '공천'을 모두 67번 말했다. 자신의 입버릇인 '국민'(72번)과도 비슷할 정도다. 반면 민주당의 공천은 진통과 난맥상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박근혜 위원장의 '변화=공천' 프레임은 빛을 발했고 민주당은 변화에 처진 구태 세력으로 몰렸다.

새누리당 선대위 이상일 대변인은 공천이 마무리된 3월22일 논평에서 "새누리당은 감동 공천, 민주당은 짜증 공천"이라는 논평을 냈다. 이 표현이야말로 박근혜식 담론 전략의 핵심이 담겨 있는 '국지전 승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박근혜식 담론 전략에는 '도망갈 길'을 마련해두는 노련함도 있다. < 그림 2 > 의 오른쪽 아래 붉은색 블록을 보자. '총선' 결과와 '대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혹 총선에서 패배한다 해도 대선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속내가 읽힌다. '분리'는 의외로 깔때기 키워드 2위로 분석됐다. 언론이나 청중은 이 대목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말하는 본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키워드라는 것이 컴퓨터의 분석 결과다.





민주당으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 그림 3 > 을 보자. 한명숙 대표의 담론 지도다. 크게 그려진 노드가 중요한 교차로 키워드다. 단연 '이명박'이다. 모든 담론이 '이명박'으로 통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한 대표는 MB를 모든 논의의 출발이자 귀결로 삼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언론 환경이 불균형이어서 그랬을까. 김 대표의 생각은 좀 다르다. "권투로 치면, 한명숙 선수가 아주 강력한 라이트훅을 휘두릅니다. 그게 '이명박'이죠. 그런데 스윙이 너무 크고 목표가 불분명해요. 발 빠른 아웃복서 박근혜를 맞히지를 못합니다." '변화=공천=물갈이'와 같은 간결하고 명료한 프레임을 내놓지 못하고 모든 문제가 '이명박'으로 귀결되면서, 정권심판론이 박 위원장까지 타격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다.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국회 내내 MB와 협력은 조용하게, 갈등은 요란하게 했다. 최소한 대중의 기억에서 MB와 박근혜는 한 묶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 대표는 한명숙 대표가 정권심판론으로 박 위원장까지 공략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정교한 담론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야권 일각에서 최근 거론되는 '이명박근혜'와 같은 신조어가 효과적일지도 그는 확신하지 못한다.

김 대표는 이어서 < 그림 4 > 를 보여줬다. 한명숙 대표의 깔때기 키워드로 그린 '속의미 지도'다. 뭐가 문제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요, 일단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김 대표는 두 사람의 담론 분석을 하며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조지 부시(공화당)와 존 케리(민주당)가 계속 떠올랐다고 했다. 부시가 짧고 간결하게 공격을 하면, 케리는 길고 꼼꼼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끝까지 들으면 케리가 하는 말이 옳아요. 문제는 소수 정치 고관여층을 제외하면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다는 거죠." 2005년 셰릴 숀하트 베일리가 두 사람의 연설을 분석해 쓴 논문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한국판 존 케리' 한명숙 대표는 한·미 FTA에 대해서도, 강정 해군기지에 대해서도, 왜 참여정부 당시와 시각이 달라졌는지를 길게 설명한다. 한 대표가 이 두 주제에 메시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동안, '한국판 부시' 박근혜 위원장은 '말바꾸기'라는 짧은 화두 하나를 툭 던졌을 뿐이다( < 그림 1 > 을 보면 이는 박 위원장에게 그리 중요한 키워드조차 아니다). 메시지는 한 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투자하는데, 늘 공세는 박 위원장이 잡는다. 반면 새누리당의 공천 난맥상이 드러날 때면, 박 위원장은 해명하지 않고 흘려버린다. "공천은 시스템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르고를 떠나, 효율적인 아웃복싱이다.

터미널 식당과 전문 식당의 차이

김도훈 대표는 < 그림 4 > 에서 한명숙 대표의 깔때기 키워드로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가 나오는 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신념체계의 중심에 이런 개념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물죠. 다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큰 개념이 너무 여러 종류가 나열됐어요." "메뉴가 100개가 넘는 터미널 식당과, 한 메뉴만 파고드는 전문점의 차이 같은 건가요?" "뭐, 그런 거죠."

프레임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축적된 민심의 저류다. 그런 의미에서, 4년 동안 축적된 정권심판론의 기류가 총선 국면 몇 달 동안의 공중전으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여야 대표의 담론 분석이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총선은 전국 선거인 동시에 246곳 동네 선거다. 공중전 결과에 따라 움직이는 표가 수백 표라 해도, 격전지 동네 선거에서는 결과를 바꿀 만한 숫자다. 대세는 유지돼도 디테일은 흔들린다. 그리고 때로는 디테일이야말로 결정적이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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