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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진청, 52년 수원시대 넘어 전주혁신도시로 ①] 수원은 한국농업 연속혁명의 근거지였다

[농진청, 52년 수원시대 넘어 전주혁신도시로 ①] 수원은 한국농업 연속혁명의 근거지였다

1970년대 녹색 → 1980년대 백색 → 2000년대 녹색생명산업으로 … 네덜란드 능가하는 생산성 달성

2014-08-12 12:18:51 게재

농촌진흥청이 지난 4일 전주혁신도시에서 현판식을 열고 전주시대를 열었다. 내일신문은 새로운 농진청 전주시대를 맞아 지난 52년간 한국농업혁명을 뒷받침한 농진청 수원시대를 간략히 돌아본다. 


민간농업연구연구소 GS&J인스티튜트 이정환 이사장은 평소 "한국농업, 주눅들 이유 없다"고 주장한다. 토지생산성은 네덜란드에 뒤지지 않고 축산물 생산성도 뉴질랜드보다 낮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구는 네덜란드의 3배, 뉴질랜드의 13배나 되지만 사료곡물과 소맥 이외 대부분 농산물을 상당부분 자급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지난 52년간 일군 연구개발 및 지도사업이 큰 기여를 했다. 

선진국은 농업강대국이다. 미국 일본 등도 근대화 과정에서 필수인 농업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찍 농업전문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미국의 농업연구청(ARS)는 1862년, 일본 농업식품산업기술총합연구기구(NARO)는 1873년 문을 열었다.

①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권농일을 맞아 농진청 작물시험장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해방 이후 농사개량원(1947년), 농사원(1957년)을 거쳐 1962년 4월 1일 수원에 농촌진흥청(RDA)을 설립, 농업연구와 농촌발전을 추진했다. 터는 조선후기 정조대왕이 축만제를 설치하고 서호를 만든 수원시 둔산구 일대에 잡았다. 농촌진흥법에는 농진청 설립목적을 '국가의 기본산업인 농업의 발전과 농업인의 복지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농업과학기술의 진흥을 위한 시험연구사업 · 농촌지도사업 및 농업 관련인에 대한 교육훈련사업'에 두었다. 

◆주곡자급에서 기능성 쌀, 가공용 쌀로 발전 = 농진청 수원시대는 한국농업이 연속혁명을 일군 연대로 기록됐다. 우리는 1970년대 녹색혁명과 1980년대 백색혁명을 거치면서 식량자급과 사시사철 균형잡힌 식단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2000년대 이후엔 생명공학을 이용한 생명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다. 농진청은 또 한국이 이룬 주곡자급과 녹색식생활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고 있다. 

②1980년대 이후 본격 보급한 비닐하우스로 겨울철에도 신선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사진은 1963년 목조하우스 모습. ③통일벼는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와 협력한 결과다. 1975년 필리핀에서 증식한 통일벼 종자를 김포공항에서 내리고 있다.


농진청은 통일벼 종자, 비닐하우스, 농업기계 등을 개발 보급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정남규 제 1대 농진청장 이후 현재 이양호 제 25대 청장을 포함, 이름도 남김없이 묵묵히 일해 온 숱한 농업연구사 지도사들과 직원들이 일군 성과다. 

④농진청은 통일벼 개발 보급으로 1977년 주곡자급을 달성한 녹색혁명에 성공하고 이를 기념해 이듬해 수원 농진청에 녹색혁명성취탑을 세웠다.

한국의 주곡자급은 일대 사건이었다.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허문회 박사는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1966년 선발한 품종 'IR8'에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하고 이를 다시 수확량이 많은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는 '원연종 간 삼원교잡' 방식으로 통일벼 개발의 길을 열었다. 이후 1972년 정부는 통일벼를 본격 보급했고 1977년 식량자급을 달성했다. 농진청은 이를 기념해 '녹색혁명성취 기념탑'을 설립했다. 

한국의 쌀자급과 벼농사는 1980년대 초반 이앙기 도입으로 중흥기를 맞는다. 인구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리는 상황에서 부족한 인력으로도 매년 풍년을 만들어 낸 견인차로 평가받는다. 이앙기는 새로운 못자리 기술과 맞물려 모내기에 드는 노동력을 최소화 했다. 이앙기는 콤바인, 트랙터 등과 함께 노동집약적 벼농사를 가장 편한 농사로 바꿨다. 

농진청은 또 아키바레(추청), 고시히카리 등 일본쌀을 능가하는, 맛있고 수확량도 많은 고품질 다수확 품종을 꾸준히 개발했다. 일품, 호품, 삼광 등이 1980년대 이후 꾸준히 개발됐다. 농진청은 10a에 500kg 이상을 수확할 수 있고 맛은 아키바레 이상 돼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추진했다. 서호 일대의 농진청 시범포장은 새로운 품종탄생의 산실이었다. 

농진청은 최근 다이어트용 고아미, 어린이 성장촉진용 하이아미 등 기능성 쌀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가공식품에 사용하는 수입 밀가루를 국산 쌀가루로 대체할 수 있는 가공적합용 쌀 생산도 담당하고 있다. 

⑤씨없는 수박을 개발하고 해방 이후 농진청에서 원예산업발전을 이끌었던 우장춘 박사 장례식도 수원 농진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우 박사 묘소는 수원 농진청 경내 여기산에 1대 정남규, 5대 김인환 농진청장 묘소와 함께 있다. 사진은 1959년 영결식. ⑥4-H구락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농번기 탁아소는 1982년 내무부에 사업을 이관할 때까지 농촌생활개선사업 중 하나로 전국적으로 운영됐다.


◆신선채소·과일, 고기반찬 = 농진청은 1980년대 비닐하우스를 본격 보급하면서 사시사철 신선채소를 공급할 기반을 마련했다. 1960년대 플라스틱 필름이 보급되면서 시작한 터널재배가 1980년대를 거치며 비닐하우스, 유리온실 등으로 발달해 백색혁명에 성공했다.

⑦백색혁명으로 사시사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자 농진청은 원예작물 품종개량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고추저항성 벼를 연구하는 모습 사진 농촌진흥청 제공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 등을 이용한 시설재배는 반찬류가 되는 부식채소를 연중 공급할 수 있게 했다. 채소류 생산은 1965년 157만6000톤에서 1980년 767만6000톤, 2000년 1128만2000톤으로 늘었다. 쌀밥만 먹기보다 생선과 채소 반찬을 곁들일 때 복부비만, 고혈압, 고지혈증 등 대사증후군이 발생할 위험이 줄어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농진청은 고기반찬으로 밥을 먹게 하는 기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우는 인공수정기술을 도입해 일소에서 고깃소로 전환했다. 한우 수소의 체중(18개월 기준)은 1974년 289kg에서 1989년 419kg, 2008년 572kg으로 늘었다. 젖소 우유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우량 수정란을 도입해 한국형 젖소를 육성했다. 그 결과 1970년 젖소 한 마리당 우유생산량 4509kg이 1990년 6176kg, 2010년 8584kg으로 늘었다. 돼지도 우량 씨돼지 '축진듀록'을 개발해 보급했고, 양계는 개량종 수입에서 시작했지만 전업양계가 기업에 의한 축산계열화로 발전하자 토종양계를 개발해 산업화하고 있다. 

과일은 채소와 함께 비타민의 주요 공급원이다. 하지만 과일 농사는 자본 토지 기술 집약적이고 자본회수가 늦어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후 발전하는 특징이 있다. 과일 소비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간식이나 후식으로 보편화됐다.

실제 과일생산은 1965년 31만톤에서 1980년 83만3000톤, 2000년 242만9000톤, 2010년 248만9000톤으로 소득향상 곡선에 맞춰 급격히 늘었다.

농진청은 고품질 과일 생산을 위해 키높은 과일나무를 키작은 과일나무로 개량하고 비가림시설 등을 개발했다. 저온저장, CA저장(온도·습도 등을 조절해 오래 저장하는 방법) 등 저장 유통기술개발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