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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출마하려고 그래? 썩어빠진 담벼락에 무슨 그림?”

 

“시장 출마하려고 그래? 썩어빠진 담벼락에 무슨 그림?”

마을 만들기 대표주자 ‘수원 행궁동 예술마을’…주민과 작가 하나돼 예술로 마을에 활기

 

[경기 수원] 요즘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마을 만들기란 평소 개선이 필요하거나 바꾸고 싶었던 생활환경과 이웃과의 친교 등 마을 공동체의 문제를 계획에서부터 실행까지 주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주민 자치형 사업이다. 그 중에서도 ‘수원 행궁동 예술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은 조금 특별한 마을 만들기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 문화재 보호정책으로 인해 성곽 안팎의 도심 슬럼화가 심각해지면서 행궁동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 중심에는 주민자생단체인 ‘대안공간 눈’의 이윤숙 대표가 있다. 행궁동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 씨는 주거공간을 활용해 비영리 전시공간, 지역 커뮤니티, 문화소통공간으로 만들었다. 또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 행궁동 사람들 사업, 철거예정건물을 창작 공간으로 활용하는 행궁동 레지던시, 주민과 함께 완성한 골목벽화 그리기 사업 등을 만들어냈다.

 

행궁동 마을 약도
행궁동 마을 약도. 문화재 보호정책으로 슬럼화된 지역이 예술의 힘을 얻어 지역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이 대표는 “화성 주변과 행궁광장, 신풍지구, 장안지구 등 화성 성역화 사업을 위해 수원시에서 많은 집과 건물을 매입해 허물기 시작하면서 인구수도 줄고 상권도 완전히 죽어 빈 점포가 즐비했다.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차라리 수원시에서 빨리 집을 매입해 주기를 바랐다. 환경이 나빠지자 골목은 불량 청소년들의 모임장소가 되었고 마을은 공동화 되기에 이르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2005년 당시 조각가로 활동 중이던 이 대표는 우선,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사저를 개조해 비영리전시공간으로 만들었다. 당시 문화도시를 표방하면서도 개인 화랑 하나 없던 수원시에 대안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여건에서도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는 지역의 후배 작가들에게 비빌 언덕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전시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다른 지역 작가들이 행궁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 대표는 이들 예술가들과 함께 낙후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한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하나둘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대안공간눈의 이윤숙 대표
조각가이자 대안공간 눈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윤숙 씨는 행궁동 마을 만들기 사업의 선봉장으로 마을 이곳저곳에 활력을 불어넣은 주인공이다.

 

그 사업 중 하나가 바로 벽화 그리기 사업이다. 2010년부터 본격화 한 이 사업은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 행궁동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예술 활동을 통해 오래된 골목의 가치를 되살리고, 화성을 지키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이었다. 북수동 경로당을 시작으로 동네의 좁은 골목들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어려움이요? 많았지요.” 행궁동 마을 벽화사업을 시작했을 당시의 고충을 이 대표는 이렇게 두 마디로 표현했다. “수원시장에 출마하려고 그래? 좁은 골목 다 썩어빠진 담벼락에 무슨 그림을 그린다고 그러느냐?”며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냉소로 대할 땐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작업에 참여했던 북수동 경로당 회원 김천수 어르신은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려고 저러나 의심부터 했었지. 친구 며느리가 하는 일이라는데 안 도와줄 수도 없고 말이지. 마을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는데 어떡해. 작가님들과 함께 경로당 담벼락에 그림도 그리고 작품도 만들고. 그러다보니 삼삼오오 모여서 화투칠 시간도 없어졌어. 화투를 치던 시간이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변했거든. 어제도 방송국에서 나와서 취재해갔어.” 그는 “이제는 노인들이 먼저 나서서 마을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예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경로당 담과 대문에 그려진 벽화-이 벽화는 화가들과 경로당 어르신들의 공동작품이다.
북수동 경로당 담과 대문에 그려진 벽화. 이 벽화는 화가들과 경로당 어르신들의 공동 작품이다.

 

 

경로당 어르신들이 화가들과 함께 수업하며 만든 작품이다.
경로당 어르신들이 화가들과 함께 수업하며 만든 작품들.

 

자동차 한 대 드나들지 못하는 좁은 골목이지만 벽화로 단장한 골목길은 마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꼭 한 번씩 들르는 지역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 행궁동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대안공간 눈’에서는 매주 토요일 3시 벽화골목투어를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주민들이 관리와 보완까지 지속적으로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다.

경기도 군포에서 왔다는 관광객 임은정 씨는 “이곳에 오면 ‘역사와 현대가 이렇게도 어우러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수원화성에 관심이 많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끔 오는데 화성을 관람한 뒤에는 꼭 벽화이야기가 있는 이 골목길을 걷게 돼요. 자전거 타는 소년과 소녀의 그림을 보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담장 위에 늘어진 능소화, 전깃줄에 앉아있는 새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아요.”라며 방문 소감을 들려줬다.

 

관광객 임은정씨는 이곳에 오면 자신이 동화의 나라에 놀러 온 엘리스처럼 느껴져 즐겁다고 한다.
관광객 임은정 씨가 “이곳에 오면 자신이 마치 동화의 나라에 놀러온 엘리스처럼 느껴진다.”며 골목 어귀 담벼락에 앉아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다.
능소화가 그려진 담
능소화가 그려진 담벼락 벽화가 운치를 더한다.

 

주민 스스로 마을의 변화를 시도하자 수원시에서는 울퉁불퉁했던 보도블럭을 걷어내고 황톳길을 조성해줬다. 2011년 수원시 마을 만들기 공모 사업으로 ‘무지개 꽃길 따라 벽화 골목으로’를 진행할 때는 수원시에서 가로등과 돌길을 조성해주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2009년 ‘행궁길 발전 위원회’가 중심이 돼 철거 예정이던 건물을 작가들을 위한 공동창작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자 수원시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해 주기도 했다. 작가들을 위한 수원시의 이 같은 배려로 현재 행궁동에는 분야를 초월한 24팀 30여 명의 작가들이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철거 예정이던 건물이 현재는 30명의 작가들이 입주하여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레지던스로 변했다.
철거 예정이던 건물이 공동창작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30명의 작가들이 입주해 작품 활동을 펼치는 레지던스로 활용 중이다.

 

현재 공동창작공간 ‘행궁동 레지던시’에 입주해있는 북아티스트 손정희 씨는 “나만의 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어서 좋아요. 바로 옆에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 분들도 계시니 네트워크 쌓기에도 좋고, 서로 자극이 돼 작품 활동에 더 몰입하게 되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주민들과의 소통입니다. 보통 창장공간은 폐쇄돼 있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주민 참여 프로그램이 다양해 주민들과 함께 할 기회가 많아요.”라며 “행궁동 레지던시와의 인연이 매우 소중하다.”고 전했다.

레지던시의 입주 기한은 1년이며 입주기간 활동내용 평가를 통해 재입주도 가능하다. 단기활동 작가도 공실이 생길 경우 수시로 모집한다. 올해 처음 입주했다는 동양화가 문혜성 씨는 “입주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고 들었어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주한 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작가를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작가들에게는 상당히 행복한 일입니다.”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북아티스트손정희씨는 레지던스에 입주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공유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북아티스트 손정희 씨는 공동창작공간에 입주하면서 작가들과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설치미술가 이선미 씨는 재입주에 성공했다. 버려진 폐 안경알로 작품을 만드는 이 작가는 올해 베를린에서 초청을 받아 출국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 와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됐지요. 한때 마음을 다쳐 작품 활동을 접기도 했지만, 이곳에 와서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곳을 “작가들의 창작열을 자극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나무로 탈을 만들며 우리소리를 연구하고 있는 김남수 작가는 아예 이곳에서 숙식을 해가며 활동하고 있다. 24시간 오픈돼있는 자유로운 공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그는 “이 정도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지만 작가들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복지 사업, 작품 매입 등의 적극적인 후원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동양화가 문혜성씨는자신만의 작품 공간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동양화가 문혜성 씨는 “한때 마음을 다쳐 작품 활동을 접기도 했지만, 이곳에 와서 힘을 얻었다.”며 “자신만의 작품 공간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레지던스 입주 작가들은 행궁동 마을 사람들에게 재능을 기부하고 주민들은 재능을 얻을 기회를 얻고 있다.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마을 학습’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을 만들기 사업은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침체된 지역경제와 관광을 활성화시켜 자칫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수도 있었을 행궁동 마을에 소중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정책기자 장병연(프리랜서) bomnae5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