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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갈비'에는 이런 역사가 있네

'수원갈비'에는 이런 역사가 있네

수원갈비가 유명한 이유가 다 있다

등록일 : 2012-11-09 01:19:29 | 작성자 : 시민기자 김홍범

수원갈비

 
수원에서 1박 2일을 체험관광을 하고자 한다면 꼭 둘러볼 곳이 있다. 바로 수원갈비를 맛볼 수 있는 수원갈비 전문점들인데 수원엔 타 어느 지역 보다 수원갈비의 참맛을 깊게 알아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무수히 많다.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을 비롯하여 삼부자갈비, 본수원갈비, 가보정갈비, 연포갈비, 보신갈비, 송풍가든, 화성숯불갈비 등이 유명하며 인계초석거리 부근엔 수원갈비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수원갈비 전문점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도 있다. 

일제 말기 장지동에 살던 사람들이 그 곳에 수원비행장이 생기자 집단으로 옮겨 새말(신촌)에 우시장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원래 전국적으로 유명한 우시장은 수원면 북수리(북수동)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전국엔 655개의 우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수원 우시장은 1년 거래량이 2만두 이상일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름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의 우시장이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정조시대로 올라가게 된다. 새도시 육성정책으로 인해 화성을 축성하고 수원을 자립할 수 있도록 둔전을 경영하는가 하면 농민들에게는 농사에 지을 종자와 소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둔전의 한장면(수원화성박물관)

 
화성축성 당시 수레를 끄는 소들이 많이 필요로 했는데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에 소 80마리와 말 252마리가 더 소요됐다고 한다. 

화성축성이 완료되고 688마리의 많은 소들은, 지역 농민이 이곳에서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일부는 농민들에게 또 일부는 둔전에 이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정조는 수확기엔 수확의 절반을 거둬들이고, 소는 잘 키워 3년에 한 마리씩 갚도록 했는데 정조시대 그런 정책이 세월이 지나 지역에서 소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소를 팔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이 흘러 일제감정기 시대인 1918년 일제 총독부가 실시했던 조사에 따르면 수원 우시장에서 한 해 거래되는 소가 2만여 마리로 거래됐을 정도로 당시 수원우시장은 전국의 3대 규모였다고 한다. 
특히 성황을 이뤘던 곳이 다름 아닌 매향여중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우시장 옛 수원 사진

 
1920년경에는 수원우시장의 규모는 3000여 평에 이르렀고 화성 성안에서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해방이 되고 1960년대 들어오기 까지 우시장은 지금의 영화동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영화동 우시장의 명성은 그 이전보다 더욱 커졌다고 한다. 
1960년대 1번국도가 지나가는 영화동 우시장의 규모는 한해 2만 4천여마리의 소가 거래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하지만 수원의 도시화와 농촌의 기계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그에 따라 1978년도엔 곡반정동(신촌)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고 1996년에는 우시장이 폐쇄되면서 수원우시장은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200여 년간 이어졌던 우시장의 명성은 지금은 수원갈비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많은 소가 있는 지역에서는 음식에 필요한 소를 얻기 쉬워 자연스럽게 먹거리 문화 또한 풍부해 진다. 
수원에서 국밥이나 갈비탕, 수원왕갈비가 유명한 이유는 정조때 부터 우시장의 명성이 음식문화와 섞여 자연스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해져 오고 있던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수원갈비의 유래 수원갈비는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맛이 전해지고 각종 매스컴을 타면서 전 국민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수원갈비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우선 재료를 쓸 한우갈비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요인 이였고, 1940년경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엔 화춘제과를 경영했던 이귀성씨가 해방이 되면서 영동에 2층 목조건물을 사서 ‘화춘옥‘ 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40여세였던 이씨는 이곳이 시장 안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성안 우시장이 가깝다는 것에 착안, 음식장사의 경험도 없이 먼저 해장국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60년대 유명했던 화춘옥

 
이후 화춘옥 해장국은 다른 집과는 달리 소갈비를 푸짐하게 넣어 주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고 도처에서 손님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싼 갈비를 넣어주다 보니 해장국의 질은 좋았지만 장기적인 면에서 이익에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갈비에다 양념을 넣고 무쳐서 재어 놓은 다음 맛있는 갈비의 맛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양념갈비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숯불에 구운 이 갈비는 그 맛이 일품이어서 단연 인기품목으로 떠올랐고, 화춘옥 갈비는 갈비대가 크고 양이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다른 음식에서는 이익이 남고 갈비에선 밑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 수원갈비가 처음 전해진 곳은 서울지역이었다. 서울에서 수원 우시장을 찾으면서 수원갈비 맛을 보고 서울에 가서 수원갈비집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수원갈비집이 서울에서도 많이 생겨나고 그 맛이 사람과 사람들의 입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지금 수원엔 내로라하는 수원갈비집이 많고 그 명성은 수원갈비라는 간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날 정도로 그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수원갈비엔 수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수원갈비의 유래를 따라 지역의 역사 탐방을 해보는 것도 나름 지역을 이해하는데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으며, 어느덧 수원의 역사가 돼버린 ‘수원갈비‘ 그에 따른 수원갈비의 역사를 알아보는 공간과 맘껏 즐길 수 있는 공간 또는 수원갈비거리가 조성되는 것도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는데 좋은 방법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