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원칙·不通 두 이미지의 승부사… 보수정당 위기때마다 등판
[대선후보까지 걸어온 길] [③ 정치 입문~대선후보] 정치 입문 - "외환 위기로 지난 세대의 업적이 물거품될까 걱정" 한나라 탈당 - 지지율 20%→1%로 떨어지고 정몽준과 연대도 불발 소방수 역할 - 2004년 총선 앞두고 소장파의 分黨論에 "안 된다" 2006년 6월까지 2년3개월간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실패·재기 - 2007년 패배 딛고… 黨名 바꾸며 정권 재창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지난 15년간 보수 정당이 크고 작은 선거에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선거의 여왕'이지만 '대선의 여왕'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는 원칙과 불통, 두 이미지를 가진 승부사다. ◇탈당 그리고 '소방수' 박근혜는 10·26 이후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다"며 정치를 멀리하고 서울 양재동 테니스코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3주 남겨둔 시점에서 이회창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선친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유세에 나서 DJP 연대에 대해 "김종필 총재가 김대중씨를 미는 처세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박근혜는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박근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탈당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20% 안팎을 넘나들며 2~3위로 뛰어올랐고 "박근혜가 대권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 호남 세력과 영남권의 반(反)이회창 세력, 충청지역 정치권 등을 포함한 '박근혜 중심 정계 개편론'도 솔솔 피어났다. 탈당 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던 박근혜는 '조건이 맞으면 (그런 연대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해 5월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도 만났다. 그러나 노무현·정몽준이 인기몰이를 하면서 6월 이후 박근혜 지지율은 1% 안팎으로 떨어졌다. 정몽준 의원과 연대하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결국 불발됐다. 박근혜가 처음엔 연대에 적극적이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의인(義人)'이라며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가 정몽준 캠프에 참여한 이유 등으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박근혜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내가 요구했던 정당 개혁안이 모두 한나라당에서 받아들여졌고, 나라를 위해서라도 이 후보를 다시 한 번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박근혜는 그해 11월 이 후보 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것이 후일 대선자금 수사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정가에선 "박근혜가 복당 대가로 한국미래연합의 부채 해결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었다. 박근혜는 그러나 "대선 지원 유세를 위한 당의 공식 지원 활동비였지 복당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다시 패배한 뒤 박근혜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남경필 의원 등 수도권 소장파와 영남 개혁 성향 의원들이 총선 승리를 위해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박근혜를 대표로 밀어 당선시켰다. 이들은 총선을 앞두고 분당(分黨)까지 검토했지만 박근혜 후보가 "분당은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는 '차떼기'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50석도 힘들다"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 정신을 발판으로 121석을 얻어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그는 2년 3개월 동안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여당 대표 8명을 갈아치웠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선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알려지고 선거운동 마지막 날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 유세에 나서며 호남·제주를 뺀 모든 시·도에서 단체장과 의회를 휩쓸었다. ◇2007년 대선 도전 실패와 재기 당심(黨心)을 장악한 박근혜는 2007년 대선 도전에 나섰으나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 건설을 바탕으로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민심'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수도 이전 반대 투쟁'을 발판 삼아 보수층에서 박근혜의 지지 기반을 흡수해 갔다. 결국 2007년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는 고배를 마셨다. 박근혜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경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이명박·박근혜 두 진영의 대립은 계속됐다. 이 대통령이 박근혜를 "국정의 동반자로 대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당 운영은 친이계가 독점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12월 29일 단독 회동에서 박근혜에게 "입각해서 같이 일하자"고 사실상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당에 남아서 일하겠다"고 했다. 2008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 주요 인사들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공천심사위 구성 과정에서 탈당 움직임이 있던 친박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근혜 생일(2월 2일)을 전후해 몇 가지 약속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 지역구는 친박계로 교체한다' '친박 측이 절대 교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교체하지 않는다' 등이 골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친박 핵심 김무성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의 인기를 업고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만들어져 14석을 얻기도 했다. 이 대통령과 박근혜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박근혜는 "당론으로 (수정안을) 확정해도 나는 수용하지 못한다"며 정면으로 정권과 대립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고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두 사람은 2010년 8월에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박근혜는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친이계 물갈이 공천 등을 통해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를 예약했다. 권대열 기자 dykwon@chosun.com [모바일 조선일보 바로가기] [조선일보 구독하기] [인포그래픽스 바로가기] [블로그와 뉴스의 만남 블로그뉴스 바로가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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