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수원특례시의 종합/⋁❶前 수원특례시장(염태영)_활동.비전.어록.영상.보도.논객.자료.

20세기 수원인물은 누굴까?

20세기 수원인물은 누굴까?

수원문화재단 ‘20세기 수원 문화예술인 조망사업’ 추진

등록일 : 2012-11-22 17:59:09 |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문화재단은 20세기 우리나라 문화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수원지역 문화예술인의 삶과 작품을 조망하는 ‘20세기 수원 문화예술인 조망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물 선정기준은 수원 출신이거나 활동한 문화예술인이며, 둘 중 한 조건을 충족하면 된다. 또 이념에 구애 없이 선정하며, 작고 인물로 대상을 한정했다. 
재단은 앞으로 매년 1명씩 문화예술인물을 선정하며 조망할 계획이다.
이에 수원 문화예술인물 운영위원회는 나혜석(미술), 박승극(문학), 이동안(무용), 이종학(역사), 홍성원(문학) 등 5명의 인물 후보군을 선정했으며,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12월 초 최종 인물을 선정한다.



이종학 (서지학자  1927 ~ 2002)

현대 역사학자‧고서 수집가. 호는 사운(史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생지는 경기도 화성이다.  조부는 이병준(李丙駿)이고, 부친은 이세기(李世基)이며, 부인은 윤정의(尹貞儀)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보살핌 속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1955년 종로 5가에 권독서당을 세워서 운영하였고, 1957년에는 연세대학교 근처에 고서점 연세서림을 세웠다.  1970년대 초 장서가로 이름난 서인달로부터 임진왜란과 충무공 이순신 관련 자료를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임진왜란 분야의 자료수집과 연구에 주력하게 되었다. 특히 이순신 연구에 집중하여'난중일기' 번역본의 오역을 바로잡았고, 명량대첩 관련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가 수록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만 알려졌던《사대문궤(事大文軌)를 발굴하여 발표했다.  

이순신 연구에 더해 독도문제와 일제 침략사에까지 시각을 확장시키면서 영토문제와 한일관계의 관련사료들을 수집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영토 분쟁이 발발하면 서명운동이나 시위 일회적 시위운동에 가담하기 보다는 국제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자료와 논리의 발굴에 주력했다. 

특히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점거한 것이 명백한 불법이었음을 알려주는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 부록 한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를 발굴하여 소개했으며, 역사바로잡기운동의 일환으로 독도 영유권확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또 수원시 박물관에 평생 동안 수집한 사료를 기증하였고, 독자적으로 울릉도에 독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 외로도 토지박물관‧경기도박물관‧동학혁명기념관‧독립기념관 외 국‧공립 대학 도서관 등에 수집했던 자료를 기증하였다.  1996년 30권에 달하는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를 발행하였고, '화성성역의궤' 200질을 원형대로 복간하였다. 
이밖의 저서로 '일한병합시말' ‧'일본의 독도정책' 등을 남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 제3회 한림기록문화상과 문화공보부장관 표창 및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 슬하에 딸 이선영(李善暎)을 두었다.

나혜석(서양화가  1896∼1948)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다.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를 지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4월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했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에는 동경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 정부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 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 순례를 통해서 미술 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했다.
그 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울에서 가졌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혼과 정신 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세상의 버림을 받다가 생애를 마쳤다. 작품 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밖에 문재(文才)도 뛰어나 많은 문필 업적을 남겼으며, 동경 유학 때부터 여권 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

박승극(소설가·비평가 1909 ∼ ?) 

경기도 수원 출생.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했으며, 박팔양 시인의 영향을 받아 민족문학에 눈을 뜸. 일본대학 정경과에 입학했으나 사상 관계로 출학 당한 후 귀국.
1929년 6월 '조선지광'에 단편 '농민'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고, 이후 해방되기까지 수필, 시, 문학평론을 왕성하게 발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제1차 검거사건 직후 '푸로문화운동에 대한 감상'(비판 9, 1932.1)을 발표하면서 평단에서 활약했으며,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소재로 하는 소설도 많이 발표했다. 

고향인 수원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 수원지부를 결성하고 계급문학운동에 참가하였다. 1945년 8·15 해방 후 수원군인민위원장 등으로 활동.
이후 1948년 8월 가족과 함께 입북한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문화선전성 예술부장을 역임했으며, 1970년에 조선작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지낸 것을 끝으로 이후의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1930년대 중반에는 창작방법논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평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박승극의 소설은 주로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제재로 하고 있다. 지주나 공장주에 조직적으로 맞서는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카프의 창작 경향과는 구분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자신만의 고유한 소설세계를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주요 평론으로는 '푸로작가의 동향'(조선일보, 1933.9.2∼7)·'최근의 푸로시단'(조선일보, 1933.9.30)·'농촌소설집'(조선일보, 1933.12.10∼14)·'문예와 정치'(동아일보, 1934.6.5∼9)·'리얼리즘소고'(조선중앙일보, 1935.3.11∼30)·'조선문학의 재건설'(신동아, 1935.6)·'예술동맹해산에 제하야'(신조선 4, 1935.8)·'창작방법의 확립을 위하여'(조선중앙일보, 1935.12.14∼22)·'그의 인간사상과 작품 문장에 대하여-이기영검토'(풍림, 1937.5) 등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농민'(조선지광, 1929.6)·'재출발'(비판, 1931.7∼8)·'그 여자'(신인문학, 1935.8)·'색등 밑에서'(신인문학, 1935.10)·'항간사'(신인문학, 1935.12)·'화초'(신조선, 1935.12)·'추야장(신인문학, 1936.1)·'풍경'(신조선, 1936.1)·'백골'(비판, 1936.9) 등이 있고, 광복 직후 발표한 '떡'(문학, 1946.11)·'길'(문학평론, 1947.4)·'별도 성내다'(신조선, 1947.6) 등이 있다. 1938년 수필집 '다여집(多餘集)을 간행했다.

이동안 (전통무용가  1906 ~ 1995)

호는 운학(雲鶴). 경기도 화성군 송곡리 출생.
화성 재인청 도대방이었던 이재학(李在學)의 아들로 태어났고, 집안은 대대로 세습 재인집단이었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14살 무렵 남사당패를 따라 가출하여 1년 남짓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다. 1년 후 집에 끌려와 억지장가를 들었으나 곧 도망하여 광무대에 들어갔다.

줄타기의 김관보(金官寶), 대금, 피리, 해금의 장점보(張點寶), 태평소의 방태진(方泰鎭), 남도잡가의 조진영(趙鎭英), 재담의 명인이었던 박춘재(朴春在)등에게 전통예능을 학습받았으며, 광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대 중반에 활동범위를 넓혀 대동가극단에 참가하면서 임방울, 이화중선 등과 같이 중국과 만주까지 공연했다.

광복 후에는 여성국보단체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1948년 학원을 차려 춤을 가르쳤다. 1957년 부산에서 여성농악단을 조직하여 공연했고, 상경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활동했다. 1973년 서울 신당동에 무용학원을 차려 가르쳤고, 국악협회 온양지부장도 지냈다. 1977년 전통무용연구회가 주최하는 이동안 한량춤 및 발탈발표회에서 서울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979년 9월에 서울의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발탈을 공연했다.

1983년 서울시립무용단 주최 명무전에 출연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발탈의 지정보다는 이동안이 추었던 기본무, 태평무, 진쇠춤, 승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5년 팔순기념공연 후 해마다 자신의 춤 레파토리를 공연하였다. 제자로 박정임, 조영숙, 최병기, 홍경희, 정경파 등이 있다.

홍성원 (문학가 1937 ~ 2008)

1937년 12월 26일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부친은 홍차석, 모친은 장우순이다. 공수의(公獸醫)로 근무하게 된 부친을 따라 강원도 금화로 거주지를 옮겨 해방이 될 때까지 거주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하고 서울로 월남하다.

1949년 부친이 수원시청으로 전근 발령나서 수원시 매교동 136번지로 이사하다. 1950년 수원 매산초등학교, 1955년 수원북중학교, 1956년 수원농림고등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함.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3학년 때 중퇴하였으나 1998년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다. 2008년 사망하여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납골묘원에 묻히다.

주요 수상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61년(25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전쟁'이 가작 입선했고, 1964년(28세)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빙점지대'가, 월간세대 창간1주년 기념문예에 단편소설 '기관차와 송아지'가, 동아일보 50만원 고료 장편소설 모집에 장편소설 '디데이의 병촌'당선됐다.   
이어 1977년(41세) 대한민국문학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85년(49세) 현대문학상을, 1992년(56세) '먼동'으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에는 전작장편소설 '역조'(1966, 창우사), 소설집 '주말여행'(1976, 문학과지성사), '무사와 악사'(1976, 열화당). '흔들리는 땅'(1978, 문학과지성사), '폭군'(1984, 도서출판 나남), 대하장편소설 '달과 칼'(1993, 한양출판사), 대하장편소설 '먼동'(1993, 문학과지성사, 1993년 KBS '먼동'을 39부작 대하드라마로 제작), 소설집 '투명한 얼굴'(1994, 문학과지성사), 장편소설 '그러나'(1996, 문학과지성사), 추모문집 '아름다운 기억'(2009), 일본에서 대하장편 '그러나' 전 3권이 일역 출간(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