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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김충영이 만난 사람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2.11 04:30수정 2023.12.11 10:36

수원화성박물관앞 수원유수 선정비. 2008년 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노송지대에 있던 선정비 10기를 옮겨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조선시대 고을 입구에는 재임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송덕비, 공덕비, 불망비로도 표현)를 세웠다. 수원에는 주로 팔달문과 장안문 밖에 세웠는데 1950년 6.25를 겪으면서 훼손된 것을 노송지대로 옮겨 놓았다.

이후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구읍시절의 수원부 관련 공덕비는 수원박물관에 옮겼고, 수원유수부 관련 선정비는 수원화성 박물관 앞에 10기를 옮겨 세웠다.

1271년(고려 원종 12년) 수주목을 수원도호부로 개명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기에 앞서 수원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1793년 1월 12일 수원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고을 이름이 바뀌었음에도 오랫동안 불렸던 수원이름을 병용(倂用, 아울러 한데 씀)하는 경향이 있었다.

1895년 5월 갑오개혁 때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수원군으로 다시 환원됐다.

화성유수부는 102년간 유지됐는데 그동안 임명된 수원유수는 84명이었으며 평균 재임기간은 15개월 정도였다.

수원유수는 지방관이지만 외관직(外官職, 지방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 중앙의 관직)으로 정2품의 고위 관직에 속해 한성부 판윤(判尹, 한성부의 으뜸벼슬)과 같은 품계였다.

수원유수는 행정의 수반이면서, 장용영 외영의 수장인 장용외사(壯勇外使)이자 화성행궁을 총관하는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이기도 했다.

유수부의 업무를 총괄하면서도 화성축성과 현륭원, 건릉, 화령전의 제사와 임금의 능원 행차를 맞이하는 임무와 장용외사로서 군사조련과 지휘 임무를 가졌다.

 

화성박물관앞 선정비 안내판. 수원유수를 지낸 서유린, 이헌기, 박주수, 박기수, 정원용, 서유구, 이약우, 김병기, 김병교, 이학수의 재임기간과 비 건립연도 등이 표기돼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현재 수원화성박물관 앞에는 수원유수 84명중 7명의 유수 선정비와 2명의 불망비, 판관 1명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특이한 점은 박주수 불망비와 박기수의 선정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선정비가 세웠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유수인 박주수와 박기수는 금성위 박명원과 일가들이다. 순조는 박주수와 외사촌(내종사촌)간이다.

금성위 박명원은 14세에 영조의 셋째 딸 화평옹주와 혼인했는데 영조가 무척이나 사랑해 이현궁(梨峴宮, 종로구 인의동에 있던 궁)에 살게 했다. 사도세자의 어려움도 수시로 자문했다고 한다. 화평옹주가 1748년 22세 때 첫 딸을 낳던 중 난산으로 요절하게 되자 영조는 상가에 5차례나 찾았고, 장사를 지낸 후에도 7차례나 찾았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일화를 모은 ‘효우행록’과 옹주 묘비명을 친필로 지었다. 조선시대 부마는 재혼을 할 수 없었지만 첩은 들일 수 있었다. 이후 박명원은 첩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지만, 집안에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박명원은 1789년 7월 11일 어전회의에서 정조가 38세까지 왕자가 없음은 양주 배봉산의 영우원(永祐園, 사도세자의 묘)이 흉지이기 때문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관련 1789년 7월 11일 정조 실록의 기사내용이다.

‘영우원(永祐園) 천장(遷葬, 이장)을 결정하였다. 상(上, 정조)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 하늘과 땅)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 자연 상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 자연의 기운)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 흙의 성질)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중략) …. 아!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의빈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를 계기로 1789년 7월 15일부터 구읍 이전을 시작, 1789년 10월 7일 사도세자의 묘를 구읍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게 된다. 한편으로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했다. 그리고 1790년 6월 8일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살아 생전에 어제(御製, 임금이 만듬) 신도비문(神道碑文, 묘소 앞에 세운비석) 3개를 남겼다. 충무공 이순신과 우암 송시열, 금성위 박명원 등 세분에 대한 신도비문을 내렸다.

충무공과 우암은 죽은 신하를 기리기 위함이라면, 금성위 박명원은 정조가 생전에 가장 신뢰하였던 신하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금성위의 신도비에 정조가 이르길,

“1789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수원화성)에다 억만년 끝이 없을 기반을 잡은 것은 공의 정성과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내가 그래서 작년 가을 이후로 공을 은인(恩人)이요, 훈구(勳舊, 나라를 구한 공신)로 여긴다 한 것이다.” 라고 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왕실은 물론 수원과 깊은 연을 맸고 있다. 박명원으로부터 6대조 대에서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를 배출했다. 5대조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는 정안옹주(定安翁主, 선조의 5녀) 부마가 됐다.

박명원과 8촌 지간인 능주목사 박좌원은 슬하에 우부승지 박종신을 두었는데 그는 수원유수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박기수를 두었다.

금성위 박명원의 8촌 동생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세 번이나 다녀왔다. 1780년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으로 북경에 갈 때, 8촌 동생인 연암 박지원을 자제군관으로 끼워 넣어 함께 다녀오게 된다. 이때 박지원은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박지원은 슬하에 경산현령 박종채를 두었는데 그는 수원유수와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를 두었다.

또한 박명원과 16촌간인 형조판서 박준원은 슬하에 호조판서 박종보와 가순궁 유빈 박 씨를 두었는데 박종보는 수원유수와 예조판서를 지낸 박주수를 두었다. 가순궁 유빈박씨는 정조와의 사이에서 순조를 낳았다.

박주수, 박기수 선정비. 오른쪽이 박주수, 오른쪽이 박기수 선정비. (사진=김충영 필자)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융·건릉이 조성됐으며, 오늘의 수원 신도시가 건설됐다. 가문에서는 수원유수 3명을 배출했다.

첫 번째, 박명원과 16촌지간인 박준원의 손자 박주수(1828.3~1830.3)는 수원유수를 거쳐 한성판윤, 병조판서를 지냈다.

두 번째, 박명원과 8촌지간인 박좌원의 손자인 박기수(1831.2~1832.1)는 수원유수를 지낸 뒤 이조참의,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세 번째, 박명원과 8촌지간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1876.8~1876.12)는 대제학, 우의정을 지낸 뒤 수원유수를 마지막으로 별세했다.

얼마 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위치한 화성박물관 앞에 있는 방방카페에서 전 장안보건소장 김혜경 씨와 그의 아들 박호우 씨를 우연히 만났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수원유수를 지낸 박기수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와 평생을 기록한 문집 내용을 듣게 됐다. ‘이탄재집’이다.

박기수는 1831년 수원유수로 부임하여 부민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남의 재물을 착복하는 토호(土豪, 지방의 세력가)를 징계함으로써 부민들을 안심하게 했고, 수원 서호에 항미정(杭眉亭)을 건립했으며, 독산성을 개축했다. 수원화성 건설 이후의 수원의 현황을 기록한 ‘화성지(華城誌)군읍지’를 편찬했다.

박주수는 1828년 5월 비변사(備邊司, 중앙의 기구) 등록에 수원 속읍 안산 등 3개 읍에 환곡(還穀, 식량이 부족한 백성에게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제도 )이 적어 나누어 줄 수 없게 되자, 효명세자로 하여금 남한산성의 군량미 사용을 승인받았으며, 여러 차례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세금을 탕감(蕩減, 감해주다)해주고, 구휼미를 나누어 주어 주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박주수는 개인문집이 없어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박규수는 개인문집 '환재집'을 남겼으나 중앙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수원유수를 6개월 정도 지내 수원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재해가 발생하자 중앙에 건의해 구휼미를 제공한 기록이 있다.

수원화성 관련 사료는 정조시대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원유수를 지낸 박기수의 문집인 ‘이탄재집’의 등장은 정조 이후 수원의 역사를 조명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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