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충영 논설위원
- 승인 2022.10.24 04:40
경수산업도로 건설은 동수원 조성의 선결 과제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한 1967년 10월 영등포구 시흥2동에서 수원공설운동장까지 이어지는 19.74㎞ 도로가 1973년 11월 21일 확장 개통됐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수원은 29만272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화성 중심의 구시가지로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즈음 내무부에서 2001년을 목표한 ‘지방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수립 지침이 시달됐다. 이 계획에서 최초로 동수원 신시가지 조성계획이 수립됐다.
동수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경수산업도로 연결이 급선무였다. 한일합섬에서 세류동 수원비행장까지 길이 7.5km, 폭 35m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150억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야 했다. 수원시가 부족한 재원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낸 묘수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수원시는 경수산업도로변에 위치한 주거지역 중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미개발지 4개 지구를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선정했다. 첫번째는 조원동, 연무동에 위치한 파송지구이다. 두번째는 파장동, 송죽동, 조원동, 정자동 일부가 편입되는 파송2지구가 선정됐다. 세번째는 지동, 우만동, 인계동 일부가 편입된 지만인계지구였다. 네번째는 인계동, 권선동, 세류동 일부가 편입된 권선지구가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됐다.
1974년 8월 경수산업도로를 살펴보면 지지대고개에서 한일합섬구간은 35m로 계획되었으나 20m 4차선만 건설된 상태였다. 추가로 15m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내무부 연수원(현 경기도공무원교육원)에서 한일합섬 사거리에 위치한 파장동, 송죽동, 조원동, 정자동 일부지역 71만6972㎡를 1979년 5월 10일 ‘파송2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했다. 파송2지구는 1981년 7월 1일 착공해 1990년 5월 31일 완료됐다.
경수산업도로1공구(한일합섬~창룡문사거리)는 ‘파송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가 통과하는 구간이다. 1971년 5월 12일 사업지구가 결정됐다. 이즈음 한일합섬 사거리까지 경수산업도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또한 수원공설운동장 공사도 진행되고 있어 산업도로 부지와 운동장 부지의 추가확보가 필요했다.
‘파송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는 조원동과 연무동 2개단지로 분리돼 1971년 5월 12일 97만7152㎡가 지구지정됐다. ‘경수산업도로 제1공구’(연장1900m, 폭35m)를 건설하기 위해서 산업도로변 미개발지를 선정했다. 파송지구는 지구지정 6년만인 1977년 2월 28일에서야 착공됐다. 동수원으로 이어지는 경수산업도로 건설계획이 지연됐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은 ‘지만인계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이다. 면적은 112만6979㎡로 연무동과 우만동, 지동, 인계동 일부가 편입됐다. 이곳은 ‘경수산업도로2공구’(창룡문사거리~동수원사거리, 연장1300m, 폭35m)가 지나가는 곳이다.
1979년 5월 10일 ‘지만인계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이 결정됐다. 지만인계지구는 미개발지가 선정됐다. 우만동은 임야와 구릉지였으며, 지동, 인계동은 농경지가 대부분이었다. 1981년 7월 1일 착공해 1989년 5월 31일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완료됐다.
가장 늦게 추진된 곳이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이다. 권선지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녹지지역을 주거지역으로 변경해야 했다.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에서 제시한 동수원신도시조성을 위해서 1979년 11월 18일 권선지구 232만㎡(70만평)이 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됐다.
1980년 5월 29일엔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가 결정됐다. 권선지구는 ‘경수산업도로 제3공구’(연장4300m, 도로폭35m)인 동수원사거리에서 세류동 수원비행장 구간으로 인계동, 권선동, 세류동, 장지동의 일부가 편입됐다.
당시 파송지구, 파송2지구, 지만인계지구는 수원시가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권선지구는 수원시가 추진하지 못했다. 설계 및 각종 행정절차를 마치고 1981년 11월 17일 사업승인이 됨에 따라 공사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형편은 녹록치 않았다. ‘김충영 수원현미경(37)회 수원시청사에 얽힌 이야기’에서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 추진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바 있다.
1979년, 1980년은 10.26, 12.12, 5.18 등이 발생해 혼란의 시기를 겪던 시절이었다. 수원시는 당시 현안사업인 경수산업도로 건설과 수원시청사 신축 등 산적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선지구를 조속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으로 경기침체가 발생했다. 체비지(替費地:토지구획정리 사업의 시행자가 그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환지계획에서 유보한 땅)의 매각이 어렵게 되자 수원시는 사업비 조달을 위해 권선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한국토지공사에 위탁하게 됐다. 위탁조건은 수원시가 공사비로 확보한 체비지를 한국토지공사에 넘겨주는 대신 한국토지공사는 권선지구의 공사를 수행하는 조건이었다.
당시로서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한국토지공사의 경비부담으로 경수산업도로 3공구 역시 계획대로 건설할 수 있었다. 경수산업도로는 35m폭의 7.5km 구간을 1979년 착수하여 1982년 완공했다. 전체 사업비는 152억400만원이 들었다. 경기도는 15억원(9.9%)을 부담했고, 수원시는 26억6600만원(17.5%)을 부담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는 110억3800만원(72.6%)을 부담했다.
문제는 수원시청사 건설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수원시는 권선지구의 체비지를 평당 13만원 정도에 넘겨주었다. 그런데 시청사 부지를 남겨두지 않아 1985년에는 평당 5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매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수원시는 당시 토지공사와 재협상 과정을 거쳐 1985년 말 시점으로 잔여공사를 수원시에서 추진하는 조건으로 정산했다. 당시 80%정도 공사가 진행돼 잔여 20%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의 수원시청사 부지와 의회부지, 홈플러스 부지를 수원시가 되찾아오게 됐다. 이후 잔여공사는 홈플러스 부지를 매각해 잔여공사를 마무리하고 남은 예산으로 권선지구와 연결되는 도로 등을 건설하는데 사용했다.
수원시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경수산업도로를 조기에 개통했다. 이는 동수원시대를 여는 촉매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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