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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외면하는 정치의 종말

현장 외면하는 정치의 종말

중앙일보

입력 2022.04.15 00:26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논란이 많은 지도자였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는 2019년 국민의 정치개혁 기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지지자들의 부패엔 어물쩍 넘어가며 인기가 급락했다. 반부패 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아제르바이잔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 꼽혔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거셌던 지난 1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두려움에 휩싸인 국민을 조롱하며 러시아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날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53%는 러시아가 침공하면 그가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지난 2월 24일 러시아 침공 이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전쟁 초기 세계는 압도적 군사 우위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3~4일이면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의 암살 대상이니 우크라이나를 떠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수도 키이우를 떠나지 않았다. 러시아 탱크·장갑차가 키이우로 진격하고, 미사일이 수도를 폭격하는 상황에서 그는 집무실을 이동하며 화상 연설 등으로 결사 항전을 촉구했다. 지도자의 용기는 국민을 단결시켰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러시아군을 맞아 엄청난 전력 열세에도 키이우 등을 사수하며 침략군을 물리쳤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 항구 도시 마리우폴과 동부 돈바스 지역 점령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젤렌스키 연설 무시한 여야 의원
여당은 직후 검수완박 법안 채택
현장 떠난 정치는 국민 심판받아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검수완박 법안 처리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김상선 기자

젤렌스키 대통령의 용기는 세계를 움직였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독재에 대항해 민주주의·인권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영웅적 항전을 본 미국·유럽연합(EU) 등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하고 우크라이나에 군수 지원에 나섰다.

그런 그가 지난 11일 한국의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화상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참석했다. 나머지 240여 명은 불참해 자리가 썰렁했다.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국·일본·EU·영국·독일·프랑스 의회 화상 연설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전 세계 정치인들은 그의 용기에 기립 박수를 치며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6·25전쟁 때는 한국을 지키려고 미국 등 세계인들이 참전했다. 그런 한국의 정치인들이 화상 연설 현장을 외면했다. 그들에겐 다른 중요한 현장이 있었던가?

화상 연설 다음 날 172석을 가진 민주당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현재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에 한해 남아있는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완전히 없애는 게 골자다. 야당인 국민의힘·정의당은 물론, 대한변호사협회(변협)·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는 성급한 추진에 반대 입장을 보인다. 법조 현장의 변호사들은 “현재의 수사권 조정도 충분히 자리 잡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수사권을 경찰에게 넘긴다면 엄청난 수사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실제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권력형 비리 수사가 지지부진해지고 민생 소송 사건들이 처리가 지연되는 부작용이 잇따른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검수완박을 서둘러 강행하는 이유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대장동 의혹 등 권력형 비리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이 주장하듯 검찰의 과도한 권력은 축소돼야 한다. 검찰이 무리한 수사로 야권을 탄압하고 시민을 억압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는 검찰 수사를 더욱 투명하게 하고 검찰 견제 장치를 강화함으로써 해결해야지, 해방 이후 77년간 이어진 형사사법 절차를 폐지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사법 현장을 안다면 이런 무리한 법안은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지난 5년간 부동산·탈원전 등 현장을 외면한 정책으로 실패를 거듭해왔다. 현장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이념에 사로잡힌 정책은 국민 피해로 이어졌다. 국민은 이를 정권 교체로 심판했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현장을 외면한 정책으로 정권을 잃은 민주당이 다시 현장과 맞지 않는 검수완박 법안을 강행한다면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할 것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중앙일보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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