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수원특례시의 종합/*수원화성(기타 문화재 종합

[김충영 수원현미경(66)] 233년 전 수원하지초록에 기록하지 못한 수원신읍 이야기- 김충영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66)] 233년 전 수원하지초록에 기록하지 못한 수원신읍 이야기- 김충영 박사

승인 2022.04.11 06:00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1947년 화성주변 수원항공사진. 해방 후 2년이 지난 항공사진 수원의 원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사진이다. 성곽의 모습이 또렷하다. 성안의 동쪽은 인가는 별로 없고 농지와 임야가 보인다. 화성주변은 유형원의 표현대로 주변이 평야로 형성돼 있다. (자료=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오늘날의 수원이 건설된 것은 1789년 7월 11일 사도세자의 묘 이장이 논의되면서 시작됐다. 사도세자의 묘 이장지가 옛 수원읍으로 결정되자 구읍은 새로운 장소로 이전해야 했다. 신읍은 반계 유형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반계수록’ 보유편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북쪽 들 가운데 임천(臨川)의 지세를 보고 생각하니, 지금의 읍치(구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들은 산이 크고 굽고 땅이 태평(太平)하여 농경지가 깊고 넓으며, 규모가 굉원(宏遠,크고 넓다)하여 성을 쌓아 읍치로 삼는다면 참으로 대번진(大藩鎭)이 될 수 있는 기상이다. 그 땅 내외에 1만호는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 이장은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본격화됐다. 구읍의 이전은 반계 유형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공역이 시작됐다. 당시 현륭원 조성과 구읍의 이주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신읍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실하게 기록됐다.

구읍의 이주는 319호에 대한 보상으로 실시됐다. 특히 초기에 추진된 244호에 대한 보상기록은 조선시대 지방 읍(邑)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읍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실해 조선시대의 계획도시 화성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신읍이 조성된 지 1년 뒤인 1790년 7월 15일자 ‘수원하지초록’은 719호가 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신읍 거주자는 구읍에서 이사온 469호와 원거주민 63호, 주인을 따라온 노비와 소작인 46호, 타지방에서 이사온 141호 등 도합 719호가 살고 있어 이들에게 각각 쌀을 나눠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719호의 토지와 주거지는 어떤 기준으로 구획되고 분배 됐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초기인 1407년(태종7) 4월20일 한성부에서 도성에 대한 정비계획을 올린 기사를 살펴보면 한양에 새 도읍을 건설할 당시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도시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를 넓히려고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 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비옵건대, 도로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 이미 토지를 받아 집을 짓고 사는 자가 또 친족의 이름으로 속여서 다시 터를 받아, 채소와 삼을 심는 자가 있사오니, 비옵건대, 조사하여 다른 사람이 진고(陳告,윗사람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아룀)하는 것을 허락하여 집을 짓게 하소서” 라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한양을 건설할 당시 토지를 조정에서 나눠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을 참작하면 수원 신읍 조성 때에도 전체적인 계획이 수립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주자들에게는 구획된 토지를 신분에 따라 나눠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읍을 구획한 기준은 ‘주례’가 적용됐을 것이다. ‘주례’는 한양을 건설할 때에도 적용됐다. 이후 조선의 성읍을 조성할 때에도 이 방식이 적용됐다.

조선후기 수원지방지도. 조선 후기에 작성된 수원지방지도. 서쪽에 팔달산, 중앙 부분으로 제주대로가 남북을 관통하고 있다. 동쪽으로 수원천이 흐르고 있다.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 일반적인 성읍의 사례를 살펴보면 배후에 산이 있고 앞 또는 옆으로 하천에 흐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대부분의 경우 북쪽의 산은 고을의 진산이었으며, 읍성의 내부 북쪽에 산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각 고을에는 사직단, 여단, 성황단, 문묘 등 각종 제사를 위한 시설이 있었다.

단묘, 사직단은 읍성 외 서쪽에, 여단은 읍성 외 북쪽, 그리고 성황단은 고을의 진산에 위치했으며, 문묘는 향교에 자리잡았다. 읍성 내에는 객사, 아사, 향청 등이 가장 중요한 건물로 공간구조의 3핵을 형성했다.

그러나 수원의 신읍은 제주대로인 삼남길이 남북을 관통했다. 그리고 광교천(수원천) 또한 남북으로 흘렀다. 팔달산 또한 남북으로 형성돼있어 수원 신읍은 조선의 여느 고을과 다르게 구획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읍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행궁이었다. 행궁은 남북으로 형성된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쪽을 바라보는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선정됐다.

한양도. 1770년 제작됐다. 조선 도시의 기본 모습이다. 북쪽에 주산이 있고, 그 밑에 관아 또는 궁궐이 있다. 좌묘, 우사, 배산, 임수의 형식으로 도시를 배치했다. 궁궐 앞에는 정(丁)의 도로를 만들고 육조를 배치했다.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리고 도로는 남북으로 지나가는 제주대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대로를 행궁 앞으로 끌어 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제주대로를 행궁과 간극을 두어 배치하다보니 제주대로에서 행궁을 출입하는 도로를 연결해야 했다. 그래서 행궁앞에 십자로가 만들어지게 됐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아나 궁궐 앞에 정(丁)의 도로가 형성됐다.

그런데 화성에서는 십자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례였다. 이렇게 하여 수원 신읍은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배치됐다. 신읍은 행궁을 기준으로 배산, 임수, 좌묘, 우사의 도시가 만들어지게 됐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신읍이 건설되자 1790년 6월 18일(정조14) 순조가 태어났다.

그러자 신하들은 신읍에 성곽을 만들 것을 상소하게 된다. 정조는 이때부터 갑자년(甲子年) 구상을 추진하게 된다. 정조는 신읍 조성 4년 반 만인 1794년 1월 7일(정조18) 화성축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신읍은 화성건설을 염두에 두지 않은 관계로 여러 방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정조는 1795년 윤2월에 열리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르는 구상을 하게 되자 신읍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야 했다. 먼저 화성의 전체적인 구상과 설계가 필요했다. 젊은 학자 정약용에게 맡겼다. 정약용은 여덟 가지 축성 기본계획과 설계도를 만들어 정조께 올렸다. 성곽의 규모는 3600보(4.2km)를 계획했다.

화성전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돼있다. 정조는 화성을 버드나무 잎 모습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장안문 앞에 있는 마을이 정조의 지시로 성안으로 들어온 곳이다. 십자로 앞에 큰길이 보이는 곳이 신작로인 시전길이다. (자료=화성박물관)

정약용이 제안한 3600보의 성곽을 만들기 위해 깃발을 꽂자 문제가 발생했다. 화서문과 장안문, 화홍문의 위치가 정해지자 많은 민가가 성곽 밖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1794년 1월 15일 공사현장을 둘러본 정조는 민가를 가급적 성안으로 수용할 것을 지시했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같다. …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당초 3600보로 계획한 성곽은 4600보(5.7km)가 됐다. 그리고 도로망은 제주대로가 중심이 됐다. 남쪽과 북쪽의 문은 이미 신읍초기에 형성된 곳에 배치했다. 동서간 도로는 인근 읍과의 연결과 공사에 따른 자재 수송을 위해 동쪽과 서쪽에 문을 내야 했다.

그런데 서쪽에 팔달산이 남북으로 형성돼 있어 불가피하게 팔달산의 북쪽 낮은 지형을 선택해야 했다. 동쪽문은 광주와 용인을 연결하는 문을 내야했는데, 동쪽은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와 능선을 고려해 동문인 창룡문의 위치가 결정됐다.

그리고 내부의 도로망은 행궁앞 십자로가 중심이 돼 4대문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만들어졌다. 4대 문만으로 출입이 어렵게 되자 은밀한 곳에 5개소의 비밀문을 설치했다. 그런데 십자로는 이미 신읍을 조성할 때 협소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접한 가옥이 점유해 길을 넓히기가 용이하지 않자 소통에 장애되는 집들만 정비하게 된다.

1911년 지적원도. 우리나라 최초로 작성된 지적도이다. 조선시대 십자로 북쪽의 좁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원행을 위해서 정비가 필요했다. 민가의 철거를 줄이기 위해 시전길(신작로)을 새로이 만들었다. (자료=수원시)

당시 십자로를 정비한 내용을 살펴보면 점포4채와 초가 3채, 흙방1채를 매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읍 조성시 완벽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이라 판단된다. 십자로가 완성되고 시전 길이 만들어지자 화성의 가로망이 완성됐다.

또한 시흥로의 완성으로 1795년 윤2월 현륭원 참배와 어머니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위한 행차가 행해지자 시흥로는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조선의 으뜸의 간선도로가 됐다. 이 길은 일제강점초기 1등도로가 됐다. 1938년 국도 제도가 도입되면서 1번 국도로 승격됐다.

Tag

#수원일보#김충영박사#수원현미경#사도세자#반계유형원#반계수록#박명원#수원하지초록#삼남길#광교천#제주대로#순조#정조#혜경궁홍씨#정약용#화성성역의궤#십자로#시흥로#현륭원#1번국도

저작권자 © 수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충영 박사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