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수원특례시의 종합/*수원화성(기타 문화재 종합

[김충영 수원현미경(19)] “수원시가 만드는 굿당을 막아야 한다”고?-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9)] “수원시가 만드는 굿당을 막아야 한다”고?-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승인 2021.05.15 06:05

 

성신사(城神祠)를 중건한 이야기(하)

완공된 성신사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강감찬 장군 동상이 이전하자 성신사 중건공사 진행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윽고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동상 이전지에서는 성신사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원지형이 나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성신사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성신사 건립은 주변의 지세를 종합해 볼 때 동상위치에 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현상변경허가 조건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문위원회는 2008년 5월 12일 부처님 오신 날 현장에서 개최되었다. 성신사를 짓기 위해서는 동상 오른편 화성열차 회차지까지 평탄작업이 되어야 성신사를 건립할 수 있었기에 회차지 철거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강감찬 장군동상을 건립할 때 팔각정을 지어 1층은 매점으로 사용했고 2층은 탁구대 2개를 놓고 운영했던 곳이다. 수원시는 팔각정의 운영에 문제점이 발생하자 팔각정을 철거하고 잔디밭을 조성해 놓았다. 그곳에 2002년 화성열차 회차지를 만들었다. 지난 상편에 설명했던 ‘왕(王)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 몇 점을 수거한 곳이다.

문화재 위원 중 한분이 화성열차 회차지를 깊게 파보라고 주문을 했다. 굴삭기로 몇 번을 파내자 메운 흙층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 흙을 파내려가자 담장 기초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굴착작업을 중단하였다. 이 사실을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8년12월 추가 발굴 조사에 착수하여 2009년3월에 발굴조사가 완료되었다. 성신사는 지표에서 4~5m깊이에서 담장과 주초석 바닥에 깔아놓은 방전과 경사면에 쌓은 석축 등 성신사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성신사 발굴현장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 후 성신사 위치에 일본의 신사(神社)를 건립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수원사람들의 반대로 신사는 팔달산 남쪽인 시민회관 자리에 세웠다. 이후 일제는 성신사 아랫부분에 회주도로를 4~5m 높게 건설하여 성신사를 도로보다 낮은 곳에 가두는 모양을 만들었다. 그래서 성신사는 헐리게 되었다.

회주도로를 축조하기 위해 흙을 복토한 모습. 왼쪽은 대승원, 복토한 경사면, 중간은 팔달산 회주도로, 오른쪽은 성신사터. (사진=필자 김충영)

성신사 유구가 발견된 만큼 성신사를 어디에 건축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성신사 중건 자문위원들은 이미 지형이 변동된 만큼 원래의 위치에는 성신사 건립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따라서 당초 설계한 강감찬 장군 동상위치에 건립하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무렵 김용서 시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원지역 개신교목사 모임인 목회자 연합회에서 성신사 건립 반대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수원시가 앞장서 미신을 섬기는 ‘굿당’ 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목회자 모임에 나가 화성과 성신사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했다. 성신사는 화성행궁과 함께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임을 설명 하자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고 했다.

성신사는 행정절차를 마치고 2009년5월 공사에 착수했다. 사당은 정면 3칸에 측면2칸 ‘―’자형으로 맞배지붕의 건물로 지은 38.44㎡의 건축물이다. 삼문은 정면8칸에 측면1칸에 ‘―’자형으로 맞배지붕의 전사청, 삼문, 재실 등 45.35㎡로 설계됐다. 상량식은 2009년7월10일 진행됐다. 성신사 건립에는 13억8000만원이 들어갔다.

성신사 상량식을 갖는 모습. (사진=이용창사진 작가)

이 가운데 12억원을 기업은행에서 기부했고 나머지 주변정비에 들어가는 돈은 수원시에서 부담해서 완공했다. 성신사 준공 및 위패 봉안 고유제는 2009년 10월 8일에 열렸다. 고유제는 수원시장과 수원시의회의장, 중소기업은행 경기지역본부장과 시공사 대표등 200여명이 참여했다. 현판글은 근당 양택동 선생이 썼다.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 위패 역시 근당 선생이 썼다.

성신사 준공행사인 현판 제막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성연구회는 2002년부터 새해 첫모임을 성신사 고유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9년 성신사 중건이후에는 화성성역의궤의 예에 준해 고유제를 올렸다. 2018년 고유제 때는 화성연구회 한정규 회원이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 위패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1796년 9월 19일 기록인 ‘한글뎡리의궤’ 기록에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 위패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성연구회는 위패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위패글은 근당 양택동선생이 쓰고 위패는 당시 화성연구회 이사장인 필자(김충영)가 새겼다. 2019년엔 새로이 만든 위패를 봉안하고 고유제를 지냈다.

성신사 위패. (사진=필자 김충영)

성신사가 복원(重建)된 지도 벌써 12년이 됐다. 성신사는 화성이 만세(萬歲)토록 흔들림 없이 이어지도록 만든 화성의 상징이다. 이에 준하는 의식(儀式)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성신사(城神祠)를 중건한 이야기' 상편이 나간 뒤 김이환 화성연구회 전 이사장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내 기억엔 그 때 정수자 시인이 시를 낭독했는데 그 시를 소개시켜주면 어떻겠어요?” 그러셨다. 정 시인의 시가 그 때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었다. 화성연구회엔 문인들이 몇 분 있는데 김우영 시인이 당시 고유제문을 짓고 서예가이기도 한 김애자 시인이 글씨를 썼다. 그리고 정수자 시인이 시를 지어 낭독한 것이다. 다음은 정수자 시인의 '성신사 중건을 꿈꾸며'다.

<성신사 중건을 꿈꾸며>

정수자

성신이여

화성을 지켜온 신이시여

성 안팎 사람살이도 온전히 살피는 신이시여

이 자리에 다시금 모시고자

한 마음 한 뜻으로 화성연구회 큰 절을 올립니다

가끔은 옛 터 찾아와 서성거려 보시는지

기와조각 밟다가 허전히 헛기침도 하시는지

집 잃은 깊은 시름을 감히 헤아리면서

오늘 여기 엎드려 푯말을 세웁니다

화성의 정신인 성신이시여

새 물로 지은 정성 고이고이 올리노니

이제는 그림이 아닌 땅 위에 정정히 임하시길

하여 날로 거듭나는 화성의 늠름한 위용을

굽이굽이 늠실대는 성벽의 든든한 어깨를

이백 성상 시간을 꽃으로 피워내는 성돌들의 가슴을

그날같이 한결같이 어루만지며 거니시길

사통팔달 팔달산의 명당인 이곳에서

성벽을 타고 노는 푸른 바람이며 구름이며 햇살을

화성을 찾는 사람들의 자랑 실린 웃음을

모두의 노래 삼아 누리시길 비노니

화성의 혼이신 성신이여

봄빛 속에 높이 기린 이 자리의 소망을

숨죽이며 깊이 새긴 이 순간의 간절함을

첫 마음 그대로 오롯이 간직한 채

더운 손 더운 가슴 뜻을 모아 가리니

성신사에 드시는 그날까지 가리니

성신이시여

부디 예와 같이 거하시며

화성과 안팎을 두루 환히 비추소서

세계 속의 으뜸으로 눈부시게 하소서

화성연구회는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오던 '2021년 성신사 고유제'를 5월 15일 오후 3시 성신사에서 올린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Tag

#수원일보#수원현미경#감감찬장군#성신사#문화재청#화성열차#팔각정#수원시#일본 신사#김용서 시장#굿당#화성행궁#맞배지붕#기업은행#근당양택동#화성성신신위#화성연구회#화성성역의궤#고유제#화성성신지주#김이환#정수자#김애자#김충영박사

저작권자 © 수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수원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