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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예술가 허난설헌과 샤이니 종현의 죽음

천재 예술가 허난설헌과 샤이니 종현의 죽음

김준혁 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1610년 경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에서 종이값이 올라 야단이 났다. 시집 한 권이 출간되어 사람들이 이 시집을 인쇄해서 읽느라 종이 소비가 상상할 수 없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책을 인쇄할 종이가 없자 종이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것이다. 이 종이값을 올려버린 시집 주인공은 중국 시인이 아니라 조선의 시인이었다.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허균이란 인물이 자신의 누나 시를 가지고 와서 보여준 것이 중국 문단을 강타해버린 것이다.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우습게 여기던 명나라에서 조선 여인의 시집을 보기 위해 난리가 난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허균의 누나인 난설헌 허초희였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일본에서는 허난설헌의 시집이 간행되어 널리 애송되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보며 사랑했던 시가 바로 난설헌의 시였다. 이렇게 전통 사회에서 국제적인 지명도를 날리며 아시아 일대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을 받은 이가 과연 우리 역사에 몇이나 될까? 아마도 허난설헌 말고는 없을 것이다.

허난설헌은 평생 집안의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던 조선 여인들의 한을 시로써 표현하여 생명있는 문학의 진수를 선보였다. 그 시절 여자가 학문과 시를 배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하물며 두터운 남존여비의 벽을 뚫고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알고 숨막히는 인습의 굴레에서 붓을 들어 아름다운 시를 수놓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난설헌은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였을 수 있다.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천재로 소문난 아들인 허봉, 허균과 함께 허난설헌에게도 학문을 똑같이 가르쳤다. 서자 출신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지만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게 하기도 했다. 그때 허균은 홍길동전을 만들 기반을 갖추었고, 허난설헌은 인간의 평등에 대한 가치를 배웠다.

다섯 살부터 시를 짓기 시작한 그녀는 일곱 살에 선녀가 살고 있다는 상상 속의 달세계의 궁전인 광한전, 옥황상제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의 상량문을 썼다. 이 훌륭한 문장을 읽은 어른들은 크게 놀라며, 유달리 아름다운 그녀의 용모를 보며 여신동이 나타났다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안동 김씨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가 없었다. 조선사회는 여인이 시를 쓰고, 세상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냉대는 그녀를 고통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세상 여인들의 고충을 동정하고,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다는 이유로 학대받고 굶주림에 울어야 하는 사람들의 비애와 분노를 자신의 고통으로서 노래하였다. 더불어 사회의 불합리와 신분 차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27살 되던 해(1589) 어느 날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단장한 후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동안 자신이 시를 짓고 책을 읽던 초당에서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 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게 하여 달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유언인가! 그녀의 죽음은 바로 오랜 인습에 억눌려 있는 신분질서와 남녀 차별에 대한 항거였다. 예술가로서의 능력과 열정이 넘쳐났지만 그녀는 여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선 사회의 남녀 차별속에 깊은 우울감으로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저항의 죽음이 장엄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너무도 슬프다.

며칠 전 세계적인 아이돌 스타 샤이니의 종현군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겉은 화려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깊은 우울감이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천재 작곡가이자 아티스트로서 전 세계가 열광했던 그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아마도 그는 이 사회의 부조리인 경쟁주의와 물질주의 대신 따스한 사랑의 공동체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종현의 죽음은 개인만의 죽음이 아닌 우리 공동체 전체의 죽음일 수 있다. 종현과 허난설헌이 원했던 누구든지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런 세상을 이제라도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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