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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돋보기] 어떤 의료인의 죽음

[세상 돋보기] 어떤 의료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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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09 저작권자 © 경기일보

내게는 팔십을 넘기신 두 어머님이 계신다. 한 분은 아직까지 혼자서도 거동이 가능하신 친모와 다른 한 분은 거동이 힘드신 시모이다.

친어머니의 경우 정신이 맑으셔서 노년기 전형적인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시지만 시어머니의 경우 노인성 치매에 의한 인지장애로 어린 아이가 되셨다.

식사만 잘 챙겨드리고 돌봐드리기만 하면 별다른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으신다. 노인 특유의 우울감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 분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제 대학동기가 목숨을 끊었다. 성형외과 의사였던 그는 안산 자신의 병원에서 20ml짜리 프로포폴을 네 병이나 맞고 유명을 달리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3주 전 동아리 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그에게 전화를 걸어 늦게라도 나오라고 보채던 우리들에게 “응”이란 외마디만 하던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날 그는 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상가에서 만난 유족들은 그의 뇌종양은 회복 불가능한 악성이었으며 4㎝ 이상 되는 덩어리가 머릿속에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퍼져있었다고 한다. 특히 두정엽 깊숙이 박힌 종양덩어리는 제거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이 전하는 말로는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했단다. 신경계 마비가 오기 시작한 그는 언어기능에도 문제가 생겨 의사소통이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기억력에도 손상이 왔다고 한다.

특히 구정 때부터는 증세가 급속히 악화돼 언제라도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엘리트로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싫었던 그는 희망 없는 치료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지난 달 뇌종양이 걸린 검사의 마지막 분투기를 소재로 한 ‘펀치’라는 지상파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거의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자신의 잘못된 과거력을 바로잡는 데에 사용했다. 결국 드라마는 마지막 순간 아내의 도움으로 사필귀정의 결말로 막을 내렸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는 뻔한 결말이지만 마지막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명확히 의식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준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조문을 온 많은 동기 의사들은 그의 죽음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의료인으로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던 듯하다. 안락사가 불법인 한국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전문의료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 그래도 의료적 지식이 없는 필자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우리는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죽음을 알려야 할 지인들의 명단만을 남겨 둔 그의 막막했을 심정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통을 좀 나누어 줄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그가 없을 자리를 미리 준비토록 하는 배려라고는 생각지 않았을까?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특히 이번처럼 경황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은 더욱 그렇다. 남은 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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