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등 주인공이 변호사인 작품도 많고 변호사가 흉악범과 결탁, 범인의 탈주를 돕는 앤터니 홉킨스 주연의 1990년대 미국 영화 '광란의 시간' 등 영화에도 변호사는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 있다. 기타 숱한 논픽션 역시 독자의 심금을 쥐어뜯는 감동적인 변론과 성토술의 요설(饒舌)을 지닌 변호사는 흔하다. 중국 전국시대의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 고려의 서희(徐熙) 등도 시대만 달리 타고났다면 특급 변호사 감들이다. 근현대사는 어떤가.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과 로베스피에르도 변호사 출신이고 링컨 또한 정직한 변호사의 대명사였다. 프랑스의 미테랑과 미국의 클린턴,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도, 캐나다 총리 장 크레티앙도 변호사 출신이었다.

그럴싸한 변호사는 물론 많다. 그러나 막대기, 빗장, 감옥창살, 절벽, 술집 카운터 등을 뜻하는 영어 bar에 정관사가 붙은 the Bar는 법정과 변호사를 가리킨다. 전문 직종인 변호사에 대한 일반적인 반감이 의외로 무섭고도 끈질기다는 증거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 에세이스트 크레브쾨르는 1782년 런던서 출간한 '미국 농민의 편지'에서 미국의 변호사들을 '잡초'로 묘사했다. 셰익스피어의 독설은 더욱 무섭다. 그는 희곡 '헨리 6세'에서 '우리가 맨 먼저 할 일은 모든 변호사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외쳤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변호사가 있었다면 그런 이상향 묘사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왜? '백해무익한 해충 같은 존재'가 바로 변호사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런 변호인이 참여한 재판제도 자체가 3.5류 코미디극인지도 모른다. 수원지검의 중형 구형에 대한 이석기 변호인단의 주장이 이석기의 항변과 똑같았다. '사건은 국정원의 조작이고 RO도 실체가 없다'고 했다. 그럼 이석기와 그 변호인단의 사상적 본질과 정체는 뭐가 다른지 이해하기 난감하다. 요즘 화제의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이 환생해도 같은 주장을 할 참인가. 한(漢) 고조의 '법3장' 시절까지는 몰라도 송나라의 명판관 포청천(包靑天) 언저리에서 그랬다간 깡그리 '작두 처리 감'이 되고 말 거다.

/오동환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