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여러가지의 칸 ===/◆문화.예술.음악.미술.글.책.영화.디자인_..

'사립 1호' 용인 이영미술관 관장 '김이환'

 

'사립 1호' 용인 이영미술관 관장 '김이환'
"10년 고민 끝 미술관 개관…찾아온 관객에 감동 줄 수 있어 행복"
데스크승인 2013.12.11  | 최종수정 : 2013년 12월 11일 (수) 00:00:01   

   
 

수원을 막 벗어나 용인에 들어서자마자 ‘이영미술관’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반갑게 서 있었다. 흥덕지구 어귀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한 미술관. 평일 낮 시간임에도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2층 전시실에 오르자 선명한 빨강·파랑·검정 등 한국의 색과 형태, 질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미술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관람객들과 담소를 나누던 관장 김이환(78)씨가 손을 내밀었다.



# 산수화 병풍 앞 아버지와 돼지 치던 어머니

그가 미술관 ㄷ자 벽면을 꽉 채우고 있는 전혁림(1916~2010) 화백의 유작 ‘새 만다라’ 앞에 섰다. 전혁림 자신이 꼽은, 또 이영미술관의 대표작인 새 만다라는 소나무 목기에 오방색(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 등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그림을 그려넣은 후 모아 붙인 작품이다. 새 만다라 앞을 지키고 있는 ‘한국의 문’은 전혁림이 끝내지 못한 미완성의 작품이다.

그와 전혁림의 조우는 박생광(1904~85) 화백으로부터 시작됐다. 진주농업학교 30년 선배이기도 한 박생광은 1970년대 서울 수유리에서 살았다. 흑모란 그림에 빠져 수유리를 드나들다 박생광이 세상을 뜰때까지 8년 동안 예술활동을 물심으로 지원한 이가 바로 그다. 이영미술관은 박생광의 작품을 근간으로 설립됐다.

“어릴 적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 앞에서 망건을 쓰고 책을 보시던 모습이 마냥 좋았어요. 그 때부터 그림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는 1935년 경남 고성에서 나고 자랐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 그의 아버지는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그저 생활 능력 없는 남편일 뿐이었다. 선비를 자처하는 남편 탓에 6남매의 살림을 꾸리셨던 어머니.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낮에는 돼지를 치고 밤에는 길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강인한 가장의 모습이다. 어머니에게 돼지 12마리는 6남매의 학비 밑천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돼지는 삶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성인이 돼서도 돼지만 키우면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은 그런 풍요의 상징으로 기억됐죠.”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3천마리 돼지농장의 주인이 됐다. 어머니의 거친 숨결과 진한 땀냄새가 느껴지는 돼지농장은 그가 대기업 CEO로 활동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의 터전이었다. 돼지농장은 용인과 수원의 경계였던 원천유원지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 박생광·전혁림과의 긴 여정 책으로 담아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수유리를 찾았어요. 그러던 어느날 수줍은 듯 망설이며 말씀하셨죠.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 후학들이 그 그림을 보게 하려면 전시회도 열어야 한다고….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박생광의 나이 일흔넷,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당시만 해도 박생광은 수묵산수화·동양화가 득세하던 동양화단에서 드물게 채색화를 하던 서양화가였다. 또 일본에서 유학한 박생광은 ‘일본색 혐의’까지 받고 있었다. 그는 기꺼이 박생광의 손과 발이 돼 줬다.

“1980년대 초 ‘명성황후’ 그리기에 몰입한 후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견줄 작품을 그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벼르던 때가 눈에 선합니다.”

전혁림은 박생광을 통해 알게 된 통영 출신의 화가였다. 박생광과 전혁림은 한국적 미를 화폭에 풀어놓아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을 그림을 통해 보여줬고, 회화의 전통을 현대적 시각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부인 신영숙(74)씨와 함께 두 화가와 걸어온 길을 책으로 펴냈다. 그가 2004년에 박생광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수유리 가는 길’을, 신씨는 2012년 전혁림의 작품 활동을 돕던 20년 세월을 기록한 ‘통영 다녀오는 길’을 냈다.

“처음 후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별 볼 일 없던 화가들이 1990년대 들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그들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죠. 하지만 작품만 많았지 개인미술관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어요.”

그는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경성(1919~2009) 관장과 작품 기증 문제를 놓고 의논했다. 돌아온 대답은 “미술관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 사립 1호 ‘이영미술관’… 돼지우리에서 출발

유명한 그림을 기증받으면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야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 국립미술관 형편상 한번 수장고에 들어가면 언제 또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당국의 높은 관심과 함께 관련 제도도 천천히 마련됐다. 사립 박물관·미술관진흥법이 제정됐고, 1995년 사립미술관 1호로 사업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일본 유학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등도 있지만 우리나라 미술관에 제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일본에서 예술사 등을 공부하기로 했어요. 또 미술관 운영이라는 임무를 맡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박생광 선생이 일본 유학파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망설임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미술관이 어렵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2001년 초에는 큰 병까지 얻게 됐다.

“미술관이라는 숙제를 안고 고민한 지 10년째 되던 해였어요. 간암 선고를 받고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아내가 ‘그 꿈꾸던 미술관 열어 보자’고 했어요. 응원의 메시지이자 구원의 손길이었죠.”

그는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해 8월에는 이영미술관을 열었다. 돼지농장을 개조한 건물이 곧 미술관이었다. 돼지우리 미술관에서 박생광 탄생 100주년 전시회(2004년), 90, 아직도 젊다 전혁림 특별전(2005년) 등이 이어졌다.

“돼지농장 미술관은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2003년에는 자매도시인 경기도―바르셀로나가 추진한 문화행사에 박생광 작품이 초청됐죠. 선생이 생전에 그토록 바랐던 명성황후와 게르니카를 견줘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죠.”

돼지농장 미술관은 이후 택지개발예정지구에 포함됐다. 여느 미술관과 달리 처음부터 작가와의 교감 속에서 작품이 하나둘씩 모인 곳, 부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 이영미술관은 2008년 6월 현 위치로 이전했다.



# 미술관 옆 박물관, ‘신영숙 컬렉션’

미술관 옆 박물관, ‘신영숙 컬렉션’으로 이동했다. 오후의 따뜻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박물관 옆 줄지어 선 거대한 항아리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신씨의 고향인 경남 거창은 가야의 숨결을 간직한 곳이다. 이 때문에 컬렉션 작품들은 가야 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반닫이 등 다양한 목가구, 목판인쇄, 다식판, 떡판, 절구와 맷돌, 다듬잇돌, 비녀, 가락지 등 할머니들이 일상 생활에서 쓰던 것들이 없는 거 빼고 다 있었다.

“51년 전 23세에 시집올 때 손녀를 아끼던 외할머니가 손때 묻은 살림살이를 물려주셨어요. 신영숙 컬렉션은 만난 지 50주년을 기념해 제가 아내에게 마련해 준 선물 같은 공간이지요. 처음에는 좋다고 하더니 50년이 흐르니 약발이 다 떨어졌나봐요. 예전 같지 않아요. 하하하.”

그는 미술관 운영에 대해 “죽을 지경”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립미술관에 뭐 볼 게 있을까’ 하고 호기심으로 찾아온 관람객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고 감동을 받곤 합니다. 또 조각공원처럼 꾸민 미술관 바깥 공간에서 휴식을 얻고 가기도 하죠. 공기 좋은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미술관과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건강도 회복됐어요.”

이금미기자/lgm@joongboo.com

사진=강제원기자/jewon@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