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태영, 그는 왜 시장을 꿈꿨나 1편]
염태영은 언제부터 시장이 되고 싶었을까?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제부터 시장이 될 생각을 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저는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염태영을 처음 본 것은 1989년의 일입니다. 그때는 <공추련, 공해추방운동연합>이라는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단체가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런 <공추련>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활동하던 <수원민청련>사무실에 와서 환경운동에 관한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름을 기억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이 있더라.... 이런 정도만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염태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원지역에서는 <경실련>이 창립을 준비하는 단계였는데 경실련 활동 중 환경분야 활동이 필요하게 되어 거기에 적임자를 찾던 중 염태영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물론 그때는 제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선배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옆에서 들은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감히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 아니었으니까요.
당시 염태영은 삼성건설(지금의 삼성물산 건설부문)에 다녔습니다. 서울 어디 건설현장에 소장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선배들을 따라 두세번 얼굴을 봤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럼 염태영은 왜 잘나가던 삼성건설을 그만두고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됐을까? 이 얘기를 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염태영이 학창시절 짱돌좀 던졌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회운동의 현장으로 뛰어 들때 자신은 동생들을 뒷감당하기 위해 직장을 잡아야 했던 기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환경운동에 대한 제안을 받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삼성건설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만둘 당시는 삼성건설에서 두산엔지니어링 이사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리곤 1994년에 수원환경운동센터를 설립하고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환경운동, 시민운동의 길로 들어섭니다. 사실 자신과 가족이 잘먹고 잘 사는 길이 있음에도 사회에 대한 봉사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요.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이 이익앞에 다가서고 책임앞에 물러서는 것인데 염태영은 이익앞에서 한발 물러나 사회적 공동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발 앞으로 다가가는 놀랍고 위대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염태영 시장이 누구보다 '공공선'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염태영이 시장의 꿈을 꾼 것은 아마도 故심재덕 시장의 영향이 가장 컸을 거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故 심재덕 시장이 염태영을 참 아꼈습니다. 아마도 환경분야의 전문성(기술사)을 높이 샀겠지마 무엇보다도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고자 하는 기본적 성품을 더 높이 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심재덕 시장과 염태영은 2095수원발전기획단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함께 논의하고 협의한 좋은 파트너관계였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심재덕 시장이 가족 이외에 <전립선암> 사실을 염태영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뢰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겠지요.
2002년 선거에서 낙선한 심재덕 시장이 오랜 시간 두문불출하다가 2003년 3월에 일본여행을 가게 되는데 그때 심시장이 선택한 사람이 바로 염태영이었습니다.(저는 짐꾼역할로 일본구경을 아주 잘했지요)
화서역 앞 작은 식당에서 저를 포함해 3명의 사람들이 염태영에게 시장에 출마하라고 강하게 요구한 것이 2000년 5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이 우리사회에 큰 바람을 몰고 와서 새로운 정치의 바람이 한참 불었습니다. 우리는 2002년 선거에 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요구했고 5시간이 넘는 실강이를 벌인 끝에 출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002년 선거는 출마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단순한 이유는 심재덕 시장이 출마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심시장님과 붙을 순 없다' 워낙 완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더이상의 진행은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사실 2002년도에 벌써 시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거지요.
2002년은 심재덕 시장이 3선출마를 결심하고 선거를 치른 해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심재덕 시장은 1995년, 1998년 두번의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분입니다. 그 분이 처음부터 무소속을 한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신한국당 시장 경선에 나갔다가 떨어졌지요. 그 과정에서 정당에 대한 혐오감이 매우 컸다는 회고를 나중에 여러 자리에서 하게 됩니다. 경선을 하는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더라느 거지요. 그래서 그런 요구를 일체 거부했더니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점수로 경선에서 탈락합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심재덕 시장은 무소속으로 출마를 강행합니다.(그때는 이런게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본선에서 무소속으로 승리합니다. 정당에 대한 혐오감이 깊었던 심시장님은 1998년에도 무소속을 고집하여 출마했고 또 당선됐습니다. 그때는 신한국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을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무소속이 승리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한나라당(당명을 그때 변경함)에서 마땅한 후보를 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는 수원지역 국회의원 3명이 모두 한나라당이었는데 그중에 한명이 저에게 하나의 제안을 해옵니다. '염선배를 입당만 시키면 시장후보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이었고 나중에 국회의원 3명이 모두 합의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당시 2002년 지방선거는 말 그대로 한나라당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때였기 때문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은 곧 당선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런 상항에서 황당한 제안을 받은 저는 염태영을 끈질기게 설득합니다. 심지어 도장까지 파서 입당원서와 시장후보 당내등록서까지 다 만들어서 염태영을 지치도록 만들었죠. 원서 접수 마지막날 저는 영통6단지 신나무실 아파트 앞에서 염태영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습니다. 허락을 받아야 접수를 하니 저로서도 몹시 초조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한나라당을 좋아할 사람은 아닌데 당선이 보장된 조건을 마다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 제 눈에 뭐가 씌였나 봅니다.
그때 염태영은 대전에서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고 저는 전화를 계속 하면서 '접수하겠다'는 몽니를 부렸습니다. 한참을 실강이를 벌인 끝에 염태영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1980년 광주에 5월 29일 산을 넘어 들어가 아스팔트의 피를 본 사람이다. 어떻게 내가 그 사람들과 손을잡나? 내가 시장을 안했으면 안했지 그런 굴욕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 그 얘기를 듣는 제 가슴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리곤 아무말 없이 그 서류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선 두번 다시 한나라당 후보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염태영이 만약 그 제안만 받았다면 2002년 수원시장 당선의 주인공은 바뀌었을 겁니다. 그러나 염태영은 자신의 소신을 갖고 자기 앞에 보장된 '당선'을 거부한 지조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 수원특례시의 종합 > ⋁❶前 수원특례시장(염태영)_활동.비전.어록.영상.보도.논객.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태영 수원시장, 수원 R&D 사이언스 파크 조성계획 발표 (0) | 2014.04.01 |
---|---|
수원시, 7대 복지수급자 확인조사 실시 (0) | 2014.04.01 |
염태영 수원시장,“수원 KT 위즈', 출정식 참석 (0) | 2014.03.31 |
전통 저염 장 담그기 체험 행사 열려 (0) | 2014.03.31 |
국방부·공군·수원시, ‘수원비행장 이전 운영협의체’ 구성 (0) | 2014.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