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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아쉬운 노송로 옛길을 걷다

떠나기 아쉬운 노송로 옛길을 걷다
[경기일보 2007-12-22]
일행은 화성행궁을 떠나 노송로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석거(萬石渠) 근방 식당에 차를 세우고 저수지 길을 따라 걸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빠져나가는 길이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이다. 이곳은 원래 파장골로 광주군 일용면 파동(琶洞)이었으며 흔히 파장골, 또는 파장굴 등으로 불렸다. 파장골은 파장동의 옛 터전인 일림동, 소토굴, 계명산 일대를 가리킨다. 처음엔 비파 ‘파(琶)’자를 사용했으나 나중에 파초 ‘파(芭)’자에 장(長)이 붙어 파장동이 됐다. 그 이유는 정조가 만석거(萬石渠)를 만들고 거기에 연꽃과 파초를 심었으므로 파초 ‘파(芭)’자를 사용했으며, ‘장(長)’은 어른이 있다는 뜻에서 더하게 됐다.
파장동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노송로가 있다. 이곳 소나무들은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됐는데 유래는 이렇다.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를 화성에 모시고 그곳의 식목관에게 내탕금(궁궐에서 쓰는 돈) 천량을 하사해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 등을 심도록 했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100여그루만 남아 있다. 길을 따라 수십기의 비석들이 서 있는데, 이는 수원에서 유수와 부사를 역임한 이들의 공적·선정비들이다.
1번 국도는 한세기를 거치는 동안 조금씩 위치를 바꿨다. 답사를 하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지만 1번 국도는 옛길과 새길 등이 있다. 길의 편리성을 따라 국도는 좀 더 넓고 빠른 길을 선택해 온 것이다. 노송로는 옛길이다. 2차로의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린 옛길의 풍취를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아름다운 길(정조의 효심이 담긴)에 자신들의 공적을 새기고 싶었을까. 화려하지 않은 비석들과 목민관의 품격, 분명 수원은 정조의 충직한 신하들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오고 싶은 요직이었을 터이다. 물론 화관의 꽃잎이 만방에 휘날리는 예쁜 낙하산으로 말이다.
옛길과 새길이 만나 다시 1번국도가 이어진다. 노송로를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이다. 언덕에 지지대비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현륭원(顯隆園) 전배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이곳에 행차를 멈추게 하고 현륭원쪽을 뒤돌아보면서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이때 정조의 행차가 느릿느릿했다고 하여 이곳의 이름을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됐다. 이런 내용이 지지대비(碑)에 잘 새겨져 있다. 비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해 1807년(순조 7년) 화성 어사 신현이 건립했다.
지지대를 넘으면 의왕이다. 과거엔 험한 길이었던 이곳도 이젠 가뿐한 고속화도로가 돼 있다. 더디고 더뎌서 지지대이건만 경수산업도로(이 구간의 1번국도)는 과거의 길이 결코 아니다. 또한 지지대 근방은 영동고속도로와 북수원IC와 과천~봉담 고속화도로가 교차하는 현대화 길의 한축이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