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상) | | | 정조대왕의 재임기간을 가리켜 ‘조선시대 르네상스’라고 표현한 글들을 종 종 읽는다.
필자 개인적으로 대단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서구의 문예부흥기를 뜻하 는 르네상스라는 말을 가져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붙이는 행위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르네상스라는 말이 정조시대를 깊이 연구해 호감을 가진 이들에 의해 기왕에 사용되었고, 또 그런 대로 정조시대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주 나쁘게는 여겨지지 않는다.
정조대왕! 그는 역사와 현재에 남긴 것이 아주 많은 임금이다. 우선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성했고, 2천권이 넘는 책을 직접 쓰거나 편찬했다. 중국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저술을 남긴 제왕은 극소수이며 그 분량도 100여권에서 200권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조대왕이 얼마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정조대왕이 규장각을 만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군주(愛民君主)로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강제 부역 대신 후한 임금을 지급하고 더위에 지친 일꾼들을 위해 몸소 척서단 등 을 직접 처방해 내려주고 복용방법까지 상세하게 일러준 임금이다.
정조대왕은 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감동할 정도로 기뻐했다. 뜰에다가 측우기를 놓아두고 수시로 비의 양을 물었으며, 곡식이 부족한 탐라(제주) 백성들을 늘 안타깝게 여겨 가뭄이 들면 언제나 다른 지방보다 먼저 배에다 곡식을 싣고 가 먹이도록 했다. 그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손수 제문을 지어 바다의 신에게 제사하도록 했다는 것.
다산 정약용 등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중용했으며,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두 어 비록 임금의 잘못을 전혀 숨김없이 말하고 대드는 자라도 너그럽게 포용 하여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자는 한명도 없었다. 수원으로 능행차를 할 때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격쟁(擊錚:백 성들이 임금의 행차시 꽹가리나 징을 친 뒤 임금에게 상소를 하는 제도)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강행한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백 천가지 병폐는 다 언로가 막혀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마 련해도 입바른 말을 들을 수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풍조만 일 고 있으니…(중략)…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정치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말을 하도록 하라” “까마귀나 솔개의 알을 깨트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의 직무에 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 줄 일이 아니다.”라며 충언을 유도하고 있다.
때마침몇년 전향토사학자이자 답사전문가인 염상균씨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수원청소년문화센터 주최 ‘화성 바로 알기 역사교실’에서 발표 한 자료가 ‘정조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은 참석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는데 먼저 정조대왕의 탄 생과 어린 시절 부분을 발췌해 여기에 소개한다.
‘정조임금은 영조28년(1752) 9월22일 축시(01~03)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그에 앞서 영조 27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용꿈을 꾼 사도세자는 징조가 예사롭지 않다며 새하얀 비단에다 꿈에 본 용을 그려 벽에 걸었다. 성자를 낳을 조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아버지의 예감에 답했다. 큰 쇠북소리를 울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온 궁중이 다 놀랐던 것이다.
비록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기상이 의젓하고 콧날이 우뚝했으며, 꿈에서 용 을 보아서인지 얼굴은 용을 닮아 있었다. 영조도 산모인 혜경궁 홍씨에게 “네가 이런 자식을 낳았으니 종묘사직에 무 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아기의 이마와 뒤통수가 자신을 닮았다고 흡족해 했다.
온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기는 백일도 되기 전에 섰고, 일년도 채 못되 어 걷기 시작했으며, 돌 때는 돌상으로 걸어가서 맨 먼저 붓과 먹을 만지고 책을 펴서 읽는 시늉을 했다. 글씨 쓰기를 좋아해 두 살 때 이미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3~5세 때는 제법 글씨체가 이루어져 날마다 그것으로 장난을 삼았다. 정조가 대여섯 살 때 쓴 글씨를 가지고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글은 이미 너덧 살 때 다 알아서 어른처럼 편지를 써 내려갔다. 타고 난 천성이 검소하고 소탈해서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입은 옷이 더러워지고 해져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장난감도 질박한 것을 좋아해 한번 마음에 들면 오래 가지고 놀았다. 늘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독서를 시작했으며 너덧 살 때부터 꿇어앉기를 좋아해 항상 바지의 무릎 부분이 먼저 해지곤 했다. <김우영 주간> | |
| 등록일 : 2008-01-03 |
정조대왕(하) | | | 정조대왕은 효심이 지극했다. 또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듯이 백성을 보살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효성에 대해서는 가히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라 할 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조대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장조로 추존)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것도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현장을... 어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할아버지 영조에게 달려가 아버지의 구명을 호소한다. 하지만 손자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친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할 수 없이 스스로 목을 매거나 돌에 머리를 부딪치는 등 자결을 시도했지만 사람의 목숨이 어디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것인가? 사도세자가 죽지 못하자 영조는 음력 5월 불볕 아래 놓인 뒤주 속으로 들어가라고 호령을 했다. 그리고는 뒤주에 가둔 뒤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못질을 해버렸다. 목이 말라 탈진 상태인 사도세자에게 일부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청심원 등을 넣어주기도 했지만, 영조는 사도세자가 잘 죽지 않는다고 풀을 베어다 뒤주 위에 덮어버리라고 명했다.
찌는 듯이 더운 날씨, 사도세자는 결국 좁은 뒤주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어린 정조의 뇌리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 지워질리 없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은 창경궁 앞(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에 세워 지는데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던 기간인 5월13일부터 21일까지는 매년 아예 이곳에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죽어가던 아버지의 고통을 헤아리기 위한 애틋한 마음이었으리라.
정조대왕은 재위 초부터 부친의 묘 자리가 별로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오고 있었으나 실행을 해오지 못하고 있다가 즉위한 지 13년이 지난 1789년에야 수원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이장을 하고자 땅을 팠을 때 사도세자의 관속에는 물이 차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정조대왕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28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런 곳에 모셔 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이제부터라도 조금이나마 풀릴까?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園寢:왕세자나 왕세자빈 ,왕의 친어버이나 임금을 낳은 어머니인 빈의 묘소-사도세자는 후에 장조로 추존됨으로써 현륭원이었던 원침의 이름도 임금과 같은 격인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주변에 갖출 것을 다 갖추어서 그것으로라도 작은 정성을 표시해 야겠다.”
원래 정조대왕은 검소한 분이었지만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 만큼은 화려하게 조성했다. 얼마 전 이 기획물 가운데 '왜 화성을 쌓았을까'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언급한바 있다.
정조대왕은 능행차 때 아버지의 묘에 엎드려 눈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서럽게 흐느껴 울었으며, 결국은 탈진해 늙은 정승 채제공의 등에 업혀 내려 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의 효성은 비단 아버지 사도세자에게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한중록'의 저자이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정조대왕은 스스로 “나라의 큰일이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어머니께 여쭙지 않고 그냥 한 일은 없다.”고 술회 할 정도로 혜경궁 홍씨를 받들어 모셨다. 혜경궁 홍씨가 병이 났을 때는 밤낮 없이 근심하며 스스로 약을 지어 드렸다. 1795년에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를 위해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성대한 잔치를 열어드렸다. 화성에서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할 때는 어머니가 놀라실까봐 대포의 방향을 행궁에서 멀리하도록 했다.
효심 부분에 대한 화성연구가 염상균씨의 글을 인용해보자. “회갑 잔치를 위해 서울에서 오는 도중에도 음식을 일일이 맛본 후 드 렸으며, 쉴 때마다 다가가 안부를 여쭈었다. 어떤 날 비가 내렸는데, 높은 고개나 미끄러운 길이 나타나면 자신의 옷이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번번이 말에서 내려 혜경궁 가마 옆으로 가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효심이 지극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영조와 할머니 정순왕후에게도 큰 효성을 보였다. 영조가 나이가 들어 병이 생기자 소변을 맛보는 등, 10여년간 밤낮 없이 할아버지 곁을 떠 나지 않으면서 병간호를 했다. 증세가 조금이라도 심해지면 울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효와 개혁의 군주 정조대왕. 수원을 근거지로 구태 정치를 개혁하고자 화성을 쌓고 행궁을 건축했던 임금. 나이 들어 은퇴한 후에는 수원에 살고자 했던 정조대왕은 1800년에 개혁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1752년에 태어났으니 만48세의 나이였다. 이후 노론들이 다시 득세를 하게 되고 국운은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100여년 후에는 주변 열강들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결과가 빚어진다. 역사를 가정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만약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나라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김우영 주간〉
|
정조대왕(중) | | |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이사장 김이환)의는 매년신년 하례식에 이어 팔달산 성신사 (城神祠)터에서전 회원의 마음을 모아성신(城神)에게 제를 올리는 예를 갖추고 있다.
필자도 그 모임의 말미에 이름을 걸어두고 있는 터여서, 화성을 깊이 사랑 하고 연구하는 회원들과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옆 잔디밭에 임시로 마련된 제상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곤 한다. 분에 넘치게도 얕은 글재주나마 필자가 제문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곳에서 다시 술과 향이 올려졌으며 다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모았는가? 작은 자리였지만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후일 이 지면에 다시 성신사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지만 우선 간략하게 성신사에 대한 소개를 한다. 화성이 완공된 1796년 정조대왕은 어명을 내려 성을 지켜주는 신(城神)을 위한 사당을 지으라고 명한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 11일에 공사를 시작하 고 그 해 9월 1일에 성신사가 준공됐다.
성신사가 완공됐다는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화성 낙성연 전에 위패를 모시도록 지시하고 제문을 스스로 지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9월 18일에는 헌관을 화성유수가 담당하도록 명을 내렸으며, 9월19일에는 사당 안에 신주(神主)를 봉안할 때 향축(香祝: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내 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향축과 제수용품을 규정에 의해 내려보내도록 했다.
성신사는 화성을 영원히 보존하고, 우리 국토와 수원땅과 백성들을 무사태평하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는 사당이자 기념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신사는 1796년 화성이 낙성되고 나서 낙성연이 열리기 전에 먼저 제사를 올린 사당이다. 그런데 1800년 개혁정치를 진두 지휘하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노론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다. 이어 정조대왕이 아끼던 신하들이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정조의 꿈이 담긴 화성은 관심 밖으로 멀어지게 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성신사도 마찬가지. 성신사에 대한 그 뒤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확 실치 않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돌보는 사람 없이 비바람에 서서히 폐허가 됐을 것이고 정조의 개혁의지가 담긴 화성과 함께 노론들의 '의도된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런 역사를 생각하면서, 뛰어난 임금이었던 정조대왕을 기리면서, 우리는 성신사라고 추정되는 자리에서 정성껏 향축을 올렸다. 정조대왕은 근엄하면서도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임금이었다고 한다.
지난호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화성연구가이자 문화유적 답사전문가인 염 상균씨(화성연구회 회원)는 강좌를 통해 정조대왕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 바 있다.
'해가 비치는 곳이면 항상 자세를 바로 잡았고, 옷을 갈아입거나 소변을 볼 때도 북극성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쪽을 향하지 않았으며, 비바람이 불거나 천둥이 일면 반드시 일어나 표정을 고쳤다. 종묘에 제사하고 문밖을 나설 때는 근엄하고 경건한 태도였고 술잔을 올릴 때면 민첩하기가 날아갈 듯 하여 일을 돕는 백관들도 모두 엄숙히 대했다. 제사 때도 음식을 올려 오면 반드시 꿇어앉아 맛을 보았다'
이런 정조대왕이었기에 국가적 대역사로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해 줄 기지로서의 화성을 축성한 뒤, 성신사를 지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효심을 바탕으로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애민군주, 합리적인 국정, 단호한 의지와 확고한 이념으로 지(知), 인(仁), 용(勇)을 겸비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조대왕. 그는 성신사를 지은 데서도 나타나듯 하늘을 공경하는 임금이었다. 따라서 승하 후 능의 이름을 건릉(健陵)이라고 했다. 이는 쉬지 않고 가고 있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또 '바른 임금'이라는 뜻인 정종(正宗)이라는 묘호(廟號:임금의 공덕을 기리어 사후에 주던 이름)를 받았다.
이는 정조대왕이 도학(道學)과 의리(義理), 법도가 바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와 교훈을 바탕으로 마음을 바르게 했기 때문에 조정, 백관, 만민이 바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조대왕을 '바른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조대왕은 하늘만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두려워 할 줄 알았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물과 같은'백성들의 힘 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격해지면 배를 뒤집기도 하는 존재다. 그 렇기 때문에 백성들과 관계된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리 깊은 밤일지 라도 곧바로 아뢰게 했다. 1800년 6월 병이 깊어져 국사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백성들과 관련된 일이면 즉시 내게 알려라”고 명했는데, 그 달 28일 승하하고 말았다.
화성 성역이 모두 끝난 1년 후인 1797년의 수원 행차 때에는 “성이 모두 완공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 집집마다 부자가 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는 것)여덟 글자이다.”라 고 하면서 신도시 수원 땅에 사는 백성들의 민생을 걱정하기도 했다.
'호호부실 인인화락!'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국가와 모든 지방자치단체의 지도자, 기업인들이 머리와 가슴에 새겨 넣고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경영이념이다. <김우영 주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