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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첫 원찰은 의왕 청계사”

“사도세자 첫 원찰은 의왕 청계사”
경기문화재단 "원찰 용주사 보다 1년 앞서"
[경기일보 2008-1-4]
청계사가 정조에 의해 창건한 사도세자의 원찰 용주사(1790년)보다 1년 앞서 원찰로 지정되었음을 증명한 목판이 최근 발견됐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용주사를 중건했으나 당시 화성유수를 역임하며 화성성역화를 감독한 조심태가 의왕 청계사를 중건하면서 사도세자의 원찰로 삼았다는 목판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은 3일 청계사가 소장한 조선시대 목판 18종 466판 인출과정에서 청계사와 정조대왕과의 연관성을 제시했다.
1798년 청계사를 중건한 조심태의 ‘청계사법당중건공덕주기’(이하 공덕주기)에 따르면 “이 절이 바로 현륭원(1789~1899년)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고 “조정에 요청하여 전폐를 출연하고 섬돌과 마룻대, 들보 등을 개조했다”고 기록했다.
중건에 많은 비용을 지불한 대공덕주 조심태는 화성유수로서 현륭원과 화성축성을 주도했으며, 축성 후 인부들을 청계사 중건에 활용했다.
이 공덕주기는 도편수 정복룡이 화성성역시 내수사에서 파견된 목수며, 손동현은 장안문과 영화정 등을 건축한 목수였다고 밝혔다. 또 도화원 소속 유선과 승정은 화공으로 화성성역과 청계사 중건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윤한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전통문화실장은 “용주사를 원찰로 삼기 이전부터 청계사는 사도세자의 원찰이었다”며 “공덕주기는 평양 조씨인 조심태 가문과 인연이 깊은 청계사와 정조대왕과의 연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불교가 쇠퇴한 시절 화성성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청계사에 투입된 것도 눈길을 끈다”고 덧붙였다.
권상로가 쓴 ‘조선사찰전서’에 따르면 청계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임을 기록했지만, 실제 증거물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조시대 불교정책을 연구한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는 “당시 원찰은 여러 곳에 두웠다”며 “폐해가 심했던 원찰 혁파에 앞장섰던 정조대왕이 청계사와 용주사를 원찰로 삼은 것은 무척 흥미로운 연구과제”라고 말했다.
한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된 청계사 목판은 묘법연화경(1622년)을 비롯, 오대진언(1485년), 불교강원교과목, 불교의식 문헌, 천자문 등이며, 전통방식에 따른 인출을 거쳐 총 35질을 묶어낼 계획이다. 특히 청계사가 보관중인 오대진언과 똑같은 판본이 규장각에 보관중이며, 청계사 묘법연화경보다 200여년 앞선 보물 판본(1486년)이 명지대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