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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나혜석 .장한나

홍난파 .나혜석 .장한나
2008.01.10 22:48
http://tong.nate.com/jc5115/42829573
홍난파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군)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나 1941년 8월 30일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44세의 삶과 예술이 바로 한국근대양악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흔히 '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그 다음해인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나간다.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평론가, 음악교육가, 지휘자, 작가로 활동 하였다.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고, 1931년 7월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

년 도

활 동 내 용

1919년 10월13일[경성악우회]를 조직하고 창립연주회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함
1920년 11월13일단성사에서 개최된 [음악대연주회]에서 바이올린 독주함.
1921년 5월동경에서 열린 [폴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 독주자로 삼청(三請)을 받음.
1922년 9월 9일[경성 순회악단](단장 홍난파) 음악회를 천도 교회당에서 개최함.
1923년 6월[정동 계명 음악원] 주최 음악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관현악 반주에
의한 합창을 지휘함
1923년 12월17일[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을 독주함.
1924년 1월9일우리나라 최초로 [홍난파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함.
1930년 7월5일보성전문학교 학생회 주최 [납량음악대회(衲凉音樂大會)]에서 연주함.
1934년 10월30일[경성 보육학교 녹양회] 주최 대음악회에서 연주함.
1937년 2월3일전형철 독창회에서 [경성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함.
1939년 6월8,9일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회]에서 경성방송
관현악단을지휘하여관현악곡과 '나그네의 마음'을 연주함.
1930년 7월 23일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교향곡 전악장(주피터 교향곡)을 연주함.

나혜석


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 호는 晶月)은 근대 미술 사상 최초

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알려졌을 뿐, 여성 작가와 여성해방론자로서의 면모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전 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개성의 확립이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절에 나혜석은 여성 화가로서 여성해방론자로서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아직 조선여성 대부분이 근대적 자의식을 가지기는 커녕 가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혜택 받은 여성으로서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고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나혜석에게는 혜택이면서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무였던 것이다.

그의 시『인형의 가(家)』(1921.4.3)에 나오는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라는 것이 나혜석이 여성으로서 추구한 평생의 목표였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 사람의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것, 이것이 나혜석이 쓴 글이나 행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며 그의 그림 속에도 이러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 추구 속에서 최초의 근대여성 화가로서의 자기 단련도 이루어졌고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로서의 글쓰기도 이루어졌으며 당대에 많은 파문을 불러 일으킨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과 이혼도 단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나혜석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원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쓰기에 이르렀다.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서도 끝내 불문에 귀의하지 않은 결기와 아무도 모르게 맞이한 나혜석의 비극적 최후도 이 추구의 도정이 이른 자연스러운 종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작가

『여자계』제2호에 소설「경희」를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함으로써 나혜석은 한국 근대여성문학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특히 일본유학생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신여성의 이상을 조선적 현실에 구현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경희」는 부르주아 계몽문학으로서 동시대 남성들의 소설보다도 사실성이나 구성력, 인물의 성격화에서 뛰어난 작품이다.그리고 조역으로라도 등장할 경우 외면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지만 대개 허영에 젖어 있어 성적 방종에 빠져 있고 내면은 자유연애와 성적 방종을 동일시하는 허영에 젖어 부호의 첩으로 쉽게 떨어지는 사이비 근대의식의 소유자로 부정적 측면만 부각되어 있을 뿐 그 여성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의 갈등 좌절, 그리고 진지한 자아 실현의 모색 과정을 묘사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성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뚜렷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한 여성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혼했다고 하는 사생활에 의해 그의 업적은 가려졌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근대사에 오르내리는 숱한 남성 인물들의 그런 경력은 오히려 그의 '남성다움'으로 은근히 추켜세워지기까지 하는 것과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190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현모양처론은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시기 내내 한국여성에게 강요되고 여성 자신에 의해 내면화된 지배적 규범이 되었다.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을 길러내고 내조하는 계몽기의 현모양처론은 구조적으로 민족주의와 친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조선은 식민지였고 나혜석이 일본에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명분은 여성에게 더욱 현모양처되기를 강조하게 된다.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구여성에게 민족주의의 현모양처론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면서 해방의 작용을 했다.
반면에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지향하는 일부 신여성들에게 민족주의의 현모양처론은 그러한 생각의 표현을 억누르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했다. 나혜석이 구미여행과 지신의 이혼 경험으로부터 1930년대에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당시 나혜석의 동료였던 여성들은 대부분 기독교 여성 운동 쪽에 가 있고 서서히 친일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섣불리 나혜석의 주장이나 행동에 동감을 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주의적 여성 운동에 나혜석이 보조를 맞출 수도 없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하기에는 나혜석은 '경력이 너무 고급'이었다.
규범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내세운다든지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신여성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나혜석의 후배 세대, 1930년대의 여성들은 자기 검열을 통해 현모양처의 외관을 갖추면서 내면적인 반란을 꿈꾸기는 했어도 드러내어 주장하고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현모양처의 규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더욱 고립되어 풍문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관보를 통해 나혜석의 사망이 전해졌을 즈음 나혜석의 행복과 불행에 얼마만큼씩 원인을 제공했던 남자들, 김우영, 최린, 이광수는 모두 반민 특위의 법정에 서 있었다.
한 개인은 자기가 태어난 시대를 넘어서기 힘들다. 나혜석 역시 근대 사회로 변환하는 길목의 조선 사회에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시대적 운명을 넘어서기 위해 피투성이의 싸움을 치렀다 . 그리고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50년 새로운 여성의 역사는 그를 치욕과 풍문 속에서 불러내어 억압에 맞섰던 당당한 선구자로 세우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 해방 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나혜석이 시대를 앞서 이를 선취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해졌다.
이제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여성해방론자로서 다양한 조명을 요구하고 또한 그 모든 측면에서의 연구를 감당하는 한국근대사의 한 봉우리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장한나




- 역대 최연소 기록이며 음악천재성 평가 받음
- 난파음악상 수상(현재 연주 활동)











년 도

활 동 내 용

1989년(7세)

첼로 연주시작

1992년(9세)

월간음악주최 전국 콩쿠르 1위 입상

1993년 2월

한미 뉴욕 줄리어드 예비음대 입학(특별 재학생)

1994년 10월

세계최고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경연대회 최우수상과
현대음악상 수상(파리 샹젤리제 극장)

출처 : Tong - ①수원의비전 양종천님의 인물/기관/단체/회사/조직/기타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