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 호는 晶月)은 근대 미술 사상 최초
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알려졌을 뿐, 여성 작가와 여성해방론자로서의 면모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전 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개성의 확립이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절에 나혜석은 여성 화가로서 여성해방론자로서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아직 조선여성 대부분이 근대적 자의식을 가지기는 커녕 가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혜택 받은 여성으로서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고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나혜석에게는 혜택이면서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무였던 것이다.
그의 시『인형의 가(家)』(1921.4.3)에 나오는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라는 것이 나혜석이 여성으로서 추구한 평생의 목표였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 사람의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것, 이것이 나혜석이 쓴 글이나 행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며 그의 그림 속에도 이러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 추구 속에서 최초의 근대여성 화가로서의 자기 단련도 이루어졌고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로서의 글쓰기도 이루어졌으며 당대에 많은 파문을 불러 일으킨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과 이혼도 단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나혜석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원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쓰기에 이르렀다.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서도 끝내 불문에 귀의하지 않은 결기와 아무도 모르게 맞이한 나혜석의 비극적 최후도 이 추구의 도정이 이른 자연스러운 종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작가
『여자계』제2호에 소설「경희」를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함으로써 나혜석은 한국 근대여성문학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특히 일본유학생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신여성의 이상을 조선적 현실에 구현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경희」는 부르주아 계몽문학으로서 동시대 남성들의 소설보다도 사실성이나 구성력, 인물의 성격화에서 뛰어난 작품이다.그리고 조역으로라도 등장할 경우 외면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지만 대개 허영에 젖어 있어 성적 방종에 빠져 있고 내면은 자유연애와 성적 방종을 동일시하는 허영에 젖어 부호의 첩으로 쉽게 떨어지는 사이비 근대의식의 소유자로 부정적 측면만 부각되어 있을 뿐 그 여성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의 갈등 좌절, 그리고 진지한 자아 실현의 모색 과정을 묘사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성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뚜렷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한 여성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혼했다고 하는 사생활에 의해 그의 업적은 가려졌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근대사에 오르내리는 숱한 남성 인물들의 그런 경력은 오히려 그의 '남성다움'으로 은근히 추켜세워지기까지 하는 것과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190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현모양처론은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시기 내내 한국여성에게 강요되고 여성 자신에 의해 내면화된 지배적 규범이 되었다.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을 길러내고 내조하는 계몽기의 현모양처론은 구조적으로 민족주의와 친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조선은 식민지였고 나혜석이 일본에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명분은 여성에게 더욱 현모양처되기를 강조하게 된다.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구여성에게 민족주의의 현모양처론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면서 해방의 작용을 했다.
반면에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지향하는 일부 신여성들에게 민족주의의 현모양처론은 그러한 생각의 표현을 억누르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했다. 나혜석이 구미여행과 지신의 이혼 경험으로부터 1930년대에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당시 나혜석의 동료였던 여성들은 대부분 기독교 여성 운동 쪽에 가 있고 서서히 친일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섣불리 나혜석의 주장이나 행동에 동감을 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주의적 여성 운동에 나혜석이 보조를 맞출 수도 없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하기에는 나혜석은 '경력이 너무 고급'이었다.
규범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내세운다든지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신여성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나혜석의 후배 세대, 1930년대의 여성들은 자기 검열을 통해 현모양처의 외관을 갖추면서 내면적인 반란을 꿈꾸기는 했어도 드러내어 주장하고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현모양처의 규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더욱 고립되어 풍문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관보를 통해 나혜석의 사망이 전해졌을 즈음 나혜석의 행복과 불행에 얼마만큼씩 원인을 제공했던 남자들, 김우영, 최린, 이광수는 모두 반민 특위의 법정에 서 있었다.
한 개인은 자기가 태어난 시대를 넘어서기 힘들다. 나혜석 역시 근대 사회로 변환하는 길목의 조선 사회에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시대적 운명을 넘어서기 위해 피투성이의 싸움을 치렀다 . 그리고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50년 새로운 여성의 역사는 그를 치욕과 풍문 속에서 불러내어 억압에 맞섰던 당당한 선구자로 세우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 해방 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나혜석이 시대를 앞서 이를 선취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해졌다.
이제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여성해방론자로서 다양한 조명을 요구하고 또한 그 모든 측면에서의 연구를 감당하는 한국근대사의 한 봉우리로 우리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