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거닐며 정조를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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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수원 화성사업소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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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연 더 공고해져
"역사는 살아있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이를 현실에서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역사의 생생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사실의 중심에 서 있는 이가 있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사업소 김준혁(41) 학예연구사가 바로 그다. 정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 씨는 어려서부터 역사, 그 중에서도 정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 질긴(?) 인연은 어린 시절 중등교사로 국사를 가르치시고 초등교사로 교직에 몸담았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백령도로 전근을 가셨던 아버지를 따라 2년간 섬에서 지냈던 김 학예연구사에게 소일거리라곤 독서와 낚시 뿐.
핏줄때문인지 역사책에 가장 흥미를 보였고 낚시를 하는 동안 읽었던 사실들을 되내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후 김 박사는 수원연무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으신 아버지를 따라 초·중·고 학창시절을 모두 수원에서 보내며 정조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아버지는 수원에서 자전거로 출근하시는 길에 항상 나를 뒤에 태우고 매일 역사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가난해서 안된다'는 어머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아버지를 따라 사학과를 선택하고, 매일 보는 수원 화성과 그 세계문화유산을 이룩한 정조대왕을 연구하게 된 것은 저의 운명이랄 수 밖에요.(웃음)"
'수원토박이'인 그가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에서 뛰놀고 그것을 창조했던 정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필연인 셈이다.
대학원에서 항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도 정작 논문은 정조의 불교정책을 주제로 작성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고즈넉한 방에 들어앉아 평생 연구에만 몰두할 것 같은 그가 연구직이지만 공무원의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의아심을 갖는 이도 많다.
"경제적 현실이 장애가 됐죠. 시간강사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기에는 벅차잖아요. 그러던 중 화성을 연구·보존 등을 담당할 연구직공무원 채용 소식을 들었죠. 주위 분들의 권유에 응시를 하긴 했지만 영어시험때문에 붙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웃음)"
2003년부터 현실의 벽에 부딪혀 걷게 된 수원시 학예연구사. 그러나 공무원으로의 새로운 시작은 결국 김 박사와 정조와의 인연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주말에는 관광객에게 화성을 설명하러 나서고 평일에는 공무원으로 행정적 일을 처리하느라 365일 중 360일을 근무했어요. 밤에는 또 지역의 문화전문가들과 술 한 잔을 걸치며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의 담론을 이끌어내는 역할도 자처했죠. 오죽했으면 제 아내는 제게 '가장으로서 한 일이 뭐가 있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죠."
'정조 전문가'의 삶을 걷고 있는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꿈 속에서까지 정조대왕의 숨결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특히 최근 대중역사서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여유당·368·1만5천원)를 펴낸 이후 그는 더 깊이 조선시대에 빠져든 듯 하다.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매일 화성을 만나 그 우수성에 감탄하고, 복원사업에 참여하면서 이를 이룩한 정조와 그의 개혁정책 등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이 책 탈고 후, 이산 정조가 제 가까이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최근 제가 사도세자처럼 뒤주에 갇혀 몸부림치고 죽음을 앞둔 정조처럼 종기를 앓으며 숨이 콱콱 막히는 꿈을 꿨죠. 정조의 삶이 이제 고스란히 제 인생에서 살아 숨쉬는 느낌이랄까."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으로 정조를 꼽는 김 박사의 '정조 사랑'은 끝이 없다.
내년에는 '역사상 가장 멋진 군대이자 정조대왕의 개혁정신을 고스란히 품고있는 장용영군'을 주제로 한 대중역사서를 출간할 계획이기 때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면 평생을 연구하며 얻은 지혜를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그는 오늘도 화성을 걸으며 정조를 만난다.
/글·사진=류설아기자 blog.itimes.co.kr/rsa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