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1692-1757)의 묘는 홍릉이다. 이 홍릉의 특징은 영조가 생전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 -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놓은 묏자리)로 잡아놓았던 터가 비워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왕비가 먼저 죽어 능을 만들 때 왕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라 하면 산릉공사를 하면서 왕비 자리 옆에 터를 조성한다.
살아서는 왼편을 높이는 좌상우하(左上右下)를 고수하고, 죽으면 오른편을 높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에 따라 정성왕후의 오른편을 비워놓았지만 영조는 이곳에 잠들지 못했다. 왕비의 오른 쪽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을 우허제(右虛制)라 한다.
쌍릉이나 합장릉일 때 왕비가 먼저 죽고 왕 자신의 자리를 같이 만들라는 전교를 내려야만 왕비 곁에 묻히게 된다. 그런 전교가 없을 때 죽은 왕비 곁으로 왕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영조가 미리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음에도 정조는 영조를 이곳에 묻지 않고 103년 전에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 파묘자리에 파묻어 버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한다. 풍수에서 파묘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맥이 빠진 자리라 하여 흉지로 친다.
백성들도 묘지를 잡을 때 기피하는 대표적인 자리가 파묘, 무당 터, 감옥 터, 병영 터 등인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절대로 이곳에 묻어줄 수 없을 만큼 증오한 것이다. 홍릉의 영조 우허제는 2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빈 채로 남아 있다.
|